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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이성만으로 논증된 성경? -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6,188 추천수0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이성만으로 논증된 성경?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이런 주장과 비슷한 논조가 담긴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엄청난 반향을 얻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큰 시대에 살고 있다. 종교에 관한 언론 보도는 대부분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종교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무신론자들이나 종교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성경은 아무런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 종교를 거부하는 현대인들은 인간 이성, 특히 자연과학의 성과나 가능성만을 신뢰한다.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닌 그리스도교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이들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 종교에 대한 실망감으로 성경에 담겨 있는 구원의 진리를 믿지 않고, 마음의 빗장을 닫아건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단서를 주는 멘토가 있다. 바로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이다.

 

 

안셀무스의 성장 배경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여러 유명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059년 노르망디 지방의 베크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들어가 공부했다. 당시 베크 수도원의 원장은 지나치게 이성을 강조하던 변증론자 베렌가리우스를 논쟁에서 무찔러 명성을 얻은 란프랑쿠스였다. 106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안셀무스는 베네딕도 수도원의 수사가 되어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수도원의 엄격한 훈련과 더불어 문법학과 논리학 등의 정규 과정을 배우는 한편, 수도원 도서관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에티우스를 포함한 다양한 학자들의 책을 섭렵하였다. 1067년에는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어 제자인 동료 수사들을 위해 많은 작품을 썼고, 윤리와 종교 교육에 힘씀으로써 베크 수도원 학교를 유럽 최고의 학교로 발전시켰다.

 

 

이성만으로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모놀로기온》

 

안셀무스가 최초로 쓴 저서인 《모놀로기온(Monologion, 독어록獨語錄》(1077)의 서문에는 집필 동기가 언급되어 있다. 제자들은 스승 안셀무스에게 성경의 권위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는 ‘신에 관한 모범적 명상록’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은 이미 달라진 베크 수도원 학교의 학문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과거 그리스도교에서는 성경이 항상 신앙과 신학을 위한 첫째 원천이었다. 서구 신학의 최고봉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도 성경에 근거를 둔 논증을 이성에 근거를 둔 논증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러나 이성만을 강조하던 변증론자와 신앙만을 강조하던 반변증론자 사이의 격렬한 논쟁이 교회의 권위에 의해 성급하게 종료된 이후(<성서와함께> 7월호 참조), 수도원 학교의 젊은 학생들은 성경의 권위에만 의존한 논증을 기피하고 있었다.

 

안셀무스는 제자들의 요청이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거절했지만, 요청이 반복되자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놀로기온》에서 성경 및 전통, 교부들의 학설을 배제하고 오직 합리적인 방식만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의 외형만 보면, 안셀무스는 란프랑쿠스의 제자가 아니라 반변증론자인 베렌가리우스의 제자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이렇게 성경에 근거를 둔 논증과 이성적인 논증을 철저히 분리하고 단지 이성 논증에만 근거해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려 시도한 것은 안셀무스가 처음이었다. 이것은 매우 과감한 시도였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안셀무스가 여러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책이 필사되어 회람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반변증론자들은 이 책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평생 사제지간의 정을 유지하던 캔터베리의 대주교 란프랑쿠스도 크게 실망했다. 제목을 지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이 책을 받았을 때, 란프랑쿠스는 옛 제자 안셀무스에게 동일한 내용을 풍부한 성경 인용을 바탕으로 다시 쓰도록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나를 새로운 것에 대해 자신만만해하거나 거짓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여겨 곧바로 마구 비난하지 말고, 먼저 이미 설명한 스승 아우구스티누스의 책 《삼위일체론》을 주의 깊게 통찰한 다음 그것에 따라 나의 작품을 판단해 달라는 것이다”(《모놀로기온》, 머리말).

 

 

안셀무스가 성경을 배제한 이유

 

그렇다면 안셀무스는 왜 계시의 원천인 성경을 배제하려고 했을까? 그는 결코 이성만을 중시했던 변증론자들처럼 성경을 무시할 의도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이성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서 이런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안셀무스는 《모놀로기온》에서 20개 정도의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그렇지만 그 구절들을 결정적인 증명 도구로 도입한 것이 아니다. 오직 사변적인 길을 통해 얻은 결과들이 성경의 어구들과 일치하고 있음을 보임으로써 자연스럽게 성경을 변호하려 했던 것이다. 안셀무스는 자신의 신앙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것을 하나하나 단순한 이성적 숙고로써 얻어 내려고 노력했다. 이를 통해 비신앙인들을 논박하는 동시에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의 합리성을 통찰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주려했다. 그는 이러한 계획을 《모놀로기온》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학문적인 정교함으로 실현했다.

 

자신의 의도를 타당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안셀무스는 어떤 것도, 심지어 하느님의 존재마저도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출발했다. 그는 비신앙인에게도 계시의 도움 없이 신앙의 진리에 대해 매우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모든 이에게 “자기 스스로 오직 이성만으로 확신하도록”(《모놀로기온》, 제1장) 요청했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의 진리를 계시해 주신 하느님과 인간에게 이성을 선물해 주신 하느님이 동일한 분이라는 믿음에서 나왔다.

 

안셀무스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의 이성만으로 성경의 신비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여전히 강한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한 답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비의 근간이 되는 육화의 이유를 다룬 그의 책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를 통해 다음 호에서 찾아보겠다.

 

* 박승찬 님은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중세철학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8월호(통권 485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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