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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사랑의 승리(18,39-19,4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6,406 추천수0

[요한 복음서 해설] 사랑의 승리(18,39-19,42)

 

 

예수님이 죽어가는 것은 순전히 유다인들 탓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 했다.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18,38; 19,4.6), 파스카 축제 때 죄수 하나를 풀어 준다는 명확하지 않은 유다의 전통까지 언급하며 예수님을 풀어 주려 했다(18,39-40). 유다인들은 죄 없는 예수님을 죄 있다고 우겨 댔다. 예수님의 죽음은 억지의 결과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억지 주장의 근거는 신성모독이다. 유다 율법에 따르면 주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투석형에 처해진다(레위 24,16). 신명기 6,4-5이 말하는 유일한 하느님, 그분이 육화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유다인들은 거부했다. 예수님을 죽이려 덤벼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라 한낱 인간일 뿐이다. 유다인들의 억지는 하느님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이원론적 세계관과 이원론적 신앙관이 뼛속 깊이 스며든 결과다. 하느님은 이 더러운 세상에 올 수 없다는, 한계 지워지고 나약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논리는 이스라엘 역사 내내 유다 지도자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먹잇감이 되었다. 이를테면 사제 계급과 율법학자들은 유다 민중에게 하느님의 세상을 가르칠 때 자신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 세상을 구경하지 못한다는 논리를 펴들며 자신들의 계급적 우위를 유지했다. 대개의 민중은 죄의식 속에 살았고, 그 민중의 자리에조차 함께하지 못했던 병자와 죄인 등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악의 세력으로 간주되곤 했다. 하늘과 땅을 갈라놓고 그 사이에서 온갖 영화를 누렸던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은 겉으론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오시길 바라면서도 결코 오셔서는 안 된다는 속내를 숨긴 채 제 계급의 영속만을 갈구했던, 말 그대로 ‘위선자’였다.

 

역설적이게도 하늘의 세상과 땅의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는 자는, 이방인 빌라도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다인들에게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 이 사람이오”(19,5). 태초에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숨었다. 이른바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는 하느님과의 단절이었고, 사람은 스스로를 하느님의 세상에서 유폐시켰다. 빌라도는 지금 육화하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세상에 ‘사람’을 내놓는다. 사람 예수님은 태초에 갈라진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 놓고 있다.

 

빌라도는 또 한 번 예수님을 소개한다.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19,14). 유다 사회는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임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유다 사회의 참된 임금은 하느님이셨다(1사무 8장 참조).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다 사회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유다 사회와는 다른 세상을 이야기한다(18,36). 예수님이 말하는 세상은 예수님을 참된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예컨대 토마스의 신앙고백이 가능한 세상이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다인들에게 내놓으며 ‘여러분의 임금’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유다 사회의 회개를 부추기는 말이기도 하다. 참된 하느님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다스림에 함께할 것인지,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빌라도를 통해 유다 사회에 다시 한 번 묻고 있는 것이다.

 

유다인들의 답은 명확했다.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19,15). 수석 사제들을 통해 터져 나온 이 고백은 위선의 절정이다. 유다 민중에게는 하느님의 대리자로 자처하는 그들, 유다 민중을 대표해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전한다는 그들, 그들이 어떻게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로마 황제가 자신들의 임금이라고 고백한다. 제 위신과 체면과 권력과 명예를 위해서는 하느님마저 죽일 수 있는 인간의 무모함이 수석 사제들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이런 유다인들의 태도와 대비되게 예수님은 말없이, 힘없이 그저 자신의 목숨을 내맡긴다. 내맡기는 과정을 서술하기 위해 요한 복음의 저자는 시편 22편을 옮겨다 놓았다. 겉옷을 나누어 갖는 로마 군사들의 모습은 시편 22,19에서, 목마르다 절규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시편 22,16에서 옮겨 왔다.

 

시편 22편은 처절한 상황에 놓인 시편 저자가 오직 믿고 따를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신뢰의 고백을 소개하는 시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과정은 유다 사회가 그분을 거부한 결과라기보다 하느님에 대한 끝없는 신뢰를 보여 주는 예수님의 자기 봉헌이라는 사실을, 요한 복음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 봉헌, 바로 이 자리에서 교회는 탄생한다. 예수님은 죽어 가면서 어머니 마리아와 자신이 사랑한 제자를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 놓는다. 십자가 밑에서 새롭게 태어난 가족이 참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전형이다.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자기 봉헌이 신앙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존재의 이유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2장에 이어 지금 십자가 밑에서 두 번째로 나타난다. 다른 복음과 달리 마리아의 등장이 극히 절제되어 있는 요한 복음에서 마리아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초대 교회에서 공동체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마리아에게 ‘여인’이란 호칭은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요한 복음 2장에서 마리아는 일꾼들에게 예수님의 말을 따르도록 초대했다. 포도주가 부족한 결핍의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름으로 그 결핍을 채워 가게끔 이끄는 마리아의 태도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지녀야 할 삶의 덕목을 깨닫게 한다. 이런 마리아가 신뢰와 의탁의 상징인 십자가 밑에서 제자들의 어머니로, 교회의 어머니로 거듭난다.

 

예수님은 숨을 거두며 “다 이루어졌다”(19,30)라고 말한다. 유다인들의 억지로, 그들의 고발로 희생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 예수님은 스스로 이 세상을 향해 자신을 내던졌다. 예수님이 이룬 건, 이 세상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하겠다는 하느님의 의지다. 유다인들에게 억지 죽임을 당한 패배자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이 세상에 확연히 보여 준 승리자로서의 예수님이 지금 숨을 거두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사랑의 승리였다. 그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피는 예수님의 생명을 가리키고(6,53-56) 물은 새로운 삶을 가리킨다(3,5).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가리키는 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터져 나온 피와 물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피와 물을 예수님과 교회의 하나 됨으로 해석했고, 세례를 받는 모든 신앙인이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공유한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예수님은 묻힌다. 육화한 하느님이 인간 한계의 마지막 극단의 자리에 함께한다. 인간이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의 자리, 무덤에 예수님은 함께한다. 니코데모 역시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한다. 그는 예수님을 궁금해했으며 예수님을 옹호했고, 예수님의 행적을 더듬으며 따라왔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니코데모는 인간 한계의 끝, 바로 이 자리에서 멈춘다. 이후에 예수님은 부활할 것이다. 부활의 순간에 예수님을 진정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의 자리에 니코데모는 보이지 않는다. 니코데모는 주저하는 신앙인의 전형으로 남게 된다. 믿고는 싶으나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신앙인들, 예수님을 진정 존경하나 그를 신으로 고백하는 데 주저하는 이들, 그들의 모습이 니코데모로 분(扮)하여 등장한다. 예수님이 묻히는 것은 참으로 인간임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참으로 인간이, 죽음조차 비켜가지 못한 인간이 된 하느님이 참으로 인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예수님은 죽고 묻혔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일치의 사건이 되었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으로 성서 사목 중이며, 대중 강연 ·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9월호(통권 498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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