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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한복음 해설 (1장 1절-51절) >
작성자성경주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14 조회수25,234 추천수1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중앙의 흐흰 망토를 두름)

복음사가 1625-30년경,

야콥 요르단스(Jacob Jordaens, 1593-1678)

캔버스에 유채, 134 x 118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성화 해설>

마태오, 마르코, 루카 그리고 요한(중앙의 흰 망토를 두름)의 복음사가는 중세부터 널리 그려진 주제로, 일반적으로는 각자 복음 기록에 전념하는 성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생기 넘치는 인간미가 느껴지는 표현을 추구한 플랑드르 바로크의 요르단스가 그린 모습은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성스러운 모습이 아닌 친근한 모습이다. 깊게 파인 주름과, 붉게 상기된 얼굴, 희끗희끗한 머리와 잔뜩 인상 쓴 모습은 성인이기 이전에 바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이다. 이들은 놀라운 성령의 힘으로 천상의 메시지를 조심스레 받아 적고 있다(박혜원 소피아). / 자료 : 심재엽파스칼서곡(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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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권. 표징의 책


제1부. 요한복음의 머리말 



 서곡(1,1-18)

 세례자 요한의 증언(1,19-34)

 제자들을 부르시다(1,35-51)

 


제1부 요한복음의 머리말(1장)


1. 서곡(1,1-18)

 

<성서본문>

 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2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8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10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11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분을 맞아 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치기를 "그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사실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다" 라고 하였다.

16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17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18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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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돕는 글>


요한복음의 머리말은 오페라의 서곡처럼 아름다운 도입 찬가로 시작되고 있다. 이 머리말은 요한복음서의 전체 내용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이다. 달리 말하자면 마치 어느 한 오페라의 서곡처럼 앞으로 전개될 요한복음서의 전체 내용을 앞서 감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 머리말은 당시 공동체의 그리스도 찬미가들(예: 필립 2,6-11: 골로 1,15-20: 히브1,2-3)가운데 하나. 곧 로고스(말씀)찬미가를 바탕으로 하여 엮어진 내용이다. 이 찬미가의 원형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지만 1.3-4.9-11.14.16절이 그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찬가는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이 새벽에 동트기 전에 그리스도께 바치던 찬가였다.

머리말은 확실히 시적-운율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주의 깊게 본문을 읽어보면 증인 요한의 파견과 증언(6-8절과 15절)이 전체적인 운율을 방해하면서 삽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로고스로 인해 이루어진 새로운 구원질서(17절)와 계시행위(18절) 및 그에 대한 믿음(7.12-13절)은 요한복음서의 주류를 이루는 내용이다.

서문을 이루고 있는 이 찬미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으로, 그리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하나의 커다란 움직임을 드러내고 있다. 복음이 시작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역 안에 자리하게 된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1절)

이제 점차로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의 한 지점으로 내려간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14절)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 속으로 들여 올려진다.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 품안에.....하느님을 알려주셨다.”(18절)


처음에는 하늘과 하느님께로 향하고, 그 다음은 지상으로 향하며, 다시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성서저자는 히브리식 기법을 사용하여 독자를 인도하고 있다.


또한 이 서문은 다음과 같은 일정한 도식을 이용하여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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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절] 요한복음사가는 복음서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로고스(말씀) 찬미가”에서 온 우주의 밑바탕에 있는 근본적인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한 처음”은 창세기 1장 1절에서도 볼 수 있는 동일한 표현이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창세기 1장1절에서는 창조행위의 시간적인 시작과 전 우주의 시작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간을 초월한 신적인 실재, 곧 영원속의 실재를 뜻하며, 육화한 “말씀”(1,14)의 선재성, 곧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하셨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인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징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말씀”은 단순한 “말”의 의미를 넘어서,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1.14). 따라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예수의 말씀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즉,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동일시됨으로써 새로운 개념으로 탈바꿈된 셈이다. 이 새로운 개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전 인격이 시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리스도론적인 칭호라고 말할 수도 있다.

바하의 음악이 바하를 나타내고, 모차르트의 음악이 모차르트를 나타내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나타낸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만의 유일한 본성, 즉 사랑을 표현한다.


“계셨다”는 “말씀”은 창조되지 않고 이미 영원 속에 절대적으로 실존해 계셨다는 뜻이다. 이 과거형은 선재한 그리스도를 고백한 시점에서 연유된 표현형에 불과하다. 이와 비슷한 표현법은 8.58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는 “말씀”의 신적인 본질이 언급된 내용이다. 이 내용은 “말씀”의 선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표현․ 강조한 것이다. “말씀”은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에 말씀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다. 요한복음서를 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야훼 하느님 이외에 다른 존재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복음사가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2절] 1절의 내용을 반복한 구절이다. 아마도 지상에서 계시 및 구원활동을 펼친 그리스도의 신원(하느님과 함께한 그리스도의 선재), 즉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어서 나오는 3-13절은 창조와 인류 역사를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진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3절] “말씀‘이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음을 뜻한다. 창조에 있어서 “말씀”의 유일무이한 역할과 모든 창조물의 가치를 강조한 표현이다.


[4절] 창조행위에 동참한 ”말씀“은 창조된 것들의 생명을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속된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분이 배척되는 곳에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 예수는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면서 자신을 따라오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8,12).


[5절] 이 구절에서도 1절과 마찬가지로, 빛과 어두움의 대립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어두움으로부터 빛을 갈라놓으신 창조의 첫날을 생각하게 한다.

“어둠”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등진 인간세계, 곧 하느님의 빛에 의해서 아직 비추어지지 않은 인간세계(참조: 8,12; 12,46)를 뜻하며, 또한 이런 어둠으로 인해서 소경이 되어 버리거나 악의 세계로 타락해 버린 인간 자신도 가리킨다(참조: 9,39; 12,40). 따라서 “어둠”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빛”을 거부함으로써 생긴 결과다.

