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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의 둘째 서간 (2) 그릇된 앎의 앙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802 추천수0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 베드로의 둘째 서간 (2) 그릇된 앎의 앙화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베드로의 둘째 서간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은총의 통로이며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덕성이라는 사실을 시작부터 강조한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오히려 앙화(殃禍)가 될 수도 있다. 그 앎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이다. 이번에 살펴볼 베드로의 둘째 서간 2장은 바로 그 잘못된 앎이 끼치는 해악이 어떤 것인지를 일러 주며, 그것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

 

당시의 공동체는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려는 이들이 거짓 교사들 때문에 그릇된 길로 빠져드는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 참 예언이 있는 곳에 거짓 예언도 있듯이, 참된 가르침이 있는 곳에는 그것을 훼손하려는 거짓 교사들도 있기 마련이다(2,1). 이제 막 참 진리의 길에 들어선 순수하고 열심한 이들이라면, 그들은 진리에 더 목말라하며 그에 관한 가르침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배우려는 이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참이라는 가면을 쓴 거짓된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거짓 교사들이 가져올 위험을 경고한다.

 

저자는 거짓 교사들의 행위를 세 가지로 묘사한다. 그들은 이단을 끌어들이고 주님을 부인하며 파멸을 초래한다(2,1). 이 세 가지는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이단’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하이레시스’의 기본 의미는 ‘선택’이다. 그런데 이 선택이 공동체의 뜻과 다를 때, 다른 선택을 한 이들은 파벌을 형성하고 공동체에서 갈라져 나와 이단이 된다. 다시 말해 이단이란 애초부터 특정 교파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기준을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단은 누구일까?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들이다. 즉 그들은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한 이들이다. 주님께서 진리의 근원이시며 참 생명을 주시는 분일진대, 그분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했다면 그들에게 닥칠 운명은 파멸뿐이다.

 

 

교만과 탐욕

 

진리의 길을 벗어나 다른 것을 선택한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이들의 특성을 교만과 탐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주권을 업신여기며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하는 자들이다(2,1.10). 교만한 이는 자신이 누군가의 은덕을 입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무슨 일이든 자신의 뜻대로만 하는 것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이들이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참된 가르침이 될 수 없다. 저자가 말하듯, 그들의 가르침은 “지어낸 말”(2,3)일 뿐이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별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취하되,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번거로움은 외면한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만, 실상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고 업신여긴다. 그들은 지어낸 말의 대가로 금전까지 요구하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구원 수단이 아닌 개인적인 탐욕의 충족, 착취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이는 천막 짜는 일을 하며 자신의 생계와 선교 비용을 조달했던 바오로 사도의 모범과는 크게 대조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엉뚱한 자유까지 약속하면서, 특히 참된 삶의 길로 갓 들어선 이들을 미혹시켰다(2,18-19). 주님을 이제 막 알게 된 이들의 열성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은 아직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이들이 가장 손쉬운 공격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거짓 교사들이 내세운 것은 무엇일까? 바로 ‘자유’다. 그리스도를 알고 따름으로써 그분의 종이 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사는 길이건만, 그들은 허황된 자유를 내세워 인간의 주인은 인간 자신이며 자신의 몸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란 실상 육체적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었으며, 그들이 누린 자유는 대낮의 술잔치, 간음, 방탕함이었다(2,13-14). 저자는 이들을 자기가 게운 것을 다시 먹고, 진창에 뒹구는 개와 돼지에 비유한다(2,22). 인간의 고귀한 자유를 짐승처럼 사는 데 사용하는 그들에게, 저자는 그들 역시 ‘저주받은 짐승의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2,12-13).

 

여기서 우리는 그릇된 앎의 앙화를 본다. 한때 주님을 알았던 사람들이 왜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됐을까? 그 앎이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주님이 누구이신지 진정으로 알아들었다면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분이 구원자이심을 부인한다면, 나아가 그분을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불완전하게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앎이 완전하다고 자만했기에, 그들은 그릇된 선택을 하고 심지어 ‘지어낸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올바른 길을 알면서도 그 길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몰랐던 것이 더 낫다고 단언한다. 모르고 저지른 잘못에는 변명의 여지라도 있지만, 알면서도 저지른 잘못에는 변명의 여지 없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은총과 평화로 들어서는 관문인 동시에 책임 있는 삶의 길로 나아가는 기초임을 잊지 말자. 한 번 입문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끊임없이 자신의 앎에 질문하며 깨어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와 동 대학교 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6월호(통권 495호), 강은희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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