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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르코 복음서: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082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르코 복음서]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에 나서자 온 이스라엘이 시끄러워졌다(마르 1,28). 여기저기서 그분에 대한 풍설이 오가기 시작했는데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1,27), “이 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2,7),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2,12),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3,22).

 

이뿐만 아니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22),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4,41),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6,2) 이 정도만 읽어 봐도 충분하다.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이스라엘 전체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분은 누구일까?

 

예수님이 활동했던 당시만 해도 아직 그분의 정체가 오리무중이었다. 예수님의 참 정체 - 즉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 - 를 사람들이 몰랐기에, 각자 자신이 받은 인상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고 그에 따라 실로 많은 이름이 복음에 등장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나자렛 예수’는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이 너무나 흔했기에, 동명의 다른 이들과 구별하기 위해 출신지를 붙인 이름이다. 이외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양하게 불렀다. 예수님의 신기한 기적을 보고서는 ‘놀라운 분’, 예수님의 기적을 마귀의 힘을 빌린 것으로 폄하할 때는 ‘베엘제불이 들린 이’, 율법 해석에 탁월한 모습에는 ‘라삐’, 세례자 요한의 뒤를 잇는 듯한 인상을 받아서는 ‘환생한 요한’, 먹고 마시는 데 거침이 없어 보일 때는 ‘먹보에 술꾼’, 그분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서는 ‘죄인과 세리의 친구’, 종말 심판을 선언한 예언자와 견주는 의미에서 ‘예언자’와 ‘엘리야’, 다윗 시대를 재현하리라는 기대에서 ‘다윗의 후손’과 ‘메시아’ 등.

 

교회 시대로 넘어가면서 그 이름은 더욱 다양해졌다. 하느님의 전권을 물려받은 ‘하느님의 아들’, 여타 인물과 비교 불가능한 오직 하나뿐인 ‘하느님의 외아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 인류의 죄를 없애 주는 ‘어린양’,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 만사형통의 ‘전능자’, 장차 심판자로 재림할 ‘인자(人子)’, 하느님과 동일한 분으로서 ‘말씀’(로고스) 등. 이 중 가장 보편적인 이름이 바로 ‘이에수스 크리스토스’(예수 그리스도)다. 이에수스는 ‘예수(아)’라는 히브리어 이름의 그리스어 음역이고 그리스토스는 ‘메시아’의 번역이니 역사와 신앙을 관통하는 이름인 셈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 이름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다. ‘예수’가 평범한 이름이라면 ‘메시아’는 특별한 이름이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던 그 옛날 다윗 왕처럼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도탄에서 구해 낼 인물과 관련된 호칭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학자들은 이 이름에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두 차원이 들어 있다고 본다. 후대의 시각으로 이름을 분석한 것이다.

 

‘메시아’는 원래 정치적 성격을 지닌 호칭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은 딱히 메시아의 그것이라고만 보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마르코 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려 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르 12,35-37).

 

마르코가 활동했던 1세기 교회는 전통적인 메시아 상象에 다채로운 변화를 부여했다. 이를테면, 고난받는 메시아, 재림할 인자 메시아, 종교적인 메시아 등등이다. 마르코는 예수님을 메시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권위 있는 분으로 설정해 메시아의 원조 격인 다윗도 섬겨 마땅한 분으로서 예수님을 부각했다. 다윗마저 주님으로 섬긴 존재가 어떻게 다윗의 아류가 되느냐는 말이다. 실제로 마르코는 유독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에 집착했다.

 

‘하느님의 아들’은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대표적인 예수님의 정체로서 복음서 전반에 등장한다(1,1; 9,7; 15,39). 예수님은 1,9-11에서 세례를 받고 뭍에 오르면서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된다. 이 호칭에는 부자간의 돈독한 관계 외에 예수님이 아버지의 전권(全權)을 물려받았으며,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아들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예수님이 궁극적 구원자인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원래 구약성경에서 따온 개념으로 하느님과 가까운 이들, 예를 들어 왕이나 사제,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을 통틀어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다(시편 2,7 등등). 그러나 마르코 복음에 사용된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님과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구약성경의 쓰임새와는 매우 다르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임은 오히려 더러운 영들이 잘 알아보았다고 한다(마르 3,11).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훑어보면 사람들은 화려한 이름을 붙이는 데 열성을 다 했던 것 같다. 가능한 한 많은 호칭을 지녀야 위대해진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예를 들어 교황은 ‘로마 교구의 교구장 주교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서방 교회 최고의 사제이며, 총대주교이며, 이탈리아의 수석 대주교이며, 바티칸 시국의 원수(元首)이며, 세계 주교단의 단장이며, 현세 교회를 통괄하는 최고 사목자’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로 교황을 부르는 ‘파파’(Papa)는 ‘아버지’라는 뜻의 papas에서 유래했다. 실제로는 상당히 긴 이름을 가진 분이 교황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호칭은 그저 편하게 부르는 ‘파파’이다.

 

복음서 저자 마르코는 다음과 같은 말로 복음서를 시작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1). 그는 예수님의 모든 업적을 이 ‘간결한’ 문구로 정리했다. 하지만 이 ‘간결함’이 의미하는 생각의 너비와 깊이는 거대하다. 예수님의 정체를 대변하는 이름 ‘하느님의 아들’은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을 넘어 기나긴 교회의 역사를 좇아오면서 빼어난 가치를 만들어 냈다. 마르코의 혜안이 만들어 낸 결과다. 마르코 복음은 잘라 말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6월호(통권 495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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