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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신약 성경 다시 읽기: 함께 사는 세상 - 티토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19 조회수6,282 추천수0

[신약 성경 다시 읽기] 함께 사는 세상 - 티토서

 

 

바오로의 편지들을 읽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 마지막 편지를 읽을 참입니다. 티토서입니다. 사목서간에 포함되는 티토서는 바오로가 61년경 로마로 수인이 되어 떠나는 여정 속에 들린 크레타 섬을 배경으로 합니다.(사도 27,7-14) 크레타섬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직 제대로 된 공동체의 꼴을 갖추지 못했고(1,5) 티토가 해야 할 일 역시 공동체를 제대로 건설하는 데 있었습니다. 티토는 공동체를 이끌고 관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티토는 코린토 교회가 바오로와 갈등을 일으키며 힘들어 했을 때 훌륭한 중개적 역할을 수행했으며(2코린 7,7.13.15)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을 직접 주도하기도 했습니다.(2코린 8,6;12,18) 바오로에게 ‘착실한 아들’(티토 1,4;1 티모 1,2)이었던 티토는 이제 갓 시작한 크레타섬의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 할 참입니다.

 

먼저 티토는 원로들을 임명해야 했습니다.(1,5)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가정의 아버지로 모범적이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집을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집안을 관리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은 초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이 기도 합니다.(1티모 3,12-15) 원로들 중 대표격인 감독 역시 교회 공동체 안에서 흠잡을 데 없어야 합니다.(1,7) 무엇보다 감독은 선을 사랑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1,8) 그리스말로 ‘필라가토스’로, 그리스-로마 문화권 안에서 존경할 만한 사회적 인물을 가리킬 때 사용된 표현입니다.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원로들과 그 원로들의 대표인 감독은 두루두루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원로와 감독의 훌륭한 자세는 두 가지 지향점을 지닙니다. 하나는 건전한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상을 지닌 반대자를 꾸짖기 위함입니다.(1,9) 이 두 지향점은 실은 하나로 귀결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티토서는 건전한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다른 사상을 지닌 이들을 가리켜 ‘유다인들의 신화’(1,14)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고, 그러한 이들은 인간들의 계명에만 정신을 팔고 있어 하느님을 거부한다고 질타합니다.(1,16) 티모테오 1서에도 나타나듯이 반대자들은 대개 잘 살기 위해 스스로 엄격하고 통제하는 이들입니다.(1티모 4,3)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조화와 평화를 이루어가는 게 복음적 가치이고, 그것을 위해 원로들과 감독은 세상으로부터 훌륭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도록 요구받는 것이지요. 그러나 엄격주의에 빠져 있는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유폐되어 저만이 옳고 깨끗하다고 외치는 이들입니다. 로마서 4장 14절의 말씀은 이런 엄격주의자들의 모순을 잘 짚어냅니다. “나는 주 예수님 안에서 알고 있고 또 확신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 세상을 단죄와 심판의 날카로운 눈으로만 바라보고 행여 때가 묻을까, 흠이 생길까 노심초사하는 이에게 복음의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평화의 가치는 요원한 것이 됩니다. 세상을 단죄한 채 저만 하느님 앞에 옳은 길을 간다는 이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행동으로 그분을 부정합니다. 아니, 하느님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이들이 됩니다.

 

믿는 이들은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2,1) 건전한 가르침은 그리 특별한 게 아닙니다. 가정에서 신중하고 기품있게 행동하는 것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권위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 본디 제 모습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제 삶의 충실성이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티토서는 가르칩니다.(2,11-14). 어떤 삶이 더 낫고 어떤 삶이 더 신앙적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게 아니라 지금 우리 각자의 고유한 삶의 자리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건전한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 됩니다.

 

티토서는 마지막에 다시 한번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친교를 강조합니다. “분파를 일으키는 사람에게는 한 번 또 두 번 경고한 다음에 관계를 끊으십시오.”(3,10) 분파를 일으키는 자로 번역된 그리스 말은 ‘하이레티코스’인데 자신만의 선택으로 공동체에서 스스로 갈라지는 이를 가리킵니다. 분파를 일으키는 사람은 스스로 단죄하여 죄를 짓는 자입니다.(3,11) 세상과 조화롭게 살지 못하고 저만 옳다는 이는 다른 이를 심판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에게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가 함께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교회라는 건 어떤 경우에라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형제적 친교의 자리입니다.

 

[월간빛, 2020년 12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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