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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필사본 이야기: 격랑을 이겨낸 보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13 조회수6,962 추천수0

[필사본 이야기] 격랑을 이겨낸 보화(寶華)

 

 

어찌 보면 극동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유럽의 중세 미술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중세 필사본은 잠시만 자세히 관찰해 보아도 그에 담겨 있는 옛 필사가와 화가들의 순수한 신앙심과 하느님께로 향한 소박하고 깨끗한 마음과 마주하게 하며, 강한 종교적 감동을 느끼게 한다.

 

 

비잔틴 필사본 - 격랑을 이겨낸 보화

 

비잔틴 필사본은 동로마 제국에 속했던 지역(오늘날의 그리스, 터키와 이집트, 시리아 등 중동의 일부 지역)에서 제작된 필사본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가 동방에서 탄생하여 서유럽으로 전파되었듯이, 성서 필사본도 5~6세기에 시리아와 이집트 등 동방에서 처음 제작되었고, 이후 그리스도교의 포교 루트를 따라 섬(아일랜드나 브리튼)이나 서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대개 그리스어로 쓰인 비잔틴 필사본 원문은 후대에 서유럽에서 서서히 라틴어로 번역되어 필사되었고, 채색 삽화의 표현 기법은 비잔틴 필사본의 영향 아래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변형되면서 독자적인 필사본 양식으로 거듭났다. 따라서 5~6세기 비잔틴 필사본의 그리스도교 미술사적 의미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현존하는 비잔틴 초기 필사본은 매우 적다. 동로마 제국에서 100년이 넘게 폭력적으로 진행된 성상 파괴 운동(730-843년)으로 인하여, 그리고 1453년 이슬람 세력의 점령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대부분 파손되거나 분실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초기 비잔틴 성서 필사본으로는 비엔나 창세기(Wiener Genesis), 로사노 복음서(Codex Purpureus Rossanensis), 시노펜시스 복음서(Codex Sinopensis), 라불라 복음서(Rabbula-Evangeliar), 코튼 창세기(Cotton-Genesis) 등이 꼽히는데, 그들도 운명적으로 도피에 성공하여 구사일생으로 안식처를 찾았다.

 

 

‘비잔틴(Byzantine)’이란?

 

비잔틴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소아시아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인 비잔티움(Byzantium(라틴어) ; 이곳에 도시를 육성한 그리스 메가라의 왕인 비잔타스의 이름에서 유래)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하게는 “비잔티움의”라는 의미의 형용사이다. 그러니까 비잔틴 제국은 비잔티움을 수도로 하는 제국을 뜻하며, 비잔틴 미술은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 즉 비잔틴 제국의 미술을 가리키게 되었다. 잠시 여기에서 이 도시의 운명을 되돌아보자.

 

콘스탄티누스 대제(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Augustus(라틴어), 재위 306-337년)가 공포한 밀라노 칙령(313년)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후, 다신교를 신봉하던 로마 제국은 엄청난 혼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제는 그 혼란을 극복하고 제국을 개혁하기 위해 동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오랜 역사를 지닌 로마에서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수도를 옮겼다(330년). 그는 새로운 수도를 중심으로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를 꿈꿨다. 그리고 그의 꿈을 담아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의 콘스탄티노폴리스(라틴어 Constantinopolis, 영어 Constantinople)로 개명하였다. 사실상 로마 제국의 동로마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Flavius Theodosius, 재위 379-395) 시대에 국교로 선포되기에 이른다(380년). 이 도시는 1453년 이슬람 세력에 정복되어 이스탄불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동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은 같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지만, 16세기에 독일의 역사학자 볼프(Hieronymus Wolf)가 비잔틴 제국이라고 명명할 때까지 비잔티움은 완전히 잊혀졌다. 단지 동로마 제국으로 불렸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비잔틴 제국’이라는 명칭은 이교도의 제국이었던 로마 제국과는 구분되는, 제국의 천도로부터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존립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던 제국의 시대를 강조하려 한 볼프의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로마가 동과 서로 나뉜 이후, 그리스도교는 동방정교회와 가톨릭교회로 분리되었다. 동방정교회는 제정일치 체제와 정통성을 중시하였고, 가톨릭교회는 제정분리 체제와 진보적 보편성을 중시하였다. 교회의 완전한 분리는 11세기에 이루어지지만, 그때까지 종속 관계를 유지하려는 동로마제국과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한 서유럽의 충돌은 피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심한 종교적 · 정치적 · 군사적 반목과 갈등의 기나긴 세월을 겪어야 했다. 요셉 보이스 등 많은 현대 유럽 예술가들이 ‘동서의 일치와 화합’을 자주 주제로 삼아 왔는데, 그러한 현상을 우리는 동양과 서양의 조화와 화합이라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들에게는 동로마와 서로마, 가톨릭교회과 동방정교회의 화합과 일치가 여전히 피부에 더 가까이 와 닿는 이야기이다.