1요한1,5의 하느님은 빛이시고 그분 안에는 어둠이 없다는 선언은 매우 의미가 있다. 어둠 속에는 형제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산다. 반면에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문다(1요한2,9이하). 어둠 속을 걷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요한8,12)

그러므로 어둠은 하느님과 반대되고 예수의 계시에 반대되는 사탄의 세상을 뜻한다. 말씀은 악의 세력에 이기기 위해서 비치고 있다.

“비치고 있다”라고(현재형) 말한다. 그런데 “비치고 있었다”라고(과거형) 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는 “빛”이 인간에게 비치고 있으나 인간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인간의 결정적인 거부가 시사되어 있다. 인간이 “빛”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은 인간에게 현재에도 계속 비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육화를 통해 세상을 비추는 신적 생명의 힘이 복음사가의 시대를 넘어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빛과 어둠의 사이, 예수와 어둠의 권력자(이세상 권력자) 사이의 싸움 주제는 전형적인 요한 복음서의 주제이다. 예수의 십자가로 세상 지배자는 패배했고 쫒겨났으며(12,31-32), 심판받았다(16,11). 예수께서는 세상을 이겼고(16,33)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이는 이 승리에 동참한다(1요한5,4-5).


[6-8절] 6-8절은 원래의 로고스 찬미가에 속하지 않는 부분으로서 요한 복음사가에 의해 삽입된 구절들이다.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을 “빛”으로 여긴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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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의 충돌>

 

세레자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으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열두제자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기다리던 메시아가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세례자 요한이 순교한 후 쉽게 예수님에게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

반면 예수의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라는 사실에 대해 증언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선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러한 증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역사적 사료에 보면 나중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하나의 파벌을 형성했다고 전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오로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에 있다. 그래서 7절과 8절에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빛을 증언하러 왔다”고 강조하고 있는 시실이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이것은 또한 세례자 요한을 “빛”으로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음도 시사한다(1,20.24참조).

그러므로 6-8절 전체 문맥으로 볼 때 말씀은 곧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분이며 그리스도라는 위격자 안에 육화(肉化, incarnation)된 분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는 단호하게 세례자 요한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세례자 요한은 빛의 증거자일 뿐 빛 자체는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9절] “말씀”은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모든 사람을 비출 수 있는 힘을 가지는 유일무이한 “참된 빛”이다.


[10절] “세상”이란 말이 세 번이나 언급되는데, 그 개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언급되는 “세상”(10b절)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태초의 아름다운 세상(3절)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그러나 첫 번째(10a절)와 세 번째 언급되는 “세상”(10c절)은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시공적인 세계, 곧 인간세계를 가리킨다. 즉 인간이 거처하는 세계는 그 자체가 악일 수는 없지만, 죄로 인하여 어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이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는 의미는 하느님이 단지 이 땅덩어리에 오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인간으로 말미암은 모든 사건 속에 들어오셨다는 의미인 것이다. 즉 초월자로 계시지 않고 인간의 세속사에 개입하셨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개입하시려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을 배제한다.


[11절] 10절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 구절로서 “말씀”이 세상에서 거부당함 극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다. 즉, “말씀”은 자기로 말미암아 생겨난 세상, 곧 자기의 영역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이 오히려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자기의 영역에로 온 “말씀”은 모든 사람들의 “빛”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 빛을 맞이하도록 결단을 촉구한 것이다.

하지만 “말씀”과 가장 밀접한 사람들(유대인들)이 오히려 그에 맞서 결정적으로 거부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렇게 ‘예수 앞에 선 유대인들의 불신앙’은 요한복음의 큰 주제이다. 여기서도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세상이 인간 편의 거부로 인해서 결국 하느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 시사된 것이다.


[12-13절] 이 두 절은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큰 선물에 대한 말씀이다. 믿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행복한 운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12절).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13절). 1요한5,1에서 유사한 표현이 있다:“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이는 하느님께로부터 났다.”

여기서는 11절의 내용과 대조를 이루는 구절로서 “말씀”을 맞아들이고 믿는 자들이 있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들은 “말씀”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힘을 선물로 얻게 된 것이다(1요한 3,1-2). 요한1,12-13에서도 “그의 신격을 믿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한다. 복음서 저자는 이 선물에 대해 끊임없이 경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13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에 의해서 신비스럽게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라고 설명된다(3,6.8참조).

[14절] 14절은 이 “말씀 찬미가”의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말씀께서 연약한 인간 본성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다.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육(肉)이 되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이때 “함께 계셨는데”는 원문을 보면 “천막을 치셨다”는 단어이다. 이 천막이란, 곧 “성막”으로서 유대인에게 있어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은 계약의 궤를 모신 성스러운 천막이며 그 안에 하느님이 늘 현존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는 거룩한 성막이다. 그런데 그 성막은 하느님의 지시로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장막이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우리 안에 성막을 치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직접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와 함께 현존하셨다는 의미가 된다. 요한복음사가는 이러한 구약의 배경을 갖고 말씀의 육화를 설명한다.


“외(아들)”이란 표현을 보자.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셨다는 말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이다. “영광”은 한마디로 아버지로부터 나온 “외(아들)”, 즉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외(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유일무이한 자로서 하느님과 유일무이한 관계를 지닌 아들이다.

독생자는 아버지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그분은 우리가 영광을 드려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속되고 비천한 인생이지만 우리가 더욱 영광스럽게 해드려야 한다. 그리스도는 나에 의해서 더욱 영광을 받으시길 기뻐하신다. 내가 잘하면 잘 할수록 그리스도는 나를 통해 좋은 일을 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그분께 영광을 드리고 그분을 빛내드릴 수 있어야 한다.


[15절] 예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 내용으로서 6-8절처럼 삽입된 구절이다. 이 내용은 1장 30절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즉, 육화한 말씀이 세례자 요한보다 앞서게 되었다는 점이 강조되고, 그 이유는 말씀의 선재에 있다고 한다. 이렇게 요한 복음사가기 이 구절들을 삽입한 이유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고 이를 해소시키기 위한 의도로 삽입한 것이다.


