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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사도행전 이야기54: 예루살렘으로 여행(사도 21,1-16)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09 조회수9,181 추천수0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54) 예루살렘으로 여행(사도 21,1-16)


제자들 만류에도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떠나다

 

 

- 카이사리아에 도착한 바오로는 예언자 하가보스의 예언을 듣고 예루살렘행을 만류하는 사람들의 권고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사진은 카이사리아 해변에 있는 옛 도시 유적.

 

 

에페소 교회 원로들과 작별 인사를 한 바오로는 일행과 함께 밀레토스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 여정을 따라가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페니키아 땅 티로에서 만난 제자들

 

밀레토스에서 에페소 교회 원로들과 작별한 후 바오로 일행은 배를 타고 곧장 코스로 갔다가, 이튿날 로도스를 거쳐 다시 파타라로 갑니다. 거기에서 페니키아로 건너가는 배를 얻어 타고는 키프로스 섬을 왼쪽으로 두고 항해를 계속해 시리아 페니키아 땅 티로에 도착합니다. 배가 거기에서 짐을 내리기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21,1-3)

 

코스와 로도스는 모두 오늘날 터키 남서쪽 에게 해에 있는 섬들입니다. 이 섬들은 오늘날 지리적으로 터키와 가깝지만, 그리스 영토입니다. 소아시아의 남부 리키아 지방에 있는 파타라는 오늘날은 폐허가 됐지만, 당시는 큰 항구도시였습니다. 산타클로스로 알려진 성 니콜라오(270?~341) 주교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큰 항구도시인 만큼 지중해를 건너서 페니키아 지방까지 가는 큰 배도 있었습니다. 바오로 일행이 로도스에서 바로 페니키아로 건너가지 않고 파타라로 간 이유도 페니키아로 가는 큰 배편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오로 일행은 이 배를 타고 키프로스 섬 남쪽 바다를 거쳐 시리아 페니키아 땅 티로에 도착합니다. 바오로는 2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처럼 카이사리아까지 계속 가고 싶었을지 모릅니다.(18,21-22 참조) 하지만 배가 티로에서 짐을 내리기로 한 것으로 보아 그 배는 거기가 최종 목적지였던 것 같습니다.

 

티로에서 내린 바오로 일행은 제자들을 찾아내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 머무릅니다.(21,4ㄱ) 티로에서 일주일 머물기로 한 것은 목적지인 예루살렘 근처로 가는 배편을 기다리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티로는 이방인 지역이었지만 이미 예수님의 공생활 때부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져 그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오기도 했습니다.(마태 3,8; 루카 6,17)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신 적도 있고(마태 15,21), 그 지방에서 한 여인의 더러운 영에 들린 딸을 고쳐 주시기도 했습니다.(마르 7,24-30; 마태 15,21-28) 이로 미루어 예수님의 부활 후 사도들이 복음 선포 활동을 시작하면서 티로에도 제자들, 곧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바오로 일행은 다음 배편을 기다리는 동안 이들을 찾아서 함께 지낸 것입니다.

 

티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 바오로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거듭 간청합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기일이 차자, 티로를 떠나 다시 여행길에 오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부인들과 아이들까지 함께 나와 도시 밖까지 배웅합니다. 바닷가에 이르자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집니다.(21,5-6) 부인들과 아이들까지 나와 배웅했다는 것은 이 이별이 심상치 않음을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복음 선포자 필리포스 집에서 머무르다

 

바오로 일행이 탄 배는 페니키아 지방 남쪽의 항구도시 프톨레마이스에 다다르고, 일행은 배에서 내려 그곳 형제들과 하루를 지냅니다. 이튿날 육로를 통해 카이사리아에 도착한 바오로 일행은 ‘복음 선포자 필리포스’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머무릅니다. 그에게는 예언의 능력을 가진 처녀 딸이 넷 있었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덧붙입니다.(21,7-9)

 

필리포스는 예루살렘의 초기 공동체에서 식량 배급 문제로 불화가 생기자 사도들이 자신들을 도와 식탁 봉사를 책임질 봉사자 일곱을 뽑았을 때 그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6,1-6) 필립보 사도와 구별하기 위해 ‘복음 선포자 필리포스’라고 불리는 그는 또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아스돗과 카이사리아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했지요.(8,26-40) 이로 미루어 카이사리아의 제자 공동체는 필리포스를 중심으로 형성됐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일행이 필리포스의 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하가보스라는 예언자가 유다에서 내려옵니다. 그는 바오로 일행에게 와서 바오로의 허리띠로 자기 손과 발을 묶고는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이 이 허리띠의 임자를 이렇게 결박하여 다른 민족들에게 넘길 것”이라고 예언합니다.(21,10-11)

 

하가보스는 안티오키아 교회에 내려와 온 세상에 큰 기근이 들 것을 예언한 예루살렘 출신의 예언자였습니다. 당시 안티오키아 교회는 하가보스의 말을 듣고 유다 형제들에게 구호 헌금을 보내기로 하고 바르나바와 바오로(그때 이름은 사울) 편에 예루살렘으로 보낸 바 있습니다.(11,27-30) 그렇다면 카이사리아로 내려와서 바오로를 두고 한 하가보스의 예언은 듣는 사람들에게 작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카이사리아의 신자들뿐 아니라 바오로의 동행들까지 함께 나서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합니다. 하지만 바오로가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될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다”며 뜻을 굽히지 않자 사람들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고는 단념합니다.

 

그리하여 며칠 후 바오로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출발합니다. 카이사리아의 제자 몇 사람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오래전에 제자가 된’, 말하자면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부터 신자가 된 키프로프 태생 므나손의 집에 바오로 일행을 머무르게 합니다.(21,12-16)

 

 

생각해봅시다

 

밀레토스를 떠나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는 만류를 두 차례나 받습니다. 그럼에도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바오로는 티로의 제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성령의 지시를 거부한 것일까요? 성령의 지시를 받아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바오로에게 간청한 티로의 제자들 말은 밀레토스에서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20,22)고 한 바오로 자신의 말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 바오로는 자기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을까요? 우선, 티로의 제자들이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만류한 것을 거부한 까닭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바오로는 밀레토스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는 이유가 “성령에 사로잡혀서”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지만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주셨다”(20,22-23)고 말합니다.

 

티로의 제자들이 바오로를 만류한 것은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환난과 고초를 겪을 것임을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하가보스 예언자가 성령을 통해 한 예언에서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성령을 통해서뿐 아니라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예루살렘에서 시련과 고초를 겪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예루살렘 여행이 단순히 인간적인 계획이나 생각이 아니라 성령께 사로잡혀 하는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티로에서 제자들이 또 카이사리아에서 자신의 동행과 그곳 신자들이 합세해서 예루살렘행을 만류한 것은 바오로가 겪을 고초를 염려하는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조언도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뜻을 헤아리고 이행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바오로는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3월 8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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