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묻고답하기

제목 성모 신심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2000-05-21 조회수3,275 추천수9 신고

 

안젤로입니다.

 

 

 

 아래 글 가운데 성모 신심에 대한 의구심 내지는 의문점을 제기한 글들

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친절하고도 자상한 답변을 여

러분들과 함께 저도 잘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신학을 정식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신학적인 측면에서 마리아

에 대한 신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심, 즉 그리스도론의 연장선상

에서 마리아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해서 존경심을 갖는 것이 아드님께 대한 신앙심을 감소시킬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오류 내지는 유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미 아래 제가 올린 글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같은 그리스도교 형

제인 개신교가 극심한 분열상과 아울러 사회적으로 타락 현상을 보여주

고 있는 것은 저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인 그리스도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다고 주장하며

성모 마리아를 백안시 해왔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지각있는 개신

교 측의 인사들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자신들이 신봉한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공허해진 이유가 바로 성모님

께 대한 신심을 파괴했었던 것이 그 원인이었음을 깨닫고 있는 성공회

고교회파와 루터파 일각에서는 가톨릭의 성모 신심을 본받아야만 한다고

까지 역설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는 미국인 루터파 신자인 분이 묵주 기도를 바치고 있다는 기

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사에서 그분은 루르드 성지를 순례하고 나

서는 성모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만, 우리 가톨릭 신자가 자신

의 신앙의 근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비판의 자세를 가지려고 하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깨어있는 신앙인, 지각있는 신앙

인, 분별있는 신앙인은 맹목적인 믿음으로 이성과 논리적 지성을 희생시

켜 비신앙인에게 웃음거리로밖에 되지 않을 어리석음을 범함으로써 자신

의 창조주를 욕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모 신심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근거가 왜 성서에 나와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는 우리가 단정짓기 힘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이

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신약 성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에 대해

전체 행적을 서술한 일대기가 아니라는 점, 이것은 요한복음의 말미에

사도 요한이 이 밖에도 많은 일들을 그리스도가 행했지만 이것을 모두

기록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책으로도 기록할 수 없으리라고 했던 점과

마지막으로 신약 성서를 기록한 요한 사도가 서기 100년 경에 요한 묵시

록을 완성했다는 점, 그리고 신약 성서가 한창 쓰여지던 시기에 성모님

은 사도 요한과 함께 사시면서 교회 안의 공동체에서 신자들과 생활을

같이 하셨던 분이라는 점, 그리고 신약 성서가 쓰여지던 시기에는 구교

였던 유다교와 새로 생겨난 신교였던 그리스도교가 확연히 구별되기 위

해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듭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서 전반을 통틀어 일관되게 나타나는 흐름입니다.  

 

 

 그 와중에 살아계신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강조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

을지 한번 제가 여러 신자분들께 반문하고자 합니다. 그 당시에 다신교를

숭배하던 로마 제국 내에서 물론 여신을 숭배하던 풍조가 만연했었던 그

당시에 그리스도교가 배척하는 이교 숭상에 대해 신자들 사이는 물론이고

외부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소한 오해가 끝내 어떤 결말을 빚어내는지는 여러 말 안 해도 잘 아시

리라 믿습니다.

 

 

 

 

 성서를 하느님이 산 위에서 신령스럽게도 던져 주신 신비의 보감(?) 정

도로 인식하는 개신교의 악폐가 가톨릭 신자에까지 악영향을 주고 있음

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만,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고

인간이었던 성서 기자들이 자신들이 처한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환경의

영향 아래 서술한 인간적인 기록임에도 또한 틀림없습니다.

 

 

 이것에 대해 과학적인 분석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성서 고등비평을 가

했던 개신교의 지리 멸렬함을 보면서 과연 신앙의 근거인 성서를 도대체

어디까지 해부하려고 하는지 참으로 어이가 없을 따름입니다.