[16절] 16절까지가 원래 로고스 찬미가의 끝이다.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는 말은 의심없이 그리스도의 인류구원 사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인해 신앙인들은 은총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그 은총은 하느님이 순전히 선물로 거저 주시는 은총이다. 이 16절을 통해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감사에 대한 답례로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받고 또 받았다.”


[17-18절] 17-18절은 복음사가에 의해 첨가된 부분이다.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죽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다는 판관기13,22의 말씀이며, 유대인들의 오래된 생각이기도 하다. 모세도 엘리야도 감히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출애33,18-34,9; 1열왕19,11-13).

“그분을 뵙고 그분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 었느냐?”고 집회서(43,31)는 말한다.

이 요한복음 서문은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고 있다. 그것은 육감으로 하느님께 도달하려는 것은 낡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오로지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보았고, 오직 한 사람만이 그분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그분은 성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이시다. 복음사가는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이 사실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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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묵상하기>


“한 처음에...”라고 우주의 역사 시초로부터 거슬러 올라간 복음사가는 역사의 정점에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비천한 인간이 되어 오신 육화의 신비를 이 서언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특히 빛, 어두움, 생명, 은총, 진리, 영광, 세상 등의 함축성 있는 낱말들을 사용하여 요한복음서 전체의 메시지를 요약하고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 이 말은 요한복음의 놀라운 서언이 담고 있는 메시지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말씀”이시라고 표현한다.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이제 수난과 부활로 인류 역사의 전체를 변화시키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세상을 비추는 생명의 빛이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사람은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렇게 여기에서 살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하는 실존에 관계된 의문에 잠기곤 한다. 그런 상념에 휩싸일 때면 주위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거나 절친한 친구가 있어도 그들이 답답한 속을 풀어줄 수는 없다. 그들도 나와 똑같은 의문 속에서 답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 안에 던져진 존재이며, 마치도 캄캄한 암흑 속에 “혼자”있음을 깨닫는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절대자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두운 암흑 속에 한줄기 빛으로 다가오신 분이다. 캄캄한 암흑 속에 한줄기 빛은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그분이 2천년 전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사셨고 빛을 전해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오감으로 쉽게 그분을 알아챌 수는 없다. 그분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랑이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몸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것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되면 그분께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지켜보고 계셨고, 나와 함께, 내 곁에, 내 안에 계셨음을 알게 된다. 아니 내 인생에 그분께서 동반자로 함께하셨음을 알게 된다.

우리 곁에 그분이 계심을 깨닫는다면.....우리는 성모님처럼 노래할 것이다. “내 영혼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루가1,46b -47) 주님의 현존을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주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설레이는 마음을 갖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은총을 “받고 또 받았음”을 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감사할 줄을 아는 사람이 된다.

마치도 청춘남녀들이 설레이는 마음으로 만나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저 함께 있는 것이 소중하여 아무런 말이 필요 없듯이, 주님의 현존을 깨닫게 되면 주님께 아무런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자들 중에는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요한21,1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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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증인들


요한복음 1장은 복음서 전체의 도입부이다. 이 도입부의 첫 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말씀찬미가를 묵상하였다. 이 단원에서 우리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분기점을 이루는, 작지만 큰 인물 세례자 요한을 만나게 된다. 이 도입부의 이 두 번째 부분은 세례자 요한과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람들은 베드로를 그들의 ‘반석’으로 삼아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창립 맴버들이 될 것이다. 이 부분은 네 단락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날로 구분되고 있다.


첫째날(1,19-28)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장차 오실 분에 관하여 대체적으로 설명한다.


둘째날(1,29-34)에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직접 가르키면서 그분을 하느님의 어린양이시요, 자기가 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무시는 분이시요, 선택받은 분이심을 밝힌다.


셋째날(1,35-42)에는 요한이 자기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도록 지시한다. 그리하여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가 예수와 함께 머문다. 예수와 함께 지낸 다음 그들은 다른 제자들을 새로이 모아들이기 시작한다.


넷째날(1,42-51)에는 예수 친히 제자들을 불러 당신을 따르도록 하신다.


반부 두 단락에서는 예수께 대한 증언들이 더 많이 제시된다. 즉 그분은 위대한 교사(랍비)요 메시아이시며모세의 율법 속에 묘사된 분이시자 하느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것이다. 도입부 전체는 당신이 하늘과 땅,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예수 자신의 증언으로 절정에 달한다(1,51)


이 예수에 대한 증언에 관한 대목을 이해하기 전에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이 두가지 있다.


첫째로, 요한복음은 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말을 할 때 자신들이 의식적으로 의도하는 이상의 의미를 지닌 말로 이야기하게 만드는 경우가 가끔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사제 가야파는 자기가 하는 말의 심오한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예수의 십자가형이 가져오는 효과를 예언하는 결과를 낳는다. 


   대사제 가야파 예언 -  http://blog.daum.net/duaworld/15718504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의회를 소집하고 ‘그 사람이 많은 기적을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 하며 의논하였다. 그 해의 대사제인 가야파가 그 자리에 와 있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그렇게 아둔합니까?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11,47-50)

대사제 가야파는 여기에서 예수 때문에 로마인들에 의해 혹시 자기 민족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차라리 예수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를 넘어서서 예수 한사람의 죽음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게 된다는 대사제로서의 예언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과 나타나엘도 앞으로 봉독하게 될 부분에서 예수의 활동이 시작되려는 단계에 그들이 의도했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가 담긴 말들을 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말할 때 실제로는 구세주께서 오시기 전에 오기로 예언된 구약의 옛 예언자 엘리야라는 것만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유대인들은 말라기3,23-24의 예언에 따라 종말이 오기 전에 예언자 엘리야가 재림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을 반영한 것이다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은 훨씬 더 심오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 말속에 예수께서 모든 것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선재)하셨다는 진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나타나엘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 단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겨 온 명예로운 칭호를 예수께 부여하려는 의도였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칭호는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선포가 된다.


