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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사야서 해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49,6)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352 추천수0

[이사야서 해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49,6)

 

 

이번에는 이사야서를 읽는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이 예언서에 등장하는 ‘주님의 종’의 입장에서 종의 노래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나를 부르시고 보내신다면 어떨까요? 나를 선택하시고 사람들에게 파견하시는 것은 좋은 일일까요? 내 삶은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파견하실 때는 아직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다 알지 못합니다. 이후에 겪을 일들을 다 안다면,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을까요? 그냥 하느님께 다른 사람을 찾으시라고, 나는 이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라고 하고 싶지는 않을까요?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49,1)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42,1-9)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당신 종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며 조용히 세상에 공정을 펼치는 임무를 맡은 그 종을 당신께서 친히 선택하셨음을 우리에게 선언하셨습니다. “섬들도” 그 종의 가르침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둘째 노래(49,1-7)에서는 종 자신이 먼 곳에 사는 민족들에게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49,1). 이 말을 들으면 바로 예레미야가 생각납니다(예레 1,5 참조). “빚어 만드셨다”(49,5)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에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아셨고 그를 당신 예언자로 택하셨습니다. 둘째 노래에서도 주님의 종은 예언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49,2) 만드셨다는 것은 그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사명을 받았음을 암시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 제2부를 읽고 있지만, 이 책의 첫 부분에서는(6장) 예언자가 부르심받을 때에, 하느님께서 예언자의 입술을 숯불로 정화하셨습니다. 지금 이 노래에 나오는 종은 어쩌면 제2이사야 자신일 수도 있겠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49,3)

 

그런데 다른 구절에서는 갑자기 하느님이 그 종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다(49,3). 이 노래에서 사용되는 여러 표현이 이사야서의 다른 부분들에서 이스라엘에 적용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41,8) 그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43,1). 하지만 종을 바로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종의 사명이 야곱 곧 이스라엘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49,5).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할 수는 없으니, 종은 이스라엘일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 노래에 나오는 ‘종’이 이스라엘의 일부, 참된 이스라엘을 지칭한다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충실한 이들이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하는 “민족들의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49,6).

 

이렇게 유보 조건을 둔다면 종이 이스라엘이라는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충실한 이스라엘이 주님의 종으로서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그들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49,4)

 

종이 그 사명을 수행하는 방식은 셋째와 넷째 노래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둘째 노래만 보아도 그 길이 평탄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헛수고만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힘을 다 썼는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심한 멸시를 받는 이, 민족들에게 경멸을 받는 이, 지배자의 종이 된 이”(49,7)입니다. 분명, 종의 사명은 그런 길을 거쳐 가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종이 이스라엘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 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민족들의 빛이 되고 하느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합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위대한 대제국을 세워 온 세상을 구원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멸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런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십니다. 죽은 줄 알았던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이 강하고 부유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아무 힘도 없는 민족이기에 그들을 일으키는 하느님의 영광이 빛납니다. 바로 이어지는 다음 단락의 제목이 “기적적인 귀향과 복구”이지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그 회복을 통해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49,3)라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가 들었던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언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세상의 모든 민족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 예언자는 환영을 받기보다는 실패와 좌절을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힘없는 종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50,5)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50,4-11)에 이르면, 부르심을 받은 종이 그 사명을 수행한 결과로 그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인지를 더 뚜렷이 보게 됩니다.

 

이 부분은 제2이사야 자신에 대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셨다는 것은 아마도 유배 중인 이스라엘에 위로의 말씀을 선포한 제2이사야의 사명을 지칭하는 듯합니다.

 

40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심판을 선고한 예언자들도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서도 종은, 하느님께서 선포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전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40,6)라고 하느님께 반문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 백성을 위한 예언자로 부르시는데, 그들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지친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자들처럼”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50,4). 듣지 않고서는 그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이들, 말씀을 전하러 가도 쳐다보지도 않을 이들에게 전할 말씀을 하느님께서 내 귀에 들려주십니다. 어떨까요? 사람들의 반응을 뻔히 예상할 수 있다면, 차라리 귀를 막은 채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예언자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답은 나와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50,5). 내가 스스로 귀를 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귀를 열어 주십니다. 그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부르심에 순응할 수 있게 하시는 것조차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모욕과 수모”(50,6)

 

그래도 종에게 돌아오는 것은 “모욕과 수모”(50,6), “소송”(50,8)입니다.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종은 사람들에게 고발당하여 결국 죽임까지 당합니다.

 

예언자가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 그와 반대로,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6).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사람들이 늘 좋아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내 말을 즐겨 듣는지 여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귀에 들려주신 말씀을 내가 그대로 전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그렇게 될 때 나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나를 의롭다 하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50,8). 그러나 거부와 박해는 결코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로 부르심은 어쩌면 인간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늘의 지혜》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7년 5월호(통권 494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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