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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행복한 비유 읽기: 되찾은 아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14 조회수6,884 추천수1

[전원 신부의 행복한 비유 읽기] 되찾은 아들


자비와 사랑의 아버지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11-32)

 

예수님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복음의 전반을 대변한다고 할 정도로 함의가 풍부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비유입니다. 그래서 음악과 미술,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무신론을 표방하는 철학자 니체마저도 이 비유를 언급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이 비유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랑, 분노, 질투, 욕망, 이기심, 반목, 자유 등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심리 상태를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삶 속의 이런 모든 문제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사랑 안에 녹아드는 감동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아버지와 그의 두 아들이 주인공인데 이 이야기는 작은아들이 아버지께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하여 먼 고장으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 살아생전에 아들이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큰 불효에 해당되는데 그것도 모자라 받은 전 재산을 방탕한 생활로 모두 탕진하고 맙니다. 일반적으로 맏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받을 상속 재산이 3분의 2라고 보면(신명 21,17 참조) 작은아들은 아버지 재산의 3분의 1을 탕진한 셈이 됩니다. 더구나 그는 곤궁한 나머지 유다인에게는 부정한 짐승인 돼지 치는 일까지 하면서, 돼지가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울 수 없는 아주 비참하고 치욕적인 신세로 추락합니다. 그는 재산만 탕진한 것이 아니라 한 인격으로서의 기본 품위마저 완전히 잃게 됩니다.

 

한편으로 작은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길목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합니다. 그래서 눈치를 살피며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발견하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 나가 그를 맞이합니다. 여기에서 ‘가엾은 마음’은 희랍어에서 ‘에스프락츠니스테’(έσπλαγχνίσθη: esplagchnisthe) 즉 ‘연민으로 가득 찬’ 아버지의 사랑을 말합니다.1)

 

작은아들로부터 어떤 참회의 말도 다 들을 필요 없이 아버지는 그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줍니다. 여기에서 좋은 옷과 반지는 아버지 아들로서의 권리와 신분을 상징하고, 신발은 맨발로 사는 노예나 고용인이 아닌 자유로운 신분임을 표현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작은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마침내 그 품위가 하나도 손상되지 않은 아버지 아들임을 선언합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이제 비유의 시선은 큰아들로 옮겨집니다. 큰아들은 방탕한 동생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아버지에게 분노를 드러냅니다. 큰아들의 생각으로는 ‘불효자에 대한 규정(신명 21,18-21)’에 따라 작은아들을 원로들에게 데리고 가서 “이 우리 아들은 …방탕아이고 술꾼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마땅해 보입니다. 큰아들에게 있어서 몹쓸 불효자이고 가산을 탕진한 동생은 그의 표현처럼 더 이상 ‘나의 동생’이 아니라 ‘아버지의 저 아들’(30절)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완고한 큰아들을 타이르며 동생이 돌아와도 맏아들로서 그의 권리가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음을 다시 말해줍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비유 속의 두 아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작은아들이 ‘이기적’(self-centeredness)이라면 큰아들은 ‘독선적’(self-righteousness)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이런 모습에 견주어 자유로울 수 없어 보입니다. 비록 우리가 작은아들처럼 쾌락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며 방탕하게 살지 않았다고 강변해도, 일신의 성공과 출세만을 추구하고, 온갖 탐욕과 과시욕에 빠져 산다면, 그리고 자신의 이익과 감각의 즐거움만 좇아 삶의 에너지를 소진시키며 산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작은아들을 닮아 있습니다. 반대로 설령 모든 생활에 성실하고 책임성 강한 사람이라 해도, 내면에 질투와 분노, 불평과 원망이 지배하고 독선과 자만, 인색함이 교묘하게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의 모습은 큰아들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비유는 일생 동안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내면을 바라보게 하면서 바로 우리가 이러한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 속에 살고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곧 이 비유의 참된 주인공은 ‘자비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의 그림,‘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은 예수님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 속에 담긴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의 깊은 의미를 하나의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이 그림의 작가 렘브란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젊은 시절 성공한 화가였고, 명문가의 딸과 결혼하여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이 넷 중 셋을 잃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유일한 희망이던 스물일곱 살의 남은 아들마저 잃게 됩니다. 만년에는 빚에 쪼들리는 가난한 삶을 살다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탕자의 귀환’은 바로 렘브란트가 63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기 전에 그린 그림입니다.

 

헨리 나웬(Henri J.M. Nouwen) 신부는 렘브란트의 이 ‘탕자의 귀환’이라는 그림에 매료되어 똑같은 제목의 『탕자의 귀환』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지요. 나웬 신부는 렘브란트의 이 그림 속에서 화가의 굴곡진 생애의 특징들을 발견하며 그의 그림을 설명합니다. 한때 그렇게도 자신만만하고 숭배를 받던 예술가였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윤락가에 서 있는 젊고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자신을 그렸던 렘브란트가, 만년에 이르러 모든 것을 잃게 되면서 그동안 애쓰며 살아왔던 모든 영광이 헛되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자각하고, 누더기가 된 몸으로 아버지 품에 안긴 자화상이 바로 ‘탕자의 귀환’이라는 것입니다. 그림 속에서 ‘사랑의 아버지’는 고단한 삶을 마감하고 돌아온 탕자를 자비와 용서 그리고 따뜻한 위로의 손길로 보듬어주십니다.2)

 

‘탕자의 귀환’은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여행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지상에서의 삶이 다하면 먼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온갖 욕망과 이기심, 질투, 분노, 경쟁심, 지배욕 등 지치도록 헛된 영광을 좇아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의 인생이 다해야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아버지 집을 멀리 떠난 탕자일지도 모릅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영혼이 되는 것, 그 공허와 절망,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모든 것을 잃고 누더기가 된 탕자라도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낯부끄러운 청을 드리며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더욱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우리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그 자체로 멀리서부터 먼저 달려와 껴안고 입을 맞추어주십니다. 내가 얼마나 독선적이고 완고한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살았는지 고백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베풀어주시며 당신 자녀로서의 품위를 되돌려주십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삶과 죽음을 묵상하는 위령 성월에 우리가 살아 있을 때도, 죽음 후에도 이런 따뜻한 사랑의 하느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음을 전합니다.

 

1) Michael J. Cantley, 『The Enchantment of the Parables』, (St. Pauls 2010), p18 참조.

2) Henri J.M. Nouwen,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A Story of Homecoming』, (Doubleday N.Y,1994), p29-33 참조.

 

전원 -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영성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도봉산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저서로 『말씀으로 아침을 열다 1ㆍ2』 『그래, 사는 거다!』가 있다.

 

[생활성서, 2019년 11월호, 전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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