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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의 첫째 서간 (4) 세상의 자유인, 하느님의 종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344 추천수0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 베드로의 첫째 서간 (4) 세상의 자유인, 하느님의 종

 

 

베드로의 첫째 편지는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젖으로 성장하여 거룩함에 도달하도록 이끌어준다.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지만, 그들이 하느님을 뵙기 전까지 머물며 살아가야 할 곳은 이 세상이다. 2,11-25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순명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분을 모르는 이들이 섞여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을 영위해 가야 할지를 일러 준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2,12)

 

베드로는 세상의 육적인 욕망을 멀리하라고 가르친다(2,11). 그렇다면 세상과는 등지거나 멀어져야 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주님을 향하여 돌아선다는 것은 악습을 뒤로한다는 것이지 세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맞서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병들게 하는 악행들이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이든 후이든 여전히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세상을 등지거나 세상의 가치에 영합하는 일 없이, 신자로서 올바르게 처신할 것을 권고한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2,12). 이 구절에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악인들의 집단이라는 비방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비방을 받았다면,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과는 구별되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의미다. 베드로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선 신자들이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이 아니라 올바른 방식의 삶을 굳건히 살아 내기를 권고한다.

 

 

‘자유인으로서 그리고 하느님의 종으로서’(2,16)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악행에서 돌아섰다고 해서, 세상에 맞서는 불평분자들의 집단으로 오해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세상 안에서 믿지 않는 이들과 공존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제시한다.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되, 자유인으로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2,13.16). 자유와 복종은 상반된 개념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무엇을 위한 복종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로운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법을 따르기 때문에 세속 법의 의무로부터 면제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더는 세상의 그릇된 욕망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서 세상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권위가 휘두르는 강제력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복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인간들을 통해서 돌보시는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연의 모습으로 더욱더 가꾸어 가기 위한 복종이다.

 

자발적 복종은 하인들에게까지도 명해지고 있다. 특히 못된 주인에게도 복종하라고 가르친다(2,18). 이는 매우 당혹스럽다. 악에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악행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가르침은 시대적 상황의 한계 안에서 읽어야 한다. 그 당시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으며, 노예는 주인에게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아닌 노예 주인에게 노예를 주님 안에서 형제처럼 대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회 질서를 전복하려는 불순분자의 선동처럼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노예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생계를 위해 모든 것을 참으며 그 주인을 섬기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이다. 모든 탈출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당시 도망친 노예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현실적인 권고를 한다. 성실한 자세로 주인을 섬긴다면 주인의 신임을 얻을 것이고, 이러한 인식들이 축적되면 결국 그리스도를 섬기는 노예 전체의 평판이 높아져 그들도 존중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노예로서 견뎌 내야 하는 시간은 가혹하다. 그 고난의 시간을 베드로는 수난하신 주님과 함께하라고 권고한다. 이는 불의를 묵인하거나 불의에 협조하는 것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정의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불의에 저항해야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가 지금 당장 이루어지거나 이 세상의 불의가 단번에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를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기나긴 과정 중에 있다. 이 기나긴 불의의 터널을 견디며 뚫고 나올 수 있게 하는 힘은 비폭력적인 저항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에 결합함으로써 얻게 된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2,20)

 

선을 행하는데도 고난이 닥칠 때 그리스도 신자들은 당황할 수 있다. 올바른 삶이 모든 이의 환호를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는 그 자체가 악인들을 향한 공격이며, 그렇기에 악인들은 의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수긍이 가는 논리지만, 막상 내게 닥치면 여전히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베드로의 편지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불의는 항상 강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은 연약해 보이기만 하는 선이다. 그 옛날 그리도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의 공동체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와 동 대학교 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1월호(통권 488호), 강은희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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