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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행복한 비유 읽기: 부자와 라자로 - 영화 기생충에 부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11 조회수6,925 추천수0

[전원 신부의 행복한 비유 읽기] 부자와 라자로


영화 ‘기생충’에 부쳐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루카 16,19-31)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저는 오락영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라 하더라도 끝물이 되어야 영화관을 찾게 됩니다. 영화 내용에 대한 기대보다도 왜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오히려 우리 사회 대중들의 심리에 관심이 있어서 챙겨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기생충’을 일찍부터 챙겨본 이유는 이 영화의 무엇이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까지 받을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 전문가들이 말하는 완성도보다 ‘기생충’이라는 독특한 제목을 통하여 영화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우리 사회의 단면이 무엇인지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영화는 큰 상을 받은 영화답게 치밀하게 계획되고 조립된, 그야말로 모든 이야기와 장면들이 온통 은유(메타포metaphor)로 가득 차 있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소품 하나, 대사 한마디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복잡하거나 출연진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두 가족, 즉 상류사회 가정을 대표하는 저택에 사는 IT 기업의 CEO 박 사장 가족과 피자박스를 접으며 반지하방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백수 김기택(송강호) 가족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부와 가난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상투적으로 부자를 혐오하거나 가난한 이를 미화하는 그런 내용과 다릅니다. 오히려 영화 속 박 사장은 IT 기업의 CEO라는 직책이 말해주듯,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예의 바르고 가정적인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그의 아내 연교(조여정)는 세상물정 모르고 사람들의 거짓말에도 잘 속을 정도로 단순하고 순진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한편 기택의 가족은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살아가는 가정이 아니라 거짓과 사기를 치며 세상을 살아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백수 가족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기생충’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반지하방에 살아가는 가족이 상류사회 가정에 기생충처럼 감염해 들어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묘사하고 있어 사실 영화 내내 관객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영화의 줄거리에서 보듯, 기택의 아들 기우는 대학생으로 학력을 위조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박 사장 딸의 고액 과외선생으로 취업을 합니다. 이때부터 기우 가족은 한통속이 되어 남의 말을 잘 믿는 박 사장의 아내를 교묘하게 속여 기우 동생 기정(박소담)은 미술 과외선생으로, 아버지 기택은 박 사장의 운전기사로, 마침내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가정부마저 몰아내고 엄마까지 가정부로 들어오게 합니다. 박 사장 집에 취직해 들어오게 된 기택 일가족은 어느 날 박 사장 가족이 모두 캠프를 떠나자 그 집에서 먹고 마시며 상류사회의 삶을 향유합니다.

 

이때 전 가정부가 그 집에 다시 나타나는데 이제 영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그 저택에는 지하 깊숙한 곳에 부자들이 전쟁이나 채권자들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비밀 벙커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지하 벙커 안에 전 가정부의 남편이 숨어 있었는데, 전 가정부 부부가 일찍이 그곳에서 소위 상류사회에 ‘기생’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된 두 가족의 만남은 마치 기생충이 요동쳐서 생기는 복통처럼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터로 바뀝니다. 결국 두 가족의 전쟁은 기택의 딸도, 전 가정부 부부도 희생될 뿐 아니라 무고한 박 사장도 기택의 칼에 찔려 죽게 되면서 사건이 끝이 납니다. 이제 그 저택의 주인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독일인으로 바뀌고, 지하 벙커의 주인도 바뀌어서 살인 수배를 받는 기택이 그곳을 차지하여 밤이면 서양 음식을 훔쳐 먹으며 사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부자가 입은 자주색 옷이란 겉옷을 말하고 아마포는 속옷을 말하는데 둘 다 값비싼 천으로 만든 옷입니다. 우리 시대로 말하면 겉옷은 물론이고 속옷까지도 명품으로 입고 다닐 만큼 사치스런 부자였습니다. 어쩌면 이 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 있는 거지 라자로를 보고 학대하거나 쫓아내는 일도 없는 것으로 봐서 그저 자신의 생활에만 몰두하며 사는 영화 속의 박 사장 가족 같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호화로운 집에 살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상류사회의 사교모임에 참석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아주 예의 바른 사람일 수 있습니다. 가난이 무엇인지도 가난의 냄새가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부모로부터 대물림받은 부로 그들만의 세상을 향유하며 살면서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 안정되게 살면 그만인 사람입니다.

 

반면 라자로는 영화 속의 기택 가족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헐벗은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기택 가족은 가난하지만 사기라도 쳐서 상류사회에 기생하며 먹고 살 꾀라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 비유 속의 라자로는 부자가 버리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살아야 하고, 심지어 개들까지 와서 그의 몸에 종기를 핥아도 내칠 힘마저 없을 정도의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의 눈에 라자로는 상종할 가치가 없는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비유는 흑백 필름을 인화할 때 흑이 백이 되고 백이 흑이 되는 것처럼 완전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 둘은 죽은 후,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있고 부자는 불길 속에서 혀를 식혀줄 한 방울 물이라도 내려주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 있어서 부자는 희망마저 완전히 잃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구렁을 만든 이는 라자로가 아니라 바로 부자일 것입니다. 그 건너갈 수 없는 깊고 넓은 구렁은 현세에서 부자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라자로와의 심리적 거리였을 것입니다.

 

영화 기생충은 부자들의 눈으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마치 기생충처럼 파고들어 상류사회의 평화로운 가정을 파멸시키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물론 영화에 비친 기택 가족의 행동이 어떤 이유로도 정당성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속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시선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시대로 보면 서민들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연민을 드러내십니다. 설령 그들이 세리나 창녀로 살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그들이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2,31 참조). 오히려 당시 종교나 사회의 기득권자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혹독한 질타의 대상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은 가난한 이들이 그들의 생존을 위해 서로 아귀다툼하며 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저변으로 몰아내고 그들과 경계를 짓고 번드레한 예의를 차리며 살아가는 정치, 사회, 종교의 기득권자들이 영적으로 보면 더 깊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기생충’은 부자를 두둔하는 것도 가난한 자를 비하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만의 상류사회에 금을 그어놓고 가난한 이들은 ‘공생’할 수 없고 오로지 ‘기생’하면서나 그들 세상에 가 닿을 수 있는 씁쓸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라자로’ 비유는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를 단절하는 우리 내면의 구렁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영화 ‘기생충’이 세계인이 공감하는 세상의 현실을 보여주었다면, 부자와 라자로는 영화가 보여준 현실 세계에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그 너머의 세계가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진정 구원된 세상이 무엇이며 구원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원 -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영성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도봉산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저서로 『말씀으로 아침을 열다 1ㆍ2』 『그래, 사는 거다!』가 있다.

 

[생활성서, 2019년 7월호, 전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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