 

 

비잔틴 필사본

 

대부분의 비잔틴 성서 필사본의 운명은 매우 기구하였다. 탄압과 전란을 피해 비교적 안전한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고, 그 숨 가쁜 이동 과정에 파본되거나 분실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비잔틴 성서 필사본은 원형 그대로 온전하게 현존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여기서는 초기 비잔틴 시기에 제작된 몇몇 대표적 필사본에 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비엔나 창세기(Wiener Genesis) : 현재 비엔나의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소장

 

6세기 초에 콘스탄티노플이나 시리아 지역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잔틴 성서 필사본이다. 코튼 창세기와 함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구약 성서 필사본이다. 자색의 양피지에 그리스어로 필사된 귀중본이며, 당연히 왕이나 귀족은 물론 고위 성직자들의 주문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비엔나 필사본은 원래 총 96쪽에 약 192개의 채색 삽화가 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24쪽에 총 48개의 채색 삽화가 보존되어 있다. 모두 창세기의 내용인데, 창세기만으로 이렇게 많은 장면을 담은 필사본으로 제작한 것은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각 쪽마다 상·하단을 나누어 상단에는 텍스트가, 하단에는 그것을 묘사한 채색 삽화가 들어 있다. 채색 삽화는 당시의 다른 필사본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색상이 능숙하게 채색되었고, 형상은 투박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로마 제국의 후기 회화 양식의 지대한 영향을 보여 준다. 또한 채색 삽화의 묘사 방식이나 색채의 선택으로 미루어 적어도 5인 이상의 화가가 이 필사본의 공동 제작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4세기에는 베니스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1664년 비엔나의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으로 들어온 후 오늘에 이른다. 비엔나 창세기는 시노펜시스 복음서나 로사노 복음서와 같이 자색 양피지를 사용하였으며, 그로 인해 대략 그것들과 같은 시기에 같은 곳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사악의 아내를 찾도록 보내진 엘리제르에게 친절을 베푸는 레베카(붉은 의상)가 두 번 등장한다. 먼 길을 온 엘리제르와 낙타에게 물을 주는 친절을 베푸는 것으로 그녀가 이사악의 아내가 될 여인임을 암시하고 있다. 우물가에 길게 앉아 있는 반라의 여인은 강을 의인화한 표현이다. 뒤로 메소포타미아 도시가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2. 로사노 복음서(Codex Purpureus Rossanensis) : 현재 이탈리아 칼라브리아(Calabria) 주 로사노(Rossano)에 있는 종교예술 교구박물관 소장

 

6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이나 시리아 혹은 안티오키아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역시 자색 양피지에 필사된 그리스어 복음서이다. 명칭에 나타난 ‘Purpureus(자색)’는 자색의 양피지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원래는 4대 복음서가 모두 수록된 400여 쪽의 양피지 서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그 가운데 188쪽이 현존하며, 채색 삽화가 그려진 텍스트는 마태오 복음서 전체와 마르코 복음서(16,14-20 제외)가 남아 있다. 목차 부분(Eusebian Canons)과 4세기에 팔레스타인 지역(Caesarea)의 주교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의 서간이 각 복음서 앞에 수록되어 있다. 필사본 서두에 그리스도의 기적과 수난 장면 등 12점의 채색 삽화와 복음사가의 초상 2점이 수록되어 있다. 각 쪽 상단에는 성서의 장면을 묘사하고 중간에는 4인의 예언자상을 배치하는 형식, 그리고 상하 두 단으로 분리된 구도 형식을 전체 쪽에 걸쳐 모두 보여 주고 있다. 묘사된 인물의 극적인 움직임과 그리스도를 강조한 용모 표현이 주목된다.

 

7세기에 아랍인들에게 쫓겨 칼라브리아로 피신해 온 수사가 이 코덱스를 가지고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1879년 독일의 두 개신교 신학자인 게브하르트(Oskar von Gebhardt)와 하르나크(Adolf Harnack)가 이 코덱스를 발굴하여 연구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3. 시노펜시스 복음서(Codex Sinopensis) : 현재 파리의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

 

이 복음서의 명칭은 소아시아 반도 북부(현재의 터키)의 항구인 시노프(Sinop)에서 1899년에 발견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 무관이 한 그리스 노파에게서 구입하여 프랑스로 가져온 것이다. 역시 자색 양피지에 필사되었다. 발견 당시 총 43쪽이었고, 그중 42쪽이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Bibliotheque nationale de France)에 소장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서의 일부가 수록되어 있으며 모두 5개의 채색 삽화(헤로데의 축제와 세례자 요한의 죽음, 오천 명을 먹이심, 4천 개의 먹이, 예리코에서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시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가 들어 있다. 비엔나 창세기나 로사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6세기)에 같은 곳(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그에 대한 이견과 반론도 존재한다.

