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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태오 복음서: 의로움의 길을 걸으시오 - 의로움을 내 것으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8,241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의로움의 길을 걸으시오 : 의로움을 내 것으로

 

 

어느 판사가 한 사건의 판결을 맡았다고 해 보자. 재벌 2세가 재판정에 섰는데, 아들을 좋은 학군에 보내려 위장전입을 했고 주식을 불법으로 증여했으며 군대에 안 보내려고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 법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니 재벌 2세도 벌을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상황이 묘해졌다. 판사 자신도 위장전입을 한 경력이 있고 조상이 물려준 땅을 아들 이름으로 슬쩍 바꾸었으며 군대를 면제받기 위해 병을 만든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판사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다루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다른 가능성을 상정해 보자. 여기 모든 죄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재판관이 있다. 그는 세상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 불철주야 노심초사하고, 없는 사람 편에 서서 과부와 고아를 귀하게 여기며, 아들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기는커녕 오히려 아들을 희생시켜 온 누리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한다. 글자 그대로 ‘의로운 재판관’인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의로움’(체데크)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는 속성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인간에게 ‘의인’이라는 표현을 적용할 때도 일반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세부적으로, 우선 법적 차원에서 ‘죄가 없는 사람’을 뜻하는데(창세 20,4; 신명 25,1; 1열왕 10,9; 이사 5,23 참조), 율법에 보면 “거짓 고소를 멀리해야 한다.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탈출 23,7)고 한다. 다음으로 의인은 ‘언제나 의를 행하고 흠 없는 사람’을 뜻한다(2사무 4,11; 1열왕 2,32; 욥 12,4; 17,9 참조). 아브라함은 소돔의 파멸을 앞두고 하느님께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창세 18,23)라며 자비를 구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모든 경우는 하느님을 완벽하게 의로운 재판관으로 인식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는 인간과 완전히 구별되는 분이 하느님이시다.

 

마태오 복음에도 ‘의로움’(히브리어 ‘체데크’의 헬라어 번역 ‘디카이오쉬네’)이라는 명사가 모두 일곱 번 나온다(3,15; 5,6.10.20; 6,1.33; 21,32). 이들 중 다섯 번이 하느님 나라의 윤리를 다루는 산상 설교에 나온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 중 눈에 띄는 구절을 하나 선택해 보자.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

 

마태오는 의로움이 구약성경으로부터 내려오는 개념이며 하느님의 속성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다교 지도자들이 의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알고 있었다. 법적 차원에서 의인이란 원래 ‘법 규정을 잘 지키는 사람’이나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의인’이란 용어를 법적인 의미보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했고, 회당에서는 의인을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자칭 의인들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들은 의로움의 내적 자질을 외면한 채 오직 외적 성과에만 매달렸다. 그들의 행동은 선행으로 보이게끔 잘 포장되어 있지만 진정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했다(23,23 참조). 그들의 말은 청산유수라 누구라도 현혹될 만하지만 언제나 말에서 그치고 말았다(23,3 참조). 말과 행동, 이 모든 게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인 하느님의 의로움은 만족시키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움은 당연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 ‘의인’이란 본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을 뜻하지 않는가. 이제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23,23.25.27…) 하시는 예수님의 호통에 수긍이 가고,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9,1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된다.

 

마태오가 의로움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모든 의로움을 이룸’(3,15), ‘의로움에 굶주린 이’(5,6),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5,10), ‘너희의 의로움’(5,20), ‘너희의 의로움을 가장하지 마라’(6,1), ‘하느님의 의로움’(6,33), ‘의로움의 길로’(21,32) 등, 대부분 인간이 가져야 할 의로움을 가리킨다. 우리의 의로움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 의로움을 구현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의 의화(義化) 가르침과 확연히 구분된다.

 

 

적극적으로 걸어가야 할 의로움의 길

 

바오로 역시 마태오처럼 하느님 한 분만 의롭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공유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의 세력 아래 놓여 있으니, 죄는 인간에게 숙명이기 때문이다(로마 5,12-19). 따라서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세력으로 옮아가려면 무엇인가 획기적인 사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써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보았다. 하느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진 속량 사건인 것이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구원이 가능하고, 여기에는 유다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다(로마 3,21-26).

 

마태 5,20은 대립명제의 서문 역할을 하고 그 결론은 5,48에 나온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려는 하느님의 완전함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다. 모름지기 인간은 하느님의 완전함을 좇아 우리의 말과 행동을 다스려야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수동적인 선언을 받기보다는(義化) 하느님이 완전한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게 되어야 하니, 적극적으로 ‘의로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재벌 2세를 봐주었던 판사가 죽어 하느님 앞에 설 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물으실 것이다. “자네 그때 왜 공정한 판단을 하지 않았나? 몰라서 그랬다는 말은 아예 하지 말게.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내 눈은 못 속인다네.” 그 판사님, 적당한 변명거리를 서둘러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7월호(통권 484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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