두 번째 점은 제자직과 관계가 있다. 복음사가는 참된 제자직은 예수께 복종하는 것 이상의 것이요, 예수의 명에 따라 행동하는 것 이상의 것임을 가르친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와서 보는’ 것이다. 즉 예수께 가서 그분과 함께 머물면서 그분 안에서 하느님과 인류를 결합시키는 사람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1,19-34)


1) 첫 번째 증언 : 세례자 요한(1,19-28)


<성서본문>

19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 알아 보게 하였다. 이 때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20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히 말해주었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다시 묻자 요한은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요?" 그들이 다시 물었을 때 요한은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22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해 줄 말이 있어야 하겠으니 당신이 누군지 좀 알려 주시오. 당신을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이렇게 다그쳐 묻자


http://blog.daum.net/teddy5050/618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23  요한은 그제야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오" 하고 대답하였다.

24  그들은 바리사이파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그들은 또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26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이오. 그런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27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오."

28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해를 돕는 글>

세례자 요한의 독백형식으로 엮어진 증언 내용인데, 청중이 누구인지 분명치는 않다. 31절의 내용에 비추어볼 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어떤 하나의 무리로 추정할 뿐이다. 이 증언의 의미는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알리는 데 있다. 요한은 단호하게 “나는 아니다.” “그분은 뒤에 오신다.” 라고 증언한다.

이 단락은 머리말(1,6-8)의 이야기에 대한 확대설명이다.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에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단호하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히 말해 주었다(20절).” 대답은 계속 부정이며 점점 간략해지고 신속해진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20절)/ 아니오(21절a)/ 아니오(21절b). 요한은 기다리는 새 모세(신명18,15)도 아니며 메시아를 의미하는 “그 예언자”라고도 할 수 없다. 유대인들은 말라기3,1.23-24의 예언대로, 구세주가 오시기 전에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가 재림하여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엘리야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대로 자신을 가리켜 “‘주님의 길을 바르게 하라’ 고 광야에서 부르짖는 이의 소리요.”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긴긴 밤의 기다림 뒤에 오고 있는 새벽을 알리는 파수꾼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그저 ‘어느 한 목소리’로 소개된다. 특정한 목소리로 소개하지 않는다. 그 목소리는 오직 예수를 위하여 아껴둔다 : 신랑의 목소리(3,29), 하느님의 아들의 목소리(5,25), 사람의 아들의 목소리(5,27-29), 목자의 목소리(10,3-5. 16), 진리의 증언자 목소리(18,37).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많은 증인들이 예수를 위하여 증언하고자 등장한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그 첫 증인이 된다.




<주석>

[19절] 여기서 “유대인들”은 공권력을 가진 지도층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들로부터 파견된 “제관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은 유대 최고의회(쉬네드리온)의 구성원 중 하나인 대제관들에게 속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질문은 사사로운 궁금증에 의한 질문이 아니라, 국가 최고 공권력을 가진 이들의 공적인 질문이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과 그의 공동체의 존재는 당시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0절]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보고서 혹시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생각한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루가 3,15).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21절]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 거듭되는 세례자 요한의 “아니오”라는 대답에 유대인들은 당혹하며 다시 질문한다. 이와 비슷한 질문을 유대인들은 예수께도 할 것이다(8,25). 또한 빌라도 역시 예수께 질문을 던진다 : “당신은 어디서 왔소?(19,9)” 신앙이 없는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태도에 당혹하며, 예수의 신비에 호기심을 갖고 보고 있는 것이다.


[23]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부인하고서, 이제 자신은 “주님의 길을 바르게 하라(이사 40,3)고 광야에서 부르짖는 이의 소리”라고 밝힌다. 즉,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를 위한 “소리”, 곧 증언하는 자라는 것이다(1,26참조), 따라서 세례자 요한이 “부르짖는 이의 소리”라는 표현은 자기 자신이 결코 “말씀(그리스도)은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1,8참조).


[24] 여기서 질문하는 이들은 바리사이파라 한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제관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다는 19절의 보도 내용과 상충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복음사가의 해설 부분으로서 문맥상 "파견된 자들 가운데 바리사이들에 속한 자들도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파견된 자들 대부분은 제관들과 레위 지파인데 그중에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율법학자들로서 대제관들과 함께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적수들로 등장하며 이스라엘 최고의회의 구성원들이다.


[25] 바이사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는 행위를 메시아의 역할을 수행하는 행위로 이해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면서 새로운 종교운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통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왜 세례를 베푸는 거요?” 이 질문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왜 당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거요?”라는 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군중들의 집회, 결사는 정치인들이나 기관에 있는 이들에게는 예민한 관심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6]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자신의 세례보다는 자신이 증언해야만 하는 분(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세례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을 다만 알려주기 위해서 수행되는 “물의 세례”일 뿐이었다(1, 31.33).


[27] 세례자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 앞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고 증언해야 할 그분의 신비스런 품위를 하나의 형상어로 표현한 것이다(참조;: 마르1,7; 마태 3,11; 루가 3,16).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아(11,18)와 다른 장소라는 곳도 아울러 명시해 준다.


[28] 세례자 요한의 증언 내용이 조서나 기록에 의거한 것임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깊이 묵상하기>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많은 증인들이 예수를 위하여 증언하고자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빛이신 예수의 첫 증인, 우리 시대와 미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까지 이르는 증인들의 긴 서열에서 첫 번째 증인으로 제시된다. 그는 단호하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하고 분명히 부정하여 답변한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오인하는 가운데 자신은 메시아가 아님을 명백히 증언한다. 오직 예수께로 모든 것을 양보한다. 27절은 예수께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절정을 이룬다.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요.” 당시에 신발 끈을 푸는 일은 하인이 주인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 대하여 철저하게 종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시각을 조금 돌려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생각해보자.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 활동을 시작했고 수많은 군중들이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를 구세주로 생각하였다. 그에게는 제자들도 있었으며 헤로데 왕도 그를 존경할 정도였다.

그에게 혹시 권력에 대한 유혹은 전혀 없었을까.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자신을 따르는 많은 이들의 힘을 입어 권력을 잡아보았으면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을까? 예수님도 광야에서 권력에 대한 유혹을 격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 양보하고 “신발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도 없는” 하인보다도 못한 위치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생각하는 각도에 따라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과 경쟁관계였지 않나?

