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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사도행전 이야기24-25: 사울의 회심(사도 9,1-19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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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14 조회수1,369 추천수1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4) 사울의 회심(사도 9,1-19ㄱ) <1>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하늘에서 번쩍이는 빛을 받아 말에서 떨어지는 사울을 그린 카바라조(1573~1610) 작, 사울의 회심,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안 체라시 경당.

 

 

예루살렘에서 집집이 들어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끌어다가 감옥에 넘기던 사울은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다마스쿠스로 떠납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일이 생기고 그 일은 사울의 회심으로 이어집니다. 사울의 회심 이야기를 두 번으로 나눠 살펴봅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9,1-9)

 

사울은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합니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9,1-2)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을 향한 사울의 반감은 살기를 내뿜을 만큼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넘어서 다마스쿠스까지 박해의 손길을 뻗칩니다. 오늘날 시리아 수도인 다마스쿠스는 2000년 전에도 상업적으로 번창하던 도시였습니다. 당연히 유다인들도 많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후 66년 제1차 유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다마스쿠스에서 희생된 유다인들만 1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유다인들이 다마스쿠스에 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면 다마스쿠스에는 유다인 회당이 한두 곳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대사제에게 다마스쿠스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요청합니다. 다마스쿠스의 회당들을 다니며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 곧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직은 유다교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어떻게 복음이 전해졌는지 사도행전 본문을 통해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이 박해로 흩어지면서 다마스쿠스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많은 유다인이 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새로운 길을 따르는 신자들이 다마스쿠스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찻길로 320㎞ 남짓한 거리입니다. 2000년 전이라면 걸어서도 열흘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지요.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사울의 둘레를 비췄고 사울은 땅에 엎어지고 맙니다. 그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이런 대답이 들려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줄 것이다.”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가 없었고 그래서 멍하게 서 있었다고 사도행전 저자 루카는 전합니다.(9,3-7) 

 

그런데 여기서 잠시 살펴볼 사항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사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세 번에 걸쳐 나옵니다.(9,1-19; 22,4-21; 26,9-18) 9장의 이야기는 저자 루카가 관찰자의 관점에서 전하고 있고, 22장과 26장의 이야기는 모두 사울(바오로) 자신의 입으로 증언하는 것을 루카가 소개하는 형식입니다. 

 

문제는 회심의 결정적 계기가 되는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9장에서는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이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마 강한 빛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2장에서는 동행하던 사람들이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반면 26장에서는 동행하던 사람들이 소리를 들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또 9장과 22장에서는 빛에 의해 엎어진 사람이 사울뿐인 것으로 나오는 반면에 26장에서는 사울과 일행 모두가 빛에 의해 엎어졌다고 나옵니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묘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혹시 루카가 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쓴 사도행전에서 세 이야기가 이렇게 다른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놔두었다는 것은 오히려 루카가 자신이 전해 받은 자료에 충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는데 그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합니다.(9.8-9)

 

빛에 눈이 멀어서 사흘 동안 보지 못했다는 것은 사흘 동안 암흑 속에 지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기간에 사울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습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면 이는 마치 죽은 사람의 처지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은 사흘 동안 죽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알아보기

 

성경에서 빛이 번쩍이며 비추는 것은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가리킵니다. 번개가 번쩍이고(탈출 19,16), 빛이 뿜어 나오고(시편 18,13), 광채가 사방으로 뻗는(에제 1,28) 모습 등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남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타볼산에 올라 기도하시는데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하얗게 변한 것이나(루카 9,29)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고 내려왔을 때 얼굴 살갗이 빛난 것도(탈출 34,29)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하고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는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를 보려고 가까이 가다가 “모세야, 모세야” 하는 소리를 들었고(탈출 3,4), 야곱도 브에르 세바에서 환시 중에 “야곱아, 야곱아”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창세 46,2) 또 사무엘도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주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세 번이나 듣습니다.(1사무 3,1-10) 

 

이렇게 본다면,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겪은 이 체험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바오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하고 코린토 신자들에게 쓸 수 있었습니다.(1코린 15,8)

 

 

생각해봅시다

 

