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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창세기 인물 열전: 노아, 새 문명의 출발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9,585 추천수1

[창세기 인물 열전] 노아, 새 문명의 출발점

 

 

인간 세상은 카인과 라멕 그리고 그의 후손들을 거치며 점점 폭력으로 채워지게 되었다(2월 호 참조). 이 때문에 하느님은 사람을 만드신 일을 후회하셨다(6,6). 하느님의 감정이 ‘후회’라는 인간의 언어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 말은 조물주와 피조물들 사이의 평화가 깨졌음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로 보아야 한다. 망가진 세상을 바로잡으시려고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 이전의 상태, 곧 물로 덮여 있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셨다. 그리고 도시 문명을 주도했던 카인과 그의 후손들(4,17-24) 대신 셋의 후손이자 또 다른 라멕의 아들 노아(5,28-32)를 택하시어 새 세상의 출발점으로 삼으셨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다

 

한처음의 세상은 본디 물과 암흑이라는 혼돈에 싸여 있었다(1,2). 하느님은 빛을 창조하시어 암흑은 밤에만 나타나게 하시고, 궁창(하늘)을 만드시어 혼돈의 물은 하늘과 땅으로 갈라지게 하셨다(1,6-7). 지상의 물을 한곳으로 모아 바다가 되게 하셨기에,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은 뭍에서 번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좋았던 세상이 악에 물들자, 주님은 궁창을 열어 혼돈의 물이 세상을 도로 덮게 하셨다(7,6-24).

 

원점으로 되돌아간 세상에서 새 출발점으로 선택받은 이는 노아였다. 노아는 아담의 족보에서 ‘열’ 번째 인물이자 그의 9대손이다. ‘10’은 성경에서 3, 7과 함께 완전수로 여겨지는 숫자다. 게다가 아담이 구백삼십 년을 살고 세상을 떠난 뒤(5,5) 태어난 첫 후손이기에 노아는 ‘새 아담’과 같은 의미를 얻는다. 이는 아담의 죄 때문에 저주받은 땅(3,17)이 노아 시대에 저주에서 풀려나 휴식을 얻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5,29).

 

노아는 어떻게 주님의 선택을 받았을까? 일단 그는 동시대 사람들과 달리 의로운 사람이었다(6,9). 그리고 조상들과 달리, 그에게는 딸이 없었다. 오백 살 넘어 아들 삼 형제만 자식으로 얻었다. 이 때문에라도 노아는 홍수 이후 세상에서 새 출발점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6장 초반부에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인간의 딸들과 결합해 나필족을 낳기 때문이다. 나필족이 태어난 뒤 세상의 폭력이 심화되므로(6,1-6 참조), 그들이 정의로운 자들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성경은 노아에게 딸이 없었음을 밝혀, 그에게는 타락의 여지가 없었음을 분명히 한다.

 

노아는 의인으로 나오지만(6,9),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유다 전승이 이를 대신 전하고 있다. 일례로, 하느님이 명령하신 방주를 노아가 당장 만든 건 아니었다. 향백나무 씨를 뿌려서 그 씨가 큰 나무로 자랄 때까지 120년을 기다렸다. 인류의 멸망을 근심했기에, 혹시라도 사람들이 그동안 악에서 돌아서지 않을까 지켜보았다는 뜻이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저서 《유다 고대사》에는 노아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전승들에 따르면 노아는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이 닥쳤음을 알리는 역할을 했으므로, 그리스도의 예형이 된다(루카 17,26-27 참조). 종말적 재앙에서 살아남아 파멸의 위기에서 인류를 구하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끌어 낸 인물이기도 하다. 1베드 3,18-21은 노아가 물의 재앙을 극복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물로 받는 세례를 통해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새로운 세상을 시작할 수 있다고 풀이했다. 노아의 방주는 세상 속을 항해하는 교회를 상징한다. 물이 말랐는지 살피려고 노아가 날려 보낸 비둘기는 성령을 예표한다.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도 성령은 비둘기의 모습으로 물 위에 임하셨다.

 

 

새 문명의 개척자 노아

 

홍수 뒤 노아의 배가 안착한 곳은 아라랏 산이었다(8,4). 아라랏 산은 현재 터키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이란과 아르메니아 접경지대에 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가족은 아라랏 산 근처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포도 경작을 시작했는데(9,20), 아라랏 산 부근은 예부터 포도가 잘 자라던 곳이다. 노아가 경작한 ‘첫’ 작물이 포도였듯, 포도나무는 이후 민족들 가운데 하느님의 ‘맏’아들(탈출 4,22)이 될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징적인 나무가 된다(시편 80,9; 요한 15,1-17 참조). 또 하느님은 ‘포도원/포도나무 주인’에 비유된다(이사 5,1-7; 예레 2,21). 유다 전승은 노아가 쟁기와 낫, 도끼를 최초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이에 따르면 노아는 홍수 이후 문명을 개척한 선구자인 셈이다.

 

하지만 홍수 뒤에도 인간의 악한 본성은 사라지지 않았다(8,21). 노아의 작은 아들 함이 술에 취한 아버지를 추행해 저주받는 사건이 일어난다(9,21-25). 이 때문에 함의 후손 가나안은 셈(이스라엘의 조상)과 야펫(아나톨리아와 에게 문명의 조상)에게 지배당할 운명에 처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다음 가나안족을 쫓아내고 땅을 상속받았으며, 에게 해에서 이주해 들어온 필리스티아인들도 가나안의 남쪽 해안을 차지해 살기 시작했다.

 

* 김명숙 님은 예루살렘의 히브리대에서 구약학 석사 ·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루살렘의 홀리랜드대와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과 수도자 신학원에서 구약학 강의를 하였고,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이다.

 

[성서와 함께, 2017년 3월호(통권 492호),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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