오늘날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하고 자신을 알리고 선전하고 과대포장 하는 것이 일반화된 이 세상 안에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유명세를 좀 타고 돈이 좀 있으면 권력에 대한 욕망을 꿈꾸게 된다.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것을 다 얻게 되면 마지막으로 가는 길이 명예와 권력이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의 앞길을 닦는 선구자답게 구세주 보다 먼저 와서 주님의 시대를 준비하고는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사라진다. 마치도 어두운 밤에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죄와 어둠속에서 피었다가 새벽이 밝아오고 참 태양이신 예수께서 등장하실 때 조용히 시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찌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0-11)”라고 하시며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신다.

세례자 요한은 참빛을 증언하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양보하고, 결국에는 정의를 외치다가 순교한다. 인간적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의 인생은 억울하고 슬픈 생애일 수 있다. 과거 2천년 가톨릭 역사 중에 예수님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친 수많은 순교자도 인간적으로는 억울하고 손해를 본 생애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앙 때문에 시간을 내어 봉사해야 하고 귀중한 재물도 바쳐야 하고 억울하면서도 양보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신앙인의 삶도 손해 보는 삶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행복의 길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 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마태5,12)”

인간적으로는 그것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예수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있고 참된 행복이다. “우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증언(1,29-34) : 예수 안에서의 성령


<성서본문>

29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30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 그분은 사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

31  나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와 이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자료:비+움블로그 inigo731님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와 이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33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 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라' 고 말씀해 주셨다.

34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해를 돕는 글>

  가) 하느님의 어린양의 매력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소개할 때 신탁의 형식으로 한다“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29절).” 아직은 수수께끼같이 확실하지 않은 호칭이지만 이 호칭은 신비스럽고 복종케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35절)”의 의미는 “자, 메시아”이다. 이것은 예수께 대한 직접적인 첫 증언이다. 이것은 이사야53장의 고난 받는 “야훼의 종”-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이심을 의미한다.

세례자 요한의 이 증언은 미사성제의 핵심부분에 채택되어 있다. 미사 때 사제가 성체를 높이 들어올려 신자들에게 보여주며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시는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 되도다” 한다. 이로써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어린양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29절).”



  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요한복음서 서두에 있는 ‘세상의 죄’란 주제는 특별한 매력을 지닌 채 깊은 상징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세상의 죄 - 사람들의 개개인의 모든 죄 역시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거대한 악의 바탕은 아니다. 세상의 죄는 모든 죄의 바탕에 있는 거짓과 불의, 제도적인 폭력이다.

요한복음서에서 “세상”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이 원래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상이고, 또 하나는 예수와 그 제자들을 미워하고 한 악에 기운 부정적인 세상(속세)이다. 하느님이 만드신 이 세상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악에 기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다.



<주석>

[29절]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이 말은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신앙고백이다. 예수는 십자가상 죽음으로 온 인류의 죄를 없애는 신약의 “해방절 양”으로 상징하여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사야서에 예언된 고통받는 “야훼의 종”(이사52,13-53,12)을 의미하며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로부터 해방되었다(1요한 3,5-8참조).


[30절] 15절의 말이 거의 그대로 반복된 내용이다. 15절은 복음사가의 머리말에 속한 증언 내용이지만, 이 구절은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서 직접 증언되는 내용이라는 점이 독특하고 다를 뿐이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이미 “이분을 두고서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은 문맥상 27절의 내용을 가리킨다.


[31절] 요한 복음서에서 “이스라엘”이란 말은 “유대인들”이란 말과는 달리 항상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계시와 약속을 받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을 가리키는 명예스런 칭호다(3,10참조). 그리고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표현․ 언급되기도 한다(참조“ 1,49; 12,13). 그런데 “유대인들”이란 말은 주로 예수의 적수들로 언급된다(2,18; 5,10; 7,13; 9,22; 8,12; 19,38; 20,19). 로마 병사들은 예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Iesus Nazarenus Rex Iudaeorum)으로 적어놓았다.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한마디로 메시아를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드러나게 알리는 것으로 요약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세례행위도 그런 임무에 속할 뿐이다(1,26참조).


[32절]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세례순간에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고 성부의 음성이 들리는 신적인 이적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마르 1,10). 그런데 여기서는 그 구체적인 장면의 묘사가 없고, 세례자 요한 자신이 목격한 것을 증언하는 형식으로 설명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33절]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파견한 분, 즉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서 비로소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완성하고 한단계 더 뛰어넘는, 예수로 인해서 가능해진 진정한 의미의 세례성사를 말하고 있다.


[34절]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란 표현과 거의 흡사한 뜻으로서 메시아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마르 1,11; 마태3,17).



<깊이 묵상하기>

인류의 구세주 보다 앞서 와서 메시아 시대를 알리는 ‘선구자’ 세례자 요한. 그는 구세주를 증거하는 ‘소리’로서 왔다가 구세주의 시대가 열리자 조용히 사라져간 인물이다. 요한은 나이 많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그리스도는 나이 어린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요한은 하나의 ‘소리’이고 주님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 “말씀”이시다. 요한은 잠시 동안 외치는 소리이고,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시는 영원한 말씀이시다.



자료 :손용환신부님 /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례자 요한이 들고 있는 십자가의 리본에 쓰여있는 글이 이 성경구절이다



요한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것은 우선 그분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어린양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는 야훼의 종이시기 때문이다.수께서 오시기 약 6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 하느님의 어린양을 예고한다(이사야53,1-7).

예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것은 그분이 과월절 양으로 상징되는 것을 모두 실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분노가 에집트를 덮쳤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제된 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발라 재앙을 피했기 때문이다(출애굽12,21-28).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날 이후 매년 어린양을 잡고 이것을 기념하는 과월절 축제를 지내며,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지내신 날이 바로 과월절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집트에서 재앙을 피한 것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은 것처럼, 인류가 심판에서 구원된 것은 참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집트에서의 구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과월절에 어린양의 고기를 먹듯이, 인류는 죽음에서 구원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기념하여 어린양의 “살”과 “피”, 즉 성체성사를 영함으로써 재앙을 피하여 구원에 도달하게 된다.

