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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탈출기 말씀 피정7: 덤불 속에 사시는 하느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6,390 추천수0

탈출기 말씀 피정 (7) 덤불 속에 사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때가 되자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 이번 호에서는 탈출기에서 아름다운 대목 가운데 하나인 ‘불타는 떨기나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2,23)

 

이 말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그 많은 날들이 있은 뒤’입니다. ‘그 많은 날들’이라는 표현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모세는 치포라와 혼인하여 아이를 낳은 뒤, ‘게르솜’이라고 부릅니다(2,22 참조). 이는 ‘내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구나’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많은 날들’은 모세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서 많은 날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압축한 표현입니다.

 

스테파노는 ‘사십 년이 다 찼을 때’ 천사가 떨기나무 불길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났다고 전합니다(사도 7,30 참조). 여기서 볼 수 있듯 ‘그 많은 날들이 있은 뒤’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기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나그네살이도 어느 정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니, ‘오랜 세월이 지난 뒤’라는 표현은 희망이 가득 찬 느낌을 줍니다.

 

모세만 타향살이를 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시 이집트 땅에서 억압받으며 나그네살이를 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나그네살이를 접을 때가 되었나 봅니다. 하느님께서 드디어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고자 모세를 찾아오십니다. 신약성경의 표현대로,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집트 임금이 죽었다

 

탈출기 시작 부분을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임금이 등장하면서, 편안히 살던 이스라엘이 힘든 처지에 놓입니다. 이집트 임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 노역을 시키면서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했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임금은 기원전 13세기경의 라메세스 2세인 것으로 보입니다. 라메세스 2세는 무려 67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대단히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이러한 통치자의 죽음은 이스라엘에게 크나큰 기회로 다가왔을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습니다. 이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십사고 말입니다.

 

 

백성이 탄식하고 부르짖다

 

모세 오경에서 백성이 탄식하고 부르짖었다는 말은 탈출 2,23에만 나옵니다. 이 표현은 예언서에 자주 나옵니다. 곧 유다인이 전기 예언서로 분류하는 판관기와 사무엘기, 후기 예언서로 분류하는 예레미야서와 에제키엘서 등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이민족에게 고통을 겪다가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 하느님께 보인 반응입니다. 그런 까닭에 2,23에서도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이 드디어 하느님을 기억해 내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백성의 탄식과 부르짖음으로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드디어 때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 들어오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본래 당신이 계획하고 성조들에게 약속하신 그 일을 시작하십니다.

 

잠깐! 탈출기 이야기의 역사적 근거는?

 

라메세스 2세의 아들인 메르네프타는 주변 나라들을 평정한 다음 전승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이스라엘이 언급됩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아직 완전한 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판관기 시대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이미 밝힌 바 있듯, 탈출기에서는 역사적 근거를 가진 자료가 제법 많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탈출기는 역사상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 주려는 역사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고 이끌어 오셨는지를 전해 주는 이야기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공동으로 체험한 사건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가 글로 엮은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글자 그대로를 역사적 진실로 여기다 보면, 성경을 잘못 이해할 수 있음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거기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때문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겠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8항 참조).

 

 

불모의 산, 하느님의 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억하셨을 때,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양 떼를 몰고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갑니다. 야곱이 하느님의 집인 줄도 모르고 베텔에 누워 잠을 잤듯이(창세 28,10-22 참조), 모세 역시 그 산이 하느님의 산인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은 나중에 천사가 모세에게 알려 줍니다(3,6 참조). 성경에서 ‘시나이 산’으로도 불리는 이 산은 앞으로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게 될 산입니다. 여기서 ‘호렙’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황량한 곳, 불모지’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산 이름이 불모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는 이처럼 역설의 뜻을 지닌 단어가 제법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계시하다(갈라)’와 ‘유배(힉걸라)’라는 단어가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계시’란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을 열어 알려 준다’는 말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 줄기 빛이 나아갈 바를 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계시하다’는 말은 ‘열어젖히다’는 의미의 ‘갈라’에서 나온 말인데, ‘갈라’라는 말에서 ‘유배되다(힉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를 거치면서 비로소 하느님을 온전히 찾고 갈망했기 때문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 생활에서 비로소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글로 옮겨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의 틀을 갖춥니다.

 

이런 역설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로 광야를 뜻하는 ‘믿더바르’도 있습니다. 광야는 어려움과 고통이 가득 찬 곳인데, 이 단어가 ‘다바르’ 곧 ‘말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사막)에서 비로소 하느님을 찾고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일까요? ‘호렙(불모지)’, ‘힉걸라(유배되다)’, ‘믿더바르(광야)’ 모두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탈출-광야-유배 생활에서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주님의 등장

 

아무것도 모른 채 주님의 산으로 오른 모세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천사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올라오는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납니다. 구약성경에서 주님의 천사는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존재이지만, 대개 하느님과 동일한 인물로 묘사되곤 합니다. 3,2에서도 주님의 천사가 등장하는데, 3,4에서 모세에게 말을 건네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이처럼 주님의 천사와 주님이 번갈아 등장인물과 대화를 나누는 대목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판관 6장 참조). 성경 저자에게 이 점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주님의 천사가 전하는 말은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이한 현상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 불꽃은 하느님의 등장 장면에서 자주 사용되는 현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실 때 쪼개어 놓은 제물 사이를 타오르는 횃불 모습으로 지나가셨고(창세 15,17 참조), 불기둥의 모습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탈출 13,21-22; 민수 14,14 등 참조). 천사가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것도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온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타지 않는 떨기나무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불꽃이 떨기나무를 태워 버리지 않습니다. 떨기나무란 무엇일까요? 떨기나무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서네’입니다. 이 단어는 신명 33,16에 다시 나오는데, 여기서는 ‘주님’을 ‘서네’, 곧 ‘덤불’ 속에 사시는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덤불이 바로 떨기나무입니다. ‘서네’는 오늘날 시나이 광야에 가면 볼 수 있는 식물입니다. 시나이 산 위에 자리한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정원 한 쪽에는 떨기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라기보다 덤불이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작은 잎이 무성하고 가지가 매우 얇아 불꽃만 닿아도 다 타버릴 것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많은 나무 중에 덤불 속에 사시는 걸까? 어떤 분들은 ‘서네’와 ‘시나이’가 유사하기 때문에 이 단어가 ‘시나이’에서 온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떨기나무가 불에 약한 사막의 식물이라고 한다면, 덤불(떨기나무) 속에 사시는 하느님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광야와 불모지에 사시면서 유배 때 만나게 되는 하느님을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타 버릴 것 같은 떨기나무, 어찌 보면 그 나무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상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타 버릴 것 같으면서도 타지 않는 덤불인 떨기나무, 그 안에 사시는 하느님. 광야 여정을 통해 지칠대로 지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반드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실 것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속에 사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염철호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이야기》(공역) 등이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7월호(통권 460호), 염철호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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