 

 

 가장 최근의 갈릴레이 사건으로부터 고대 로마의 공의회 내지는 콘스탄

티누스 대제의 가톨릭 교회의 공인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우리의 감각을

자극시키고 이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인간적인 실수와 오류들과 대

별되는 그 숱한 난관과 절망적인 상황을 거치면서도 엄연히 이어져 내려

온 신적 교도권의 그르칠 수 없는 가르침의 불변성에 대해서 보통 우리

들은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기란 모든 변화하는 것들 가운데서 가장 찾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다"는 어느 현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것은

엄연히 눈 앞에 존재하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5월은 성모 성월입니다. 그만큼 성모님께 대한 신심은 가톨릭 교회 안

에 확고하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가톨릭 교회 안에 돌아오지 않은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과

비그리스도교 형제들을 아버지의 한 품안에 불러 모으는데 사람들의 마

음을 가장 강하게 이끄시는 분은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뿐이

라는 사실을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확인했다는 글을 읽

은적이 있습니다.  

 

 

 영국에서, 미국에서, 독일에서, 일본에서, 한국에서, 중국에서 세계 어

느 곳에서도 개신교 신자였다가 아니면 무신론자였다가 가톨릭 교회로 돌

아온 이들의 한결같은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머니 성 마리아가 안 계셨더라면 나는 가톨릭 신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나에게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하는

아드님 또한 같이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어머니 없는 집, 어머니 없는 천국, 그것이 그분의 아드님이셨던 아기

예수님이 바라셨던 것일까요? 저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꼬마였던 성 마르첼리노가 수도원의 다락방에서 십자고상의 예수님이 발

현하셨을 때 예수님 품에 안겨서 자신을 낳다가 숨진 어머니가 천국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함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를 보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는 이야기는 하느님이 얼마나 인간의 심성을 잘 알고 계시

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까?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면 그 창조주께서 인간의 심정이 아

무리 무디고 악하더라도 어머니께 향하는 그 마음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

다.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 가르침을 가톨릭 교회는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 이전에 인간이 창조주가 창조한 그 이후로 지니고 있는

본성에 바탕하는 것으로 전혀 모순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이 말하는 성모 신심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성모 신심을

보고서 맹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작은 머리 속에서 끄집어낸

선입견(가톨릭=마리아교, 개신교= 예수교)이라는 선글래스를 쓰고 겉모

양만을 보고 결과를 판단하는 근본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에 불과합니

다.

 

 

 다시 말하지만 5월은 성모님의 달입니다. 지금 이순간도 성모님은 우리

죄인을 위하여 하느님께 우리 대신 빌어주고 계십니다.

 

 

 당신이야말로 우리 죄인이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도움

을 주실 수 있는 든든한 어머니이십니다.

 

 

 가톨릭교 밖에서는 성모님에 대한 이해가 퍽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어머니로 주신 성모님의 위치를 우리는 옳게 알아

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공동 피조물이요 하느님의 똑같은 자녀들이며 그리스

도의 같은 형제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성모 마리아의 자

녀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리아의 자녀로서 딕슨이 읊조렸듯이 다

음과 같이 마리아께 우리의 시를 읊어야 하겠습니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랑스러운 여인이여,

 

 나에게 기도하는 법을 일러주십시오.

 

 하느님도 당신 어린 아들이었으니

 

 그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일러주십시오.

 

 당신은 그를 당신 무릎 위에 사뿐히 앉히셨습니까?

 

 당신은 그에게 노래를 불러주셨습니까?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하듯

 

 당신은 밤에 그의 손을 잡았습니까?

 

 당신은 그에게 세상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까?

 

 오! 그리고 그는 울었습니까?

 

 내가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면

 

 그는 싫어할까요?

 

 그리고 천사의 나래는 소리를 내나요?

 

 내가 낮은 소리로 말해도 그는 들을까요?

 

 그는 지금 나를 아실까요?

 

 말해주십시오, 당신은 그것을 압니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랑스러운 여인이여!

 

 기도하는 법을 일러주십시오.

 

 하느님이 당신의 어린 아들이었으니

 

 당신은 그것을 아실 테지요.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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