어린양이신 예수께서는 내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다.


사람은 수많은 ‘소리’에 휩싸여 산다. 듣기 싫은 잔소리, 듣기 좋은 칭찬의 소리, 남을 비방하는 소리, 물건 파는 소리, 다투는 소리, 기계들 소리, 자동차 소음.....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무런 소리가 없이 고요하다면 참으로 답답하고 생동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이로운 소리가 있고 그렇지 않은 소리가 있다. 어떤 소리는 자꾸만 듣고 싶은 소리가 있고, 어떤 소리는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소리가 있다. 어떤 소리는 사람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고 생명을 주는 소리가 있고, 어떤 소리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소리가 있다. 나의 입에서는 어떤 소리가 가장 많이 나오고 있고, 내 주변에는 어떤 소리가 가장 많을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 바로 참된 빛으로 오신 영원한 말씀이신 “하느님의 어린양”을 전하는 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이다이 소리는 사람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는 소리이다. 세례자 요한은 그 빛을 증언하는 ‘소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우리도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어린양을 증거하는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소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으로 인하여 구약시대가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시대, 즉 신약시대가 시작된다. 그러나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1,10)”

변화를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잘못된 심리중의 하나이다. 변화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안정된 기득권자들 일수록 변화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패와 퇴보의 원인이기도 하다. 새로움, 새 시대, 새로운 질서에 발맞추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새로운 비젼을 준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와 함께 계신 말씀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을 향하여 “소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예수께 모든 것을 양보하고 사라진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우리 본당의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서본문>
35 다음 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 곳에 서 있다가
36 마침 예수께서 걸어 가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 갔다.
38 예수께서는 뒤돌아 서서 그들이 따라 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라삐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
39 예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시자 그들은 따라 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때는 네 시쯤 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 간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자료 : 손용환신부님 / 첫 제자들(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 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
42 그리고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가자 예수께서 시몬을 눈여겨 보시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앞으로 너를 게파라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파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뜻이다.)
43 그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떠나 가시려던 참에 필립보를 만나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부르셨다.
44 필립보는 베싸이다 출신으로 안드레아와 베드로와 한 고향 사람이다.
45 그가 나타나엘을 찾아 가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 그분은 요셉의 아들 예수인데 나자렛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나 그는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물었다. 그래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권하였다.
47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시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48 나타나엘이 예수께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필립보가 너를 찾아 가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49 나타나엘은 "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께서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하시고
51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해를 돕는 글>
이 단락은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우선,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는 자기네 스승의 말을 듣고서 예수의 첫 번째 제자들이 되고(35-39절), 시몬 베드로는 자기 형제 안드레아를 통해 제자로서 소명을 받게 된 것이다(40-42절).
이와 같이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이 시사된다. 그리고 제자들의 소명은 증인들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특징적이다. 첫 번째 두 제자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 시몬 베드로는 안드레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필립보의 증언을 통해 나타나엘의 소명도 이루어진다(45-47절). 이 소명사화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의 계시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51절).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1,43-51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지혜”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넘어가면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다음에 이어지는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참된 지혜”라는 주제가 핵심적인 사상을 이루고 있다.
구약성서 지혜서6,12에 보면 지혜란, 그것을 ‘찾는’ 사람이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예수께서는 두 제자에게 “너희가 찾는 것(공동번역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38절)”고 물으신다. 지혜서의 현자는 지혜를 탐구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혜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지혜7,28).
제자들은 “랍비,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린다. 예수께서 “와서 보라”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예수와 함께 지냈다”(38-39절). 지혜는 그것을 찾는 사람들이 ‘발견한다’(지혜6,12). 이렇게 지혜를 발견한 사람은 안드레아 처럼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기뻐하며 소리치는 것이다(41절).
또 지혜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드러내 ‘보인다’(지혜6,12).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보게 될 것이다”하고 약속하시는 것이다(51절).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51절).

사도들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새 이스라엘, 즉 교회의 창립자들이다. 옛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아버지 야곱(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닿아 있는 사다리를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는 영상을 보았었다(창세28,10-22). 그런데 새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은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한 영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늘과 땅, 하느님과 사람을 잇는 ‘사다리’로서의 예수를 보게 될 것이다.
야곱이 신비한 영상을 보았던 곳이 베델, 즉 “하느님의 집.....하늘의 문”(창세28,17) 이었으므로 복음사가도 역시 여기에서 예수께서 새로운 성전이시오, 하느님의 참된 지상 거처이시며, 하늘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심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2,13-22에 가서 분명하게 명시되는 개념이다.




<주석>
(1) 예수의 첫 제자들(1,35-42)

[35절] 이 대목에서 세례자 요한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6절] 세례자 요한이 지나가는 예수를 눈여겨본다는 것은 예수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증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함께 서 있는 두 제자들에게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29절 해설 참조)이라고 선포한다.

[37절] 예수께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 언급이다. 그들이 예수를 “따라갔다”란 말은 예수에 대한 신뢰의 첫걸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첫 걸음은 그들이 예수께 대한 호기심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머묾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된다.

[38절] “당신들은 무엇을 찾고 있소?”(1,38a. 공동번역은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던지시는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이는 우리 존재와 인생의 의미,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사에 대한 질문, 예수를 믿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왜 예수를 찾아왔는가?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구약성서에서도 ‘하느님의 지혜’는 믿는 이들이 찾는 탐구의 대상이다. 지혜는 그의 길을 따르도록, 그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잠언8,1이하; 9,1-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초대하신다. “찾아라, 만나주실 때가 되었다”(이사55,6; 예레29,13). “살고 싶으면 찾아 오너라”(아모5,4.14).
그리고 예수님도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해 본 적이 없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너희는 기쁨에 넘칠 것이다.(16,24)”루가11,9-10에도 비슷한 말씀을 이야기 하고 있다.“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복음사가는 동시에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를 잘못된 이유로 찾는 경우도 소개한다. 오천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후에 군중이 그 기적의 의미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어서 예수를 찾아온 경우(요한6,26),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찾는 경우(7,11.25), 예수의 부활 후에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여전히 지상의 예수를 찾는 경우(20,15) 등이다.

