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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아모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04 조회수6,811 추천수0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아모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4)

 

세상이 혼탁하던 시절 거리로 나서던 분들이 내건 성경 구절입니다. 아모스(‘짐을 지다’는 말에서 온 이름) 예언자, 그가 살던 시대 역시 우리 시대처럼 많은 문제들이 터지고 있었습니다. 어둠을 흔들어 새벽을 여는 목소리가 필요했기에 주님은 아모스를 부르셨습니다.

 

아모스는 이사야, 미카보다 앞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아모 1,1은 그에 대해 ‘트코아의 목양업자’라고 소개합니다. 트코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광야의 끝과 마주하는 곳이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구릉 사이의 골짜기와 그 앞에 펼쳐진 들판은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가축사료) 나무를 가꾸는 사람’(아모 7,14)에게는 최적의 땅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이곳은 이미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 시대에 요새가 들어섰습니다(2역대 11,5-12). ‘지휘관의 배치, 양식과 기름과 포도주의 저장, 큰 방패와 창의 구비’(2역대 11,11-12), 여호사팟 임금이 유다를 공격하는 모압과 암몬의 자손들을 ‘트코아 광야’에서 물리쳤다는 이야기(2역대 20장), 예루살렘에 위험을 알리는 나팔을 부는 장소로 트코아를 특정하는 것(예레 6,1) 등은 이곳이 군사 요새였음을 말해줍니다. 아모스가 농경문화와 관련된 용어들과 ‘주 만군의 하느님’(4,13; 5,14.15.16; 6,8.14) 같은 군사적 용어들을 같이 쓰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 왕국의 군사 요충지에 살던 이가 북왕국 이스라엘로 국경을 넘어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분명히 배척당하고 목숨의 위협을 받을 터인데, 그는 과감하게 그 상황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밀어댔을까요?

 

아모스가 말씀을 전한 시대는 유다 임금 우찌야(기원전 781-740)와 이스라엘 임금 예로보암(기원전 787-747)이 다스리던 때(아모 1,1)입니다. 기원전 8세기 전반기 이스라엘은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외국과의 무역으로 경제적으로 부흥하고 주변 국가들의 약화로 영토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번영의 이면에는 그늘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북왕국의 수도였던 티르차와 사마리아에 대한 고고학 발굴은 부유한 이들의 거주지 옆에 가난한 이들의 거주지가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귀족과 부자들이 경제적 풍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이들은 더 깊은 비참의 나락에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러한 사회적 불의에 대해 고발하는 말씀을 토했습니다.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길을 막는다.”(2,6ㄴ-7ㄱ; 8,4-6 참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착취와 폭력만이 아니었습니다. 매음(2,7ㄴ), 사제들의 부패와 타락(2,8), 폭력(3,9-10), 부정한 재판(5,10.12), 상인들의 속임수(8,5-6), 흥청망청하는 귀족들(6,1-7), 한 마디로 “공정을 쓴 흰죽으로 만들어 버리고 정의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자들”(5,7; 6,12참조)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것은 저만치 밀려났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이루신 역사, 곧 탈출과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을 차지하던 그 역사에 대한 망각(2,9-10; 3,1; 5,25; 9,7)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하느님을 잊은 이들이 바치는 제의와 축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결국 하느님은 아모스의 입을 통해 그들이 바치는 전례들을 거부하는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5,21) 그들의 제물과 찬가와 악기 연주까지 다 거부됩니다(5,22-23). 그리고 하느님은 직접 개입하실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는 재앙을 불러올 것이며(6,8-11; 8,9-14; 9,1-4.8-10), 성소들을 폐허로 만들 것입니다(5,4-7).

 

예언자는 그냥 이러한 말씀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께 이스라엘을 위해 간청하며 진노를 거두시길 청했습니다. “주 하느님, 제발 용서하여 주십시오. 야곱이 어떻게 견디어 내겠습니까? 그는 참으로 보잘것 없습니다.”(7,2.5)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위해 주님께 간청하고 돌아서서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그의 활동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반대로 그들은 그를 거부하고 내쳤습니다. 그는 반역자라고 고발되었고(7,10), 베텔 성소에서 쫓겨났습니다(7,12-13).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주님께 붙잡힌’(7,15 참조)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8,11)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둥처럼 울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3,8ㄴ)

 

그러나 끝내 이스라엘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시리아는 다시 힘을 얻고,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세르 3세는 제국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국제적 불안이 멀리서 다가오는 먹장구름처럼 커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 폭풍우를 견디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9.11-15).

 

예언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2,11-12; 3,3-8). 하느님은 벌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로 다시 다가오라고, 회개하라고 호소하시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아모스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여전히 불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뒤틀린 ‘정의와 공정’이 바로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 위해 먼저 움직여야 하는 이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신앙인들입니다.

 

[2019년 3월 3일 연중 제8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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