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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9: 하느님을 증오하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6,017 추천수0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마지막 회) 하느님을 증오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15,18).

 

마지막 날 저녁에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권세를 떨칠”(루카 22,53) 다가오는 ‘밤’을 미리 보셨고, 어떤 두려움이 당신을 기다리는지 아셨다. 그런데 구원을 가져오시는 분이 어떻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가?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증오할 수 있는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을 증오할 수 있을까?

 

우리 마음에는 본래 자기 존재를 지배하는 근원적 법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주님,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 쉬기까지 어쩔 줄 몰라 하나이다”(《고백록》 1권 1장). 그러나 같은 마음에서 모순도 생긴다. 인간은 창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려 한다. 자신을 하느님의 손길에서 나온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존재, 영혼, 인격을 하느님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말도 못하는 자연의 원초적 근원에서 나와 자랐다고, 동물의 생명에서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간의 고집은 거룩한 근원의 법을 질식시킬 정도로 완고하며 돌처럼 굳어 있다. 결국 하느님을 증오하기에 이른다.

 

하느님께서 선하신 것은 분명하다. 깊이 숙고한다면 ‘진리’, ‘정의’, ‘사랑’, ‘순수’ 같은 말들이 근본적으로 그분을 가리키는 이름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말들은 사유의 결정적 힘을 통해 더없이 풍부하고 완전하며, 단순한 그분의 충만한 가치를 여러 윤리적 가치로 투영한다. 태양빛이 프리즘을 통해 다양한 색깔의 스펙트럼으로 분산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본래 그분의 영광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 영광 안에서 모든 가치의 총체가 영원한 실재로 존재한다.

 

한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하자. 누군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본다면, 그 사람을 특징짓는 답을 떠올릴 수 있다. 엄격하다든지 온화하다든지, 정의롭다든지 질투심이 많다든지, 의심이 많다든지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졌다든지….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해 이런 식으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 단순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감지한다. 그것은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존재가 보여 주는 특징은 어떤 개념과도 상응하지 않는다. 이 고유함이 하느님 안에도 있는데, 바로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우리 마음을 궁극적 경외와 고요로 데려가며, 이 거룩함에 의해 건드려지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내밀한 마음에서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흔적을 감지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하는가? 오히려 그분을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와 반대로 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니체가 “신은 나에게 맛이 느껴지게 다가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럽인은 세상을 가득 채운 무신론을 생각해 냈다. 하느님을 거역하려는 방자한 의지가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정말 증오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분은 박해받을 수 있을 뿐아니라, 사람들이 그분과 그분의 것을 세상에서 몰아내려고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증언하시는 분으로, 곧 하느님의 현현으로 세상에 계신다. 인간은 그 증언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인간은 사랑할 수도 있지만 차가운 마음을 지닐 수도 있으며, 나아가 증오할 수도 있다. 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은 증오에 이르기 전에 나타나는 마음의 징후를 느꼈을 것이다. 그분을 드러내 놓고 지지해야 할 때 당황하는 것이 이 징후에 속한다. 나아가 이 징후에는 불편한 심기와 분노와 저항 같은 감정도 있다. 이 감정은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모습이나 말씀 앞에서도 슬며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이 감정이 언제 증오로 변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의 반이 이 증오로 넘쳐 흐르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려면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겪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 특정한 체험을 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 체험을 통해 그분은 모든 것에 대한 척도로서 우리 의식 안으로 들어온다.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기도 하지만, 침묵 가운데 진지함이 될 수도 있고, 평온한 상태에서 애쓰는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이에게 사랑은 어떤 것을 드러내어 표명하고 싸우는 데서 표현된다. 다른 이들에게는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표현된다. 그들은 여가를 즐기는 대신 일하고, 자신을 위해 돈을 수중에 지니는 대신 다른 이들을 돕는 데 쓰며, 유혹에 굴복하는 대신 저항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데는 사람수만큼 많은 방법이 있다. 증오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사랑은 그리스도가 항상 중심에 계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랑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자 척도라는 것, ‘그분이 허락하시기 때문에’ 늘 그렇게 사랑이라는 생명의 행위를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섬광이나 은은한 열기와 같은 엄청난 사랑의 체험을 선물로 받은 이는 그 선물에 대해 감사하고, 이를 잘 보존하여 결실을 풍성히 맺게 해야 한다. 반면에 그러한 체험을 하지 못한 이는 일상의 삶을 진지하게 영위해야 한다. 이는 그분에 대해 알고 숙고하고,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이해하려 하고, 고통을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보편적 의미를 지닌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행위이다. 곧 모든 것은 바로 여기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분은 내 안에서 어떤 것이 서서히 자라고 있다고 신뢰하도록 해 주신다. 그것은 고요하고 맑고 진지하며 벅찬 위로를 준다.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느끼는 은총을 주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분에게 달렸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년) 신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신학자요 종교 철학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그의 책 《Johanneische Botschaft》(Herder, 1966)의 일부를 김형수 신부가 옮긴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3월호(통권 456호), 로마노 과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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