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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생활 속의 성경: 문(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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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6-16 조회수1,025 추천수0

[생활 속의 성경] 문(門) (1)

 

 

우리가 첫 번째로 돌아볼 집안의 장소는 도입부에서 언급한 바 있는 ‘문’이다. 가족 구성원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인 집에는 어떠한 문화권이든지 간에 문이 존재한다. 문은 안에서 밖으로 혹은 밖에서 안으로 출입하는 통로로, 누군가를 환대하는 곳이기도 또 누군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안과 밖을 구분하여 이를 드나들 수 있게 하는 문은 때때로 방어, 보호, 만남, 다른 이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선택의 장소가 된다.

 

열려 통하는 동시에 닫혀 제한을 나타내는 문의 의미는 비단 물리적인 부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 안에서, 문화 안에서, 종교 안에서 심지어 개인의 내적 상황에서도 익숙한 곳과 익숙하지 않은 곳, 안과 밖을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문이 있기 때문이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인 문은 다음과 같은 체험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문을 통과하기 위해 열쇠를 사용하는 것,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도록 두드리거나 초인종을 누르는 것, 방문자가 문 앞에 어떤 쪽지를 붙여 놓거나 집주인이 집을 소개하는 장식이나 패를 붙여 놓는 것, 잠겨진 문의 열쇠를 찾지 못해 허둥대는 것,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지 못해 문을 억지로 열거나 부수는 것, 누군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 등등이다.

 

이렇듯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상징인 ‘문’과 이것이 지닌 의미는 성경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창세기에서 노아는 방주를 만든다. 이때 그는 “노아 뒤로 문을 닫아”(창세 7,16) 홍수의 죽음에서 보호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한다. 하느님 품 안에서 사는 이들의 보호를 몸소 체험한 것이다. 탈출기에서는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명의 하느님을 체험한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이스라엘 집안과 이스라엘이 아닌 집안을 구분하였고 주님께서는 그 문설주의 표시를 보고 지나가셨다. 그렇게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탈출 12,22-24 참조).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서막이 되는 문설주의 피, 곧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을 구원하는 이 피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구원 신학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부활을 의미하는 단어인 ‘파스카(Pascha)’는 히브리어 ‘파사흐(Pasah)’에서 유래한다. 이는 ‘건너다’, ‘지나가다’, ‘통과하다’라는 의미이다. ‘파스카’ 어린양의 피는 문설주에 적셔져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보호’하였고 종의 상태에서 자유인의 상태로 ‘건너가게’ 하였다. 이날은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기억의 날이자 하느님의 보호하심이 드러난 축제의 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보호’하시고 해방의 열려진 문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분임을 체험했음에도 하느님의 ‘보호’에만 관심을 둔 나머지 문을 굳게 걸어 놓는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아갈 때 ‘보호’ 해 주시고, ‘해방’의 문을 통과하게 해 주신 분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문설주의 피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통해 ‘새로운 이집트 탈출’의 문이 되신다. 문이 히브리인들에게 해방의 표징이 되었듯이 예수님도 자신을 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요한 10,7 참조) 모든 이에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표징이 되신다. [2019년 5월 5일 부활 제3주일(생명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생활 속의 성경] 문(門) (2)

 

 

예수님께서는 문이자 목자시다. 이 이야기의 배경에는 팔레스타인 문화에 익숙한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곧, 양무리와 목자 사이를 잇는 특별한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관계는 임금과 백성의 관계에도 해당되며, 같은 맥락으로 하느님과 그분을 믿는 이들 사이도 여기에 속한다. 아브라함과 성조들은 목자들이었고 모세, 여호수아 그리고 다윗은 민족의 목자로 불렸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을 이끌었다. 목자의 삶은 양들에게 달렸고 양들의 삶은 목자에게 달렸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라고 소개하셨다. 착한 목자란 자신의 양들을 알고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이다. 반면 어떤 목자들은 양들을 죽게 만든다.

 

울타리에서 ‘보호’를 받는 어두운 밤의 시기를 지나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요한 8,12 참조)이 오심으로 날이 밝는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보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러 오셨다. 새로운 이집트 탈출을 시작하시기 위해 양우리에서 양들을 문 밖으로 내보내시고 생명의 풀을 먹도록 이끄신다. 밖으로의 여정이 양들에게 단지 외적인 변화를 주기 위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집트에서 떠나온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백성으로 탄생시키기 위함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문’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단지 이스라엘만을 위한 목자가 아닌 세상을 위한 구원자이시다. 또한 그분은 모든 사람을 가두려는, 마치 종들을 가두어놓는 그런 유일한 울타리가 되려 하지 않으신다. 모든 분리와 반목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이 자신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의 백성이 되길 원하신다.

 

양이 우리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같은 맥락으로 ‘문을 넘어섬’을 자유롭고 거침없이 택하려면 ‘부르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곧, ‘충실함’으로 어두운 시련의 시간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잊지 않고, ‘평범함’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보이지 않는 관계에서도 일상 안에 늘 존재하시는 목소리를 들으며, ‘굳건함’으로 우리가 합당치 못해도 아버지 하느님께 매달리는 믿음이 필요하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그분과 나누는 친교가 위기로 치닫게 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문 앞에서 항상 서 계시고 문을 두드리신다(사도 3,20 참조). 그분을 문 안으로 맞이하는 선물을 우리 각자가 받기는 했지만 그분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우리의 자유와 기회 속에 숨겨져 있다. 우리 역시 복음 안에 등장하는 친구(루카 11,7 참조)처럼 의심의 밤에 노크를 한다. 어려움의 밤, 필요의 밤에 문 앞에서 노크를 한다. 확실하게 그분은 거기에 계실 것이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2019년 6월 16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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