“랍비, 어디 머물고 계십니까?”라는 말은 예수와 함께 머물면서 무엇인가를 듣고 배우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들었던 증언 내용을 확인하고자 했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께 하나의 질문으로 대답한다. “랍비, 어디 머물고 계십니까?”(1,38b) 이것으로 자신들이 “지혜”를 올바르게 탐구하며 걸어가고 싶어하는 것을 드러낸다. ‘신앙의 탐구’는 요한 복음사가가 즐겨 사용하는 개념이다.
믿는다는 것은 점차적으로 예수의 곁에(1,38-39), 예수 안에(6,56;15,4-8), 예수의 말씀 안에(8,31), 그의 사랑 안에(15,9-10), 자기 거처를 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곁에, 예수 안에, 예수와 함께 존재하고-거처하고-머무는 것이다.

‘믿다-따르다-보다-머물다’라는 이 이야기 속에는 시간의 암시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 “그날 그분과 함께 지냈다. 시간은 대략 오후 네시쯤이었다.”(39절) 스승과의 첫 만남, 너무나 의미 깊은 만남의 시간이 오후 네시쯤이었다. 오후 네시는 완성된 시간의 상징이다. 사실 오후 네시는 유대인들이 신앙의 순례를 마치고 긴장을 풀고 탐구를 그치고 고요히 안정하는 시간이며 그들을 기쁨으로 소리지르게 하는 시간이다 :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네!”(41절)

[39절] “와서 보시오”라는 예수의 초대 말로써 이제 그 두 제자는 직접 예수 자신으로부터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특히 “보시오”란 말은 예수가 나타나엘(50절)이나 제자들에게 말한 것(51절)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에 어떤 하나의 약속을 시사하기도 한다.

[40절] 익명의 다른 한 제자는 “예수가 사랑한 제자”(13,23; 19,26; 20,2; 21,7.20; 참조: “또 다른 제자”로 언급된 대목: 18,15; 20,2-4.8), 곧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사도 요한)으로 추정되지만 입증할 수는 없다.

[41절] 안드레아는 자기가 만난 예수를 “메시아”, 곧 구약에서 예언 약속된 분으로 고백한 것이다(45.49절 참조).

[42절] “시몬을 위한 새 이름-게파(베드로, 바위)”
부르심에 대한 신앙의 응답 후에 신앙은 점점 성장되고 외쳐지고 주위로 퍼져간다. 안드레아는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감으로써 자신이 입으로 고백한 내용(41절)을 실천에 옮기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다. 그 다음날에는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똑같이 이끌 것이다(43-46절). 그 외침은 동일하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다네...”(41절.45절)
“시몬을 눈여겨 보았다”는 말은 예수가 시몬을 예사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며, 신적인 지식을 갖춘 계시자로서의 모습이다(1,47-50 참조). 예수께서는 시몬을 만나시며 그를 새로운 미래로 초대하신다. 그에게 “게파(베드로, 반석)” 이라는 새 이름을 주신다. 이 이름의 의미는 교회의 튼튼한 기반이 될 베드로의 사명을 표현하고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교회 중심에서 수행할 베드로의 특별한 사명을 알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 부활 이후에 시몬 베드로는 “양들을 잘 먹여 길러야 하는”(21,15-17) 목자로 우뚝서게 된다.

성서를 보면 하느님은 특별한 사명을 맡기는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주신다. 성조 아브람은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주셨다. 또한 야곱을 이스라엘로, 여기서 시몬은 게파(바위)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세례를 받게 되면 세례명이라는 새 이름이 주어진다. 이는 세례받은 이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부여됨을 뜻한다. 그 새로운 사명이란 무엇일까?


자료 : 손용환신부님 /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다.



(2)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다(1,43-51)




<주석>
[43-45절] “나타나엘”은 공관복음서의 “열두 제자”명단에서 볼 수 있는 바르톨메오와 동일 인물로 추정한다(참조: 마르 3,18병행구; 사도 1,13).
“베싸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 요르단 강 하구에 위치하며 그 지명의 뜻은 ‘어부의 집’, 혹은 ‘고기의 집’으로 어부들이 사는 마을이다. 이 지명으로 인하여 복음사가는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필립보, 안드레아, 베드로가 어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46절] 예수가 나자렛 출신이란 이유 때문에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말에 회의를 가지게 된다. 즉, 나자렛 출신 예수가 메시아일리가 없다는 것이다(7.52참조). 사실상 나자렛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결코 그다지 중요성이 없던 촌락이었다. 그분만 아니라 구약성서나 랍비들의 문헌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곳이다.
구세주는 구약시대의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손꼽히는 다윗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미가5,1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런데 예수는 실제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루가2,1-7), 요셉과 마리아의 거주지였던 나자렛에서 성장했기에 나자렛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필립보는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란 말로써 예수에게로 이끌고자 한다. 특히 “와서 보시오”란 말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들을 초대할 당시에 사용한 말과 동일하다(39a절). 그러나 필립보의 이 말도 나타나엘도 예수를 만나봄으로써 자기처럼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연유된 표현이다.

[47절] 나타나엘은 예수에게 감으로 인해서 예수에 대한 관심 내지는 필립보의 증언을 믿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가 아직 알지도 못하던 나타나엘에게 마치 잘 알고나 있는 듯이 칭찬의 말을 한 것은 신적인 지식을 갖춘 예수의 모습을 시사한다. 예수의 이런 모습은 한마디로 성부와의 밀접한 관계를 뜻한다. 예수는 자신의 임무와 “길”을 잘 알듯이 제자들에 대해서도 잘 안다(6,61.64,70; 13,11.18.38; 17.12). 그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꿰뜷어볼 줄을 안다(2,25; 5,42; 참조: 6,15; 21,17).

