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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소예언서 읽기: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969 추천수0

[소예언서 읽기]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

 

 

이 글을 읽기 시작하면 짙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됩니다. 제2즈카르야서는 온통 희미한데, 그 속에서 메시아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주요 대목에서 인용됩니다.

 

 

“신탁”(9,1; 12,1)

 

지난달에 제1즈카르야서(1-8장)와 제2즈카르야서(9-14장)가 구분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9-14장을 쓴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9장을 시작하는 말은 그저 “신탁”이라는 단언입니다. 그 “신탁”이라는 제목이 12,1에 다시 나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서 다음에 나오는 말라키서를 시작하는 첫마디가 또 “신탁”입니다. 그래서 근래의 연구에서는, 열두 소예언서가 하나의 모음집으로 편집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신탁”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9-11장과 12-14장, 그리고 역시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말라키서가 마지막에 덧붙여졌으리라 생각합니다. 말라키서로 예언서가 모두 끝나게 됩니다.

 

저술 연대를 추정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 9,1-8에서 티로, 시돈, 필리스티아의 파괴를 말하는 점과 특히 9,13에 “그리스”가 언급되는 점 등을 들어 기원전 332-300년경에 작성되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때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주변의 여러 민족을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9,9)

 

제2즈카르야서에서 특별한 부분은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본문입니다. 그렇다고 메시아의 모습이 체계 있게 제시되는 것은 아니고, 분명히 규정할 수 없는 메시아의 표상이 단편적으로 제시됩니다.

 

그중 첫 본문이 9,9-10입니다. 잘 아시는 본문입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9,9). 여기까지 보면 오시는 분은 임금으로, 군왕 메시아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본문은 겸손한 메시아, 전쟁을 없애고 평화를 선포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9,9).

 

그런데 이 구절에는 번역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승리하시는”이라고 옮겨진 부분이 히브리어 본문에서 “구원된”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칠십인역의 그리스어 본문에는 능동태로 번역된 “구원하는”이고,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들도 대개 칠십인역을 따라 본문을 수정하여 “구원하는, 승리하는”입니다.

 

근래에 이 구절을 다시 히브리어 본문의 “구원된”으로 둘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수의 의견은 아니지만, 그들에 따르면 메시아는 스스로 승리를 거두기 전에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나는 것이 있지요. 예수님의 부활이 하느님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일으켜지는’ 사건이었다는 면입니다(물론 능동적으로 ‘일어났다’고 말하는 본문도 있습니다). 메시아는 구원자가 되기 전에 ‘구원받음’의 원형이 되어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이가 구원의 실현을 믿고 기다리게 합니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9,9).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9,1-8에서 묘사하는 티로, 시돈, 필리스티아의 멸망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을 가리킨다면, 9,9-10에 나타나는 메시아의 모습은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그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J. 블렌킨솝). 정복자 임금은 말을 타고 옵니다. 쉽게 표현하면, 임금이 말을 타고 오는 것은 탱크를 타고 오는 것이고, 나귀를 타고 오는 것은 평범한 교통수단을 타고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시는 메시아는 이스라엘에서 병거와 군마를 없애시고 여러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실 것입니다(9,10 참조). 그분의 평화로운 통치는 땅 끝까지 이를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마태 21,5).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줄 강력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도, 지금 예루살렘에 오시는 분은 무장을 하고 오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고 구원되신 후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룩할 분이셨습니다.

 

 

“이 땅에 한 목자를 세우겠다”(11,16)

 

다른 두 본문은 간략하게 언급하겠습니다.

 

먼저 11,4-17에서 목자의 모습이 제시됩니다. 이 본문은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를 담고 있으며 본문 자체의 내용이 일관되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도대체 여기 나오는 목자가 누구인지 오락가락합니다. 처음에 예언자가 주님의 명으로 목자가 되지만, 나중에 주님이 목자의 위치에 서기도 하는 등 인물을 규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이 하느님께서 목자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에제 34장과 연결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에제 34장에서 하느님께서는 때로는 당신께서 보내 주실 목자를 말씀하시고, 때로는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에제 34,11 참조)고 다짐하십니다.

 

어쨌든 11장의 본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언자 또는 하느님은 양들을 돌보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게 끝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양 떼를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고 하시며, 양들이 서로 잡아먹게 내버려 두십니다. ‘호의’와 ‘일치’라는 이름이 붙은 지팡이들은 부러지고,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과 맺으신 계약도 깨지며, 유다와 이스라엘의 형제 관계도 깨지고 맙니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양 떼를 저버리는 목자들에게는 불행이 선언되고, 하느님께서는 “이제 내가 이 땅에 한 목자를 세우겠다”(11,16)고 약속하십니다.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12,10)

 

마지막으로 12,7-13,9에서 칼에 찔린 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본문은 앞의 두 본문보다 이해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12,10을 글자 그대로 읽는다면, 하느님께서 “나를, 곧 자기들이 찌른 이를”이라고 말씀하시어 사람들이 하느님을 찔렀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를 위하여 곡하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찔려 죽은 이’가 누구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주민들 위에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영이 내려지며(12,10 참조), 그들은 정화됩니다.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 경우(이사 52,13-53,12 참조)와 비슷하게, 그의 고통과 죽음이 결국 온 민족의 구원을 가져옵니다. 이 세 번째 본문은 마태 26,31과 요한 19,37 등 예수님의 수난사화에서 인용됩니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마태 26,31; 참조 즈카 13,7).

 

이와 같이 제2즈카르야가 제시하는 메시아의 모습은 모호하며 본문 사이에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구약성경이 보여 주는 메시아 상像의 새로운 요소가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거부와 박해를 받으며 죽임을 당하고 그 죽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평화로운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이는 분명 신약성경의 메시아에 매우 근접해 있습니다.

 

이전의 목자들은 양 떼를 끝까지 돌보지 못했고 양 떼는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를 이룩할 메시아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서 전체는 새 시대의 희망을 말하는 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이미 황폐해진 다음에야 구원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기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겸손한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찔려 죽은 이’를 보고 애통해하며 은총과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새 목자를 세우실 때에, 그 목자를 알아보고 따라가는 양 떼가 되어야 합니다. 제2즈카르야는 양들이 그 목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야말로 구원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5년 8월호(통권 473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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