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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가장 긴 부활 이야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5-11 조회수5,997 추천수1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가장 긴 부활 이야기(Die längste Ostergeschichte)

 

 

부활 제3주일의 복음(다해)

 

복음서에서 가장 길고 상세한 부활 이야기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루카 24,13-36 참조)를 먼저 들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님의 두 제자가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지요. 모든 걸 포기하고 실망에 가득 차서 말입니다. 그런 그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낯선 동반자로 동행하십니다. 그러고는 수난 사건들을 성경에 따라 풀이해주시고, 마침내는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나눌 때 그들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두 제자는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서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해줍니다.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아는 대답입니다. 그 자체로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지요. 하지만 가장 훌륭한 이야기는 대개 한 장소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보다 더 긴 부활 이야기가 따로 있습니다. 넷째 복음서 끝에 나오는 이야기, 곧 요한 복음서 21장 1-23절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밤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시고, 물고기와 빵으로 제자들에게 아침 식사를 차려주십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베드로를 교회의 목자로 세우십니다.

 

전체가 하나로 아름답게 엮어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안에 다양한 전승이 함께 녹아들어 있지요. 하지만 여러 전승 조각들이 서로 스며들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고, 이 이야기에는 예수님 부활 이후의 몇 주간만이 아니라 초기 교회의 체험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 21장 1-25절의 이야기는 말하자면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이미 넷째 복음서에 추가되었고, 이러한 편집상의 확장 역시 신약성경의 일부로서 변경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도망쳤다 다시 모인 제자들

 

요한 복음서의 이 긴 부활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은,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 티베리아스 호수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초기 교회 첫 공동체들의 역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뒤에 대부분의 제자들은 북쪽 지역으로 달아납니다. 갈릴래아 고향 지역으로 도망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거기서 그분은 그들을 다시 모으십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로 도망쳤다는 사실은 마르코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마르 14,27-28)

 

제자들의 갈릴래아 도주 사실은 그밖에도, 안식일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천사가 이르는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7)

 

요한 복음서 21장의 이야기에서, 시몬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아들들과 다른 제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탔다는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성금요일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였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곧 성금요일은 그들에게, 순전히 인간적으로 보면, 대참사였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주요 인물들이 모든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보였지요.

 

 

교회의 본질

 

물론 제자들이 도망친 사건은 요한 복음서 21장의 배경을 이루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대참사에서 어떻게 새것이 생겨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곧 요한 복음서 21장 1-23절은 교회 본질의 한 측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달리 말해, 자신의 기원에 따른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요한 복음서 21장에서 드러나는 교회는 아직은 자신의 출발점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여전히 그 존재가 구체적이지도, 예상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아무튼 교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먼저, 요한 복음서 21장에 따르면, 교회 안에는 실패가 존재합니다.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그렇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배를 타고 나갔지만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낚는 우리의 일이 늘 성공해야만 한다는 강박 속에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요한 복음서 21장은 이어지는 엄청난 성공에 대해 말합니다. 백쉰세 마리나 되는 큰 물고기들이 그물 가득 걸려 있었지요. 하지만 이러한 성공은, 제자들의 능력이 거의 소진된 상태에 있었고, 그러한 성공이 그들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게다가 그러한 성공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익숙했던 방법에 매달리지 않고(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면, 날이 샌다고 나아질 리는 없었지요), 아무 조건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랐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 21,6) 하지만 그분의 이 말씀이 그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그분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아침 안개 속에 희미하게 호숫가에 서 계신 그분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요?

 

요한 복음서는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요한 21,4)고 말합니다. 베드로조차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만이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하고 말할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는 먼저 눈이 열리고 먼저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사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소명을 지닌 이들이지요. 그들은 이 소명에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먼저 봅니다. 다른 이들은 그들을 따르고, 그런 다음 그들 역시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의 분별력을 아무 조건 없이 따릅니다. 그러고는 다른 이들은 하지 않는 일을 행합니다. 곧 그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듭니다. 예수님에게 좀 더 빨리 다가가기 위해서입니다. 이 얼마나 기묘한 역설입니까! 한 제자는 사랑받고, 사랑하고, 알아차립니다. 다른 한 제자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자신이 들은 것을 믿고, 행동합니다. 바로 그렇게 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통찰이 생겨납니다. 사랑에서 오는 믿음의 봄과 물속으로 뛰어드는 용기 있는 행동이 함께 신앙의 인식을 만들어냅니다.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사랑받는 제자와 같은 이들도, 시몬 베드로와 같은 이들도 다 필요합니다. 이제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한 마음이 되어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식탁에 둘러앉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교회 안에서 모두가 아가페(agape), 곧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살았어야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시몬 베드로와 부활하신 예수님 사이의 대화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때문에 그런 그에게 세 번에 걸쳐 회심과 사랑에 대한 물음이 주어집니다. 그의 믿음이 파탄 났던 일이 베드로를 그의 직무에 무능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도 또다시 다음과 같은 진리가 드러납니다. 곧 우리 자신의 능력이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물을 채우고 교회를 떠받치는 게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험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뿐이십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마련하신 아침 식사가 끝나자,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곧 사랑받는 제자가 아니라 바로 베드로에게 교회의 목자 직무가 수여됩니다. 사랑받는 제자는 교회를 위해서도,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교회의 올바른 안목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이 일을 그저 역사적인 사실성만으로, 곧 베드로가 초기 교회에서 수행했던 실제적인 역할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가능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요한 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따르면, 교회 안에는 직무의 은사와 다른 은사들 사이에 생산적인 긴장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긴장이 교회 안에서 제거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알아보는 사랑받는 제자도 있어야 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교회를 이끌어가는 베드로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사랑받는 제자는 베드로가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가도록 합니다(요한 20,3-8 참조). 깊은 상징을 담고 있는 요한 복음서 21장이 다만 역사적인 베드로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베드로의 직무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막 태어나는 교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태어남 속에는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교회의 본질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 21장은 복음서에서 가장 긴 부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모든 부활 이야기의 가장 긴 속편, 바로 교회의 역사가 계속 일관되게 이어집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이 칼럼은 저명한 성서신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보내오는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9년 5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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