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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1: 마지막 날 스승이 남긴 뜻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6,171 추천수0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1) 마지막 날 스승이 남긴 뜻은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지상의 삶을 마무리하기 전날 저녁,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했던 중요한 만찬을 여러 번 보도한다. 네 복음서(마태 26,17-30; 마르 14,18-26; 루카 22,7-38; 요한 13,1-17.26 참조)와 코린토 1서(11,17-34 참조)에서 그 만찬을 보도한다. 이 다섯 번의 만찬 보도는 유사점과 함께, 뚜렷한 차이점도 보인다.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 자체를 넘어, 이 성찬례가 내포하는 종말론적 성격까지 다룬다(이 점에 관해서는 마태 26,26 이하 참조). 반면 공관 복음서의 저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예수님의 마지막 삶과 연결해서 이해하며, 이 만찬을 파스카 축제와 연결하여 보도한다. 그들이 서술한 내용에는 ‘성찬례 제정 장면’과 ‘유다의 배반’이 함께 등장한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내용은 공관 복음과 다소 차이가 있다. 요한 복음에는 성찬 제정문에 나오는 ‘주님을 기억하라’는 명령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카파르나움에서 성찬례에 관해 약속하는 말씀이 나오는 6장에서 이 점을 언급한다(요한 6,22-71 참조). 반면에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요한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세족례’와 ‘유다의 배반’이다. 또 요한 복음에만 나오는 고별 담화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통해, 당신의 파견과 운명을 통해 무엇을 의식하셨는가 하는 점이 드러난다. 요한은 대가(大家)의 입장에서 보도 전체를 기술한다. 다시 말해 요한은 구체적 사건과 그 사건을 거치면서 갖는 영적 상태를 신적 의미와 연결시켜, 직접 일어나는 현재를 저편으로 향하게끔 촘촘히 엮어 준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몇 가지 사건과 말씀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자.

 

 

두 스승이 보낸 삶의 마지막 저녁

 

요한 복음에 나오는 본문의 말씀을 다루기 전에 먼저 세계 정신사의 두 가지 사건을 떠올려 보자. 이 두 사건은 겉으로 보면 요한 복음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요한 복음과 마찬가지로, 두 사건은 두 명의 영적 스승(붓다, 소크라테스)이 죽음을 앞둔 자리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유언하는 장면이다. 두 스승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제자들에게 나눠 준다. 하지만 그 두 사건을 요한 복음과 비교해 보면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 차이점에서 요한 복음이 말하는 고유한 점을 살펴볼 수 있다.

 

두 가지 사건 가운데 하나는 복음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건은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석가모니)가 임종 전에 제자들과 함께 모여 그들에게 전해 준 말이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너희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만 충실할 것이며, 다른 것에는 집착하지 마라! 너희는 홀로 살아갈 것이며, 너희 각자가 스스로 얻게 된 깨달음과 다짐한 결정을 따라야지, 스승의 가르침에 매이지 마라. 스승이 떠나면 결국 너희 각자는 자신의 의지력으로 모든 것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어떤 것도….”

 

두 번째 사건은 붓다가 죽은 뒤 100년 뒤에 일어난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생애 마지막 날에 있었던 일이다. 해가 지면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받아마셔야 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아침부터 감옥에 와서 온종일 스승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그는 제자들과 토론하였고, 자신이 정신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는지 설명했다. 더불어 확신을 가지고 죽음을 맞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증언했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육체적 죽음은 오히려 본래의 것으로 돌아가는 통로가 될 것이며, 본래의 것은 정신이 인식함으로써 또 좋은 것을 행함으로써 얻게 되는,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이다. 하지만 각자는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각자는 자신의 양심을, 고유하고 성숙된 정신의 능력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 그분은?

 

이제 세 번째 사건인 요한 복음의 고별 장면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이 사건 역시 스승이 자신의 제자들과 마지막 날을 보내는 이야기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스승과 함께 한없이 충만하게 보낸 시간이 드디어 마지막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작별하는 그 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주하고 계셨다. 그분은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하느님이 바로 당신의 아버지라는 의식을 지니고 계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인물로서 그들에게 말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원에서 오는 전권을 지니고, 스승이며 주님으로서 제자들에게 말했다(요한 13,13 참조). 그분만 홀로 알고 있으며 행할 수 있기에, 그분은 당신에 관해 “나는 길이다”(요한 14,6 참조)고 말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질문, 곧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알려 주신다. 이 점을 우리는 인간의 단순한 본성으로 알 수 없다. 예수님만 이 점을 의식하셨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의 품 안에”(요한 1,18), 곧 삼위일체 공동체의 영원한 내면에서 사신다고 말한다. 바로 이 점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의 의미를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셨다. 신약성경에서 ‘사랑’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일종의 신비스러운 말이다. 이 사랑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단순히 아주 친근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심연에서 우리 인간을 당신의 ‘마음’ 가까이에 있도록 결정하시어, 하느님의 이 마음은 역사에서 예수님의 운명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설명해 준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오셨다. 복음에서 예수님에 대해 보도하는 첫 번째 말씀은 다음과 같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 ‘나라’는 단순한 가르침이나 윤리가 아니라, 이 나라가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정말 가까이 계시며, 이것은 숨을 쉬는 것을 비롯한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느님의 의지 안에 있다는 뜻이다.

 

복음을 듣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이 현실성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말할 수 없다. 복음을 듣는 이들이 그 나라를 다가오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성령 강림으로 일어난 사건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깨닫게 해 준다.

 

*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년) 신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신학자요 종교 철학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그의 책 《Johanneische Botschaft》(Herder, 1966)의 일부를 김형수 신부가 옮긴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로마노 과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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