“나타나엘 - 정통 이스라엘인.”
예수가 나타나엘을 가리켜 “정통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의 명예로운 호칭이며. “거짓이 없구나”라는 말은 칭찬의 말이다. 이 말과 함께 나타나엘은 “참된 이스라엘 사람”, 곧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의 판단에 의하면 나타나엘은 진짜 이스라엘 사람, 즉 정통 이스라엘 사람이다. 거짓이 없고 유대인들이 성서를 읽고 알면서도 예수를 믿으려 그에게 오지 않는 것(5,39-40. 46-47)과는 아주 다르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차이점은 31절 주석 참조.
나타나엘은 진정한 지성인, 정직한 탐구자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증언을 “들었고”(“와서 보시오”: 46절) 그를 “따랐고” 자신이 직접 “보게” 된다.

[48절]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나타나엘이 예수의 통찰력 있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당황한 나머지 묻는 말이다.
예수의 말씀은 나타나엘의 평범한 삶까지도 꿰뚤어 보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라는 말은 율사들이 흔히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 그리고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율법서를 공부한 데서 연유된 랍비들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나타나엘에게 대답한 예수의 말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특히 메시아 대망에 열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신적인 지식을 갖춘 예수의 모습이 더욱 심도 있게 시사된 것이다.

[49절] 나타나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볼 수 있는 신적인 지식을 갖춘 예수에게 압도되어 예수가 메시아임을 고백한 것이다. 그는 예수를 존경하는 뜻에서 먼저 “랍비”고 부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한다. 이 두 칭호는 “예수는 성서에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다”란 필립보의 말(45절)을 재확인시켜 주면서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고백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하느님과 밀접하게 결속된 관계를 뜻하는 메시아적인 칭호로서 마르타가 예수에게 고백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11,27). 즉,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고백 하는 그런 차원은 아직 아니다(20,31참조).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이란 칭호는 하느님의 왕권을 이스라엘에게서 재건할 “메시아”임을 뜻한다(6,15참조). 이 메시아는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와 함께 종교적인 의미로 더욱 심화되어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왕”(18,33.39; 19,3.19.21)이란 칭호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12,13참조).

[50절] 예수는 나타나엘의 고백을 인정하면서 약속까지 해준다. 예수의 이 약속은 나타나엘이 지금 체험한 것 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되리라는 내용이다. "더 큰일“이란 예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계시적인 말씀과 기적, 곧 “표징”을 뜻하리라 본다(2,11참조). 일단 믿음을 가진 자에게 예수는 더 큰 약속을 한 것이다. 우리도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졌기에 우리에게 더 큰 일, 즉 구원과 영생이 약속된 것이다.

[51절] 나타나엘에게 약속한 “더 큰 일”(50절)은 현 문맥상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를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는 “사람의 아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지상에 현존하신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이 말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야곱의 꿈 이야기와 흡사하다(창세28,12). 예수는 베델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하나의 신적인 표징을 약속하는 것이다. 즉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오게 될 최고 계시를 말하고 있다.
천사들은 인간의 삶을 하느님께 가져갈 것이며, 다시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와 진리를 가져다줄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라는 사다리 위에서 펼쳐지게 될 것이다.
예수의 이 계시 말씀은 “사람의 아들”에 관한 첫 번째 계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묵상하기> “부르심의 신학”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처지와 자리에 만족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비록 여러 가지 개선할 점과 보충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앉아 있는 그 자리는 꽃자리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불러주시고 맡겨주신 소중한 자리이다. 하느님의 손길과 하느님의 현존은 육감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섭리해주심을 깨닫지 못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지난 과거의 삶과 지금 이 순간까지 어떻게 인생길을 걸어왔고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낱낱이 되새겨 보자. 그러면 어느 한 순간도 주님의 섭리와 가호가 없이 거져 이루어진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지난 삶을 깊이 반성하면 반성할 수록 자신의 인생길에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순간이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요한1,35-51을 전체적으로 보면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가 연속적인 사건으로 드러난다. 이 사건들을 통하여 부르심의 신학을 말해주고 있다. 모든 부르심은 하느님의 섭리이며 신적인 것이고 그 응답은 인간의 일이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 온 우리에게도 이 질문을 던지신다. 예비자들에게 입교 동기를 물어보면, 어떤 이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어떤 이는 주위 사람의 권고로... 어떤 이는 식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 어떤 이는 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어떤 이는 사업에 도움이 될까 해서... 어떤 이는 복을 받으려고.... 등등의 여러 가지 바라는 것들이 있어서 성당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의 인간적인 동기일 뿐, 근본적으로는 주님의 부르심이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나아오게 된 것이다.
마치 첫 제자들이 예수를 찾아온 이유가 각기 달랐던 것처럼(스승 세례자요한의 의 권유, 예수의 직접적인 부르심, 동료의 권유) 각기 다른 바라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하신다. 이처럼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께 “가서” 그분이 누구신지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와 “함께 머물러야” 한다.
신앙생활은 관객이 공연을 보는 것처럼 소극적으로 지켜보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예수와 함께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 일치되어야 한다. 믿음에 그쳐서는 안 된다. 믿음을 행동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으로 살아내면 진리를 체험하게 된다.
예수님의 부르심(성소)은 이상적인 사람(35절), 친척(41절), 동향인(44절), 친구(45절)을 통해서 온다. 즉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이 그들을 통해서 부르시는 것이다.
시몬 베드로를 꿰뚤어 보시는 그의 시선(42절), 필립보에게 하시는 그의 위엄있는 말씀(43절), 만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는 나타나엘에 대한 신비적인 관통력(47-48절)이 우리를 향해서도 지속된다. 예수님은 그렇게 똑같이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이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이하 생략.


(김춘수)



이 시를 이 단원에 맞게 조금 바꾸어보자.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예수님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
(예로니모)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이름을 주시고 우리를 불러주셨다. 요셉아! 엘리사벳아! 프란치스코야! 세라피나야!....
그러므로 우리는 “꽃”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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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언제나 처음처럼(예로니모)

http://www.mncatholic.or.kr/sub3/john/john_3.htm

편집:불광동성당 미디어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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