 

4. 라불라 복음서(Rabbula-Evangeliar) : 현재 이탈리아 피렌체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소장(Biblioteca Medicea Laurenziana)

 

시리아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4대 복음서가 모두 들어 있는 초기 비잔틴 필사본이다. 고(古) 시리아어 성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승천, 성령 강림, 성모자상, 마태오와 요한 등 14장에 이르는 채색 삽화가 들어 있다. 여타의 필사본과 비교하면 색채, 움직임의 표현, 극적인 장면 묘사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회화적 표현 방식이 매우 독보적이어서 그 미술사적 가치는 더욱 높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학자들 간에 제작 시기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 필사본은 586년 자그바(Zagba)에 있는 성 요한 수도원에서 라불라(Rabbula) 수사가 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불라 수사에 관해 알려진 것은 없고, 자그바는 오랫동안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한 지역일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현재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아파메이아 사이의 내부 지역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현재 필사본의 크기는 34×27cm이나 복원할 때 제본하면서 잘라 냈기 때문에 원래의 크기는 불분명하다. 이 필사본은 분명히 헬레니즘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페르시아 장식의 흔적도 보여 준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승천, 성령 강림 등의 장면들이 이국적이고 장식적인 문양들로 꾸며져 있다. 텍스트는 검정색과 어두운 갈색 잉크로 쓰였다.

 

이 필사본은 14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구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이후 그 소재가 불분명하다가, 1573년 피렌체에서 발견되어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으로 들어온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5. 코튼 창세기(Cotton-Genesis) : 런던의 영국도서관(British Library) 소장

 

코튼 창세기는 4~5세기에 구약 성경의 창세기를 그리스어로 양피지에 필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세기에 독일의 필사본 연구가 티셴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는 5세기에 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알렉산드리아를 그 제작지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원래 340-360여 장면의 삽화가 들어 있는 약 440여 쪽에 달하는 필사본이었을 것으로, 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채색 삽화가 들어 있는 필사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이후 이 필사본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노획되었고,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의 아트리움에 설치할 110개의 창세기 모자이크 디자인의 근거자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1220년대에 드러났다. 이후 두 명의 그리스인 주교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가져와 영국의 헨리 8세(재위 1509~1547)에게 바쳤다고 전해진다. 장서(藏書) 수집가인 코튼 경(Sir Robert Bruce Cotton, 1571~1631)의 도서관으로 들어갔다가, 1731년 코튼도서관의 대화재로 인하여 유서 깊은 필사본들이 다량 소실되었다. 코튼 창세기도 35쪽 분량만이 까맣게 그을린 상태로 남았으며, 그중 일부는 런던의 영국도서관(영국도서관은 코튼도서관에 기초하여 세워졌다)에, 나머지 부분은 옥스퍼드 대학교 보들리언 도서관(Bodleian Library, Oxford)에 소장되어 있다. 다행히 이 필사본은 대부분 17세기에 복사되어, 복사본이 현재 파리의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필사본은 가장 오래된 칠십인역 성서 필사본으로 여겨지기도 하였고, 가장 오래된 구약 성서 필사본일 뿐만 아니라 가장 정확한 필사본이라는 주장[Thomas Hartwell Horne]도 나왔으나 불분명하다.

 

비엔나 창세기, 로사노 복음서, 시노펜시스 복음서는 모두 자색 양피지가 사용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채색 삽화 부분에서도 핵심 주제만을 강조한 묘사와 다양하고 섬세한 색채 표현, 사실적 비례를 무시한 어눌한 인체 묘사, 왜곡되고 평면적인 공간 표현 등은 이후 중세 성서 필사본의 주요한 조형적 특성으로 한동안 이어지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5~6세기에 동로마 지역에서 제작된 비잔틴 필사본은 격랑을 이겨 내고 살아남았으며, 대부분 오랫동안 망각의 세계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후대에, 특히 고전 유물의 가치에 눈뜨기 시작한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새로이 발굴되어 안식처를 갖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리켜 격랑을 이겨 낸 화려한 보화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성모기사, 2019년 2월호, 김재원 마르가리타(그리스도교미술 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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