구약의 야곱, 모세, 사무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한 대답과 사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한 대답은 아주 다릅니다. 야곱, 모세, 사무엘은 모두 “예, 여기 있습니다” 또는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자기를 부르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사울은 “주님,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사울은 빛 속에서 자기에게 말을 건네시는 분이 신적인 존재라는 것은 의식했겠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받은 충격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에 눈이 멀어 볼 수 없게 된 것이 어쩌면 사울에게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은 육체적인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내면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 철저한 회심의 길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사도행전 저자의 표현은 사울이 겪은 회심의 길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해줍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7월 14일, 이창훈 위원]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5) 사울의 회심(9,1-19ㄱ) <2>


박해자 사울,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다

 

 

-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문. 이 문을 통해 다마스쿠스로 길이 이어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하지만 이 문은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갔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사흘 동안이나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있을 때에 다마스쿠스에 사는 하나니아스가 환시 중에 주님 말씀을 듣고 사울을 만나러 갑니다. 사울의 회심 두 번째로 이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하나니아스와 사울의 만남(9,10-19ㄱ)

 

다마스쿠스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니아스라는 이름은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 또는 “주님께서는 들어 주신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다른 많은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다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제자”였습니다.(9,10)

 

하나니아스가 환시 중에 주님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입니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9,11-12)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또한 같은 시각에 사울에게도 환시를 보게 해 주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라는 표현이 이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환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하나니아스는 타르수스 사람 사울이라는 말에 난색을 표합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9,13-14)

 

하나니아스의 이 말은 하나니아스를 비롯해 다마스쿠스에 사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왜 다마스쿠스에 와 있는지 잘 알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만큼 사울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두려움 또는 적어도 기피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니아스의 망설임에도 주님께서는 거침없이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이것이 둘째 부분입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9,15-16)

 

이 말씀은 당신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박해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려고 다마스쿠스에 온 장본인을 주님께서는 당신 도구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박해했던 사울이 앞으로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곧 예수님을 위해서 숱한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반전을 주님께서는 하나니아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서 바오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유다의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사울은 다시 보게 됩니다.(9,17-18)

 

하나니아스는 이제 박해자 사울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안수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안수 행위는 직무를 맡기고(6,6), 성령을 베풀며(8,17; 19,6), 병자를 치유하고(28,8), 사명을 수행하라고 파견하는 일(13,3)과 관련됩니다. 하나니아스는 사울에게 안수함으로써 사울을 다시 보게 할 뿐 아니라(치유), 성령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성령의 부여).

 

사울은 다시 보게 되자 일어나서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립니다.(9,19ㄱ) 세례를 받은 다음에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는 것이 보통인데(8,16-17) 사울은 성령과 치유의 은사를 받는 안수를 먼저 받고 나서 세례를 받습니다.

 

 

생각해봅시다

 

하나니아스의 말 중에서 “주님의 성도들”이라는 표현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성도들” 곧 “거룩한 무리들”이란 표현은 “신자”(2,41.44; 4,32; 5,14), “제자”(6,1.2.7; 9,1.10)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새로운 길”(9,2)를 따르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니아스는 자신을 비롯해 주님을 믿는 이들, 곧 주님의 제자들을 “거룩한 이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거룩함’은 하느님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래서 미사 중에 우리는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이라고 노래합니다. 거룩하시도다를 세 번 반복하는 것은 가장 완전한 거룩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함 자체이신 하느님의 거룩함을 모상으로 지닌 거룩한 이들입니다. 이 거룩함은 인간적인 나약함에서 벗어난 철저한 완전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우리가 얼마나 죄가 없느냐, 또 죄를 짓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행하려고 노력하느냐에 있다고 합니다.

 

주님의 제자 하나니아스는 사울이 어떤 인물인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아룁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니아스에게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하나니아스는 지체없이 일어나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박해한 그 사울에게 가서 “사울 형제” 하고 인사합니다. 두렵고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주님의 제자인 하나니아스는 주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성도임을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따를 때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복음을 철저히 박해하던 한 유다인이 복음의 열렬한 증인이 되어 ‘이방인의 사도’로 변하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회심을 넘어서는 위대한 시작입니다. 그 일을 주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나니아스와 사울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그릇’일 따름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7월 21일, 이창훈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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