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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5: 세족례, 겸손하신 하느님의 마음으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927 추천수0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5) 세족례, 겸손하신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족례를 보도하는 요한 복음의 구절에서 ‘하느님의 겸손’은 신비로 가득차 있다. 아직 ‘하느님의 겸손’이 드러나지 않아 어둠에 묻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심으로 물으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요한 13,12) 그런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다. “아니요, 주님. 저희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신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지니셨는지를 보여 준다.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한없이 거룩한 생명으로 가득 차 계시며, 그토록 강한 주님으로 존재하는 분이시기에, 당신 영예 중 어떤 것도 손상하지 않은 채 유한한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좋은 상태로 있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물을 수 있다. 그 대답은 ‘하느님께서 계시다’이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이 사실만 중요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이 있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세상이 그분에게 중요하며, 언젠가 반드시 깊이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그리스도를 생각할 때)을 의미한다. 그분에게는 세상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분은 유한한 존재를 창조하신 뒤, 그 존재가 유한한 자유를 갖도록 원하셨다. 그러나 이 자유는 당신의 자유처럼 절대적 거룩함으로 보증되지 않고 악에 노출되어 있다. 악에 처한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 무엇을 했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신 창조에 아주 가까이 계신다. 심지어 그분은 악하게 될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 되시어 당신 피조물의 죄를 짊어지실 정도로 가까이 계신다. 그분은 볼품없이 떠돌아다니는 순회 설교자의 모습으로, 알려지지 않은 아주 작은 땅에 불과한 팔레스티나에 오셨다.

 

위대하실 뿐 아니라 우리 이성의 능력에 기반을 둔 모든 척도를 깨부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다. 이 하느님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행위를 통해 일어나는 사건에서 하느님을 이해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사건의 배후에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엄청난 ‘가치의 전도(顚倒)’가 일어난다. 이는 의기양양한 우리의 자부심이 초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만 가졌다고 자부하는 권력과 독창성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 하느님의 눈앞에서는 초라하기 짝이 없게 된다. 그분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이 일을 깨닫겠느냐?”

 

우리는 이 물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가 진정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쓰는 말 가운데 ‘겸손’에 해당하는 말이 없는 듯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지니신 마음가짐’이라는 말의 참된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드러나야 한다. 그다음에야 이 말의 참뜻이 구체화될 수 있는 말로 드러날 것이다. 이 말은 보잘것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리스어로 ‘겸손한 마음가짐’, 독일어로 ‘기꺼이 도와주려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 마음을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이 마음을 볼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숙고할 때에야 하느님께서 얼마나 모든 것을 심사숙고하여 헤아리시는지 분명해진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헤아리시는 마음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생각할 때, 대개 모든 위대함을 넘어서 있으며 영광 속에서 옥좌에 앉아 계신 분으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분도 당신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강조하여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요한 13,13). 이는 그분이 영원하신 성부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마태 28,18)은 분으로, 무엇이든 잘 알고 계시며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으신다. 따라서 그분 안에는 나약함도 두려움도 없다. 반면 ‘주님’으로 불리는 하느님 안에는 우리가 ‘겸손’이라는 말 말고 다른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마음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하느님 마음의 비밀은 겸손

 

하느님의 마음 안에 있는 겸손은 신비로 가득 찬 예수님의 행위에서 드러나며, “너는 이것을 이해하느냐?” 또는 “너는 교만에 가득 차 있지 않느냐?”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육체의 교만, 정신의 교만, 권력의 교만에 빠져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런 교만에 빠져 있다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에게 오신 분이 맨 처음에 “회개하라”, 곧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라”고 호소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우리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사려 깊게 숙고하라’는 뜻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 안에 무성하게 자란 덤불에 다가가서, 불손한 것과 왜곡된 것과 초라한 것을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지만 사실 거짓으로 꾸며진 오만함을 치워 버려야 한다. 이는 결국 겸손이라 불리는 진리를 배우기 시작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신 그 마음과 같은 마음을 지니라’(필리 2,5 참조)고 바오로 사도가 촉구했을 때 의미한, 바로 그 겸손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강하게 이끌어 주신다.

 

*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년) 신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신학자요 종교 철학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그의 책 《Johanneische Botschaft》(Herder, 1966)의 일부를 김형수 신부가 옮긴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로마노 과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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