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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떠남(10,22-39)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5,235 추천수0

[요한 복음서 해설] 떠남(10,22-39)

 

 

교회 안팎이 시끄럽다. 폭로에 폭로로 맞서고 사실과 진실은 서로의 입장에 따라 편집되거나 왜곡된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나 논쟁이 사라진 채, 각자가 속한 진영 논리에 따라 말들은 뒤섞이고 갈라지고 찢어진다.

 

현실적 이슈 대부분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데 소용되고 버려진다. 다들 객관적이라고 하지만 실은 자기의 존재 가치가 현실에서 되새김질 되는 희열을 느끼는 데 열심이다. 부정적으로 들리겠지만, 부정도 긍정도 아닌 우리 삶의 현상, 그 자체다.

 

문제는 삶의 자리다. 어디에 머무느냐가 중요하다. 예수님이 유다인들과 대립적 입장을 보이는 것도 예수님이 머무는 삶의 자리가 ‘파견된 자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일하고 가르치는데, 유다인들은 그런 예수님의 자리에 함께하지 않는다. 삶의 자리가 서로 다른 까닭에 예수님의 말에 유다인들은 객관적일 수 없고, 저들의 존재 가치를 거칠게 드러낼 뿐이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존재 가치를 대변하는 성전 안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적진 깊숙한 곳에 가 있는 셈이다. 때는 성전 봉헌 축제 기간이었다. 흔히 ‘하누카’로 불리는 이 축제는 기원전 165년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형제들의 호위 아래 새롭게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보통 12월경 여드레 동안 지내는 축제다. 셀레오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에서 벗어나 그리스 신상들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하느님께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축제다(1마카 1장, 4장). 과거의 역사를 축제로 더듬는다는 건, 그 역사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리기 위함이다. 성전 봉헌 축제는 하느님의 자리를 되돌려 드리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되새김의 시간과 장소에서 예수님은 유다인들과 자신의 메시아성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물론 새로운 봉헌의 시간과 자리에서 유다인들은 새롭게 메시아로 파견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아니 믿지 못한다(10,25).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위해 세상에 왔고,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일을 두고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한다. 어쩌면 ‘일’의 문제는 부수적이다. 유다인들이 알고 싶은 건, 예수님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10,24). 예수님이 줄곧 보여 준 ‘표징’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말했고, 그 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믿게 되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보면서도 믿지 못했다. 이유인즉,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10,26). ‘양’의 가치는 ‘따름’에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건, 예수님 안에 머물기 위함인데, ‘손’이라는 형상으로 구체화된다(10,28). 예수님의 손안에 머무는 것이 양의 존재 가치다. 그리고 예수님의 손은 아버지의 손과 하나다(10,29). 양, 예수님, 아버지가 ‘손’이라는 형상 안에 일치한다(10,30).

 

믿음이란 그 ‘손’ 안에 들어가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유다인들은 성전을 봉헌했어도 하느님의 ‘손’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건물로 하느님을 찾았고, 건물로 하느님을 잃었으며, 다시 건물로 하느님을 되찾았노라 기념하고 축하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살덩이로 이 세상에 왔다. 건물로서의 하느님에 집중한 유다인들이 알아볼 가능성은 애당초 없었다. 좋은 일을 보아도, 신기한 일을 보아도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닌 살덩이를 가진 인간임이 확실하니까(10,33). 우리야 살덩이를 가진 예수님을 참된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한다고 쉽게 생각하겠지만 그게 실은 쉽지 않다. 우리가 머물기 원하는 ‘손’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내 자식의 입시, 내 남편의 성공, 내 가족의 건강, 내 돈벌이의 안정, 내 안위의 유지, 내 봉사의 인정 등, 내가 어디 한 번이라도 ‘나’를 떠나 그 다른 ‘손’에 가려던 적이 있었는지 물어보면 분명해진다. 유다인들도 양들처럼 목자를 따라 떠나지 않았기에 참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신성모독으로 말이다(레위 24,16). 예수님은 ‘먼저’ 떠나왔고, 그래서 ‘먼저’ 양이 되었고, 먼저 ‘믿는 이’가 된 셈이다. 아버지와 하나라는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떠나왔으나, 그 떠남이 그를 하느님의 외아들, 지독히도 하느님이 사랑하는 소중한 아들로 인지할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다시 한번 떠난다. 유다인들이 좋아하고 숭상하는 율법의 세계로 떠난다. 시편 82,6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은 모든 이의 신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요컨대 믿는 이는 신적인 권위를 지닌다고 하느님 그분이 증명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 예수님이 율법을 인용하는 것은 유다인과 대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유다인이든 그 누구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이라면 신이 되고 신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그 가능성 안에서 예수님은 유다인과 하나 될 또 다른 가능성을 지향한다. 빛이 어둠을 드러내어 빛의 독보적 존재 가치를 뽐내고자 하는 게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다. 빛이 어둠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어둠이 빛을 품어 안길 바라는 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이유다.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인들과 하느님의 자리에서 하나 되길 원하신다.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10,38). ‘일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의 자리에 함께 머무는 것을 증거하는 표징이다. 유다인들이 그 자리에 오고, 안 오고는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다. 안타깝게도 유다인들의 선택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머물지 않으셨고(10,39) 그래서 예수님과 유다인들은 여전히 찢어지고 갈라지며 반목한다.

 

매 순간 우리는 새로운 사건과 소식으로 서로 갈라서거나 화합한다. 사건과 소식은 새로운데 우리의 인식 체계와 그 과정은 대개 낡았거나 진부한 것이다. 세대 차이 나는 어르신들 혹은 젊은이들과의 대화가 그렇고, 세상을 바라보는 진보와 보수의 견해차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되돌아볼 것은 하나다. 나는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머묾이 나를 떠나게 하는가, 아니면 나를 옥죄고 있는가를 되돌아볼 일이다. 예수님은 떠남으로 머물렀다.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해 떠났고, 그것으로 하느님의 자리에서 하느님으로 살아 계신다. 우리가 우리이기 위해, 내가 나이기 위해 난 어디로 떠나 진정한 나를 찾을 것인가. 복음 읽기는 그래서 늘 숙제로 남는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2월호(통권 489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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