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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사야서 해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9,5)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6,918 추천수0

[이사야서 해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9,5)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가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임시정부 시절에 사용된 것은 분명합니다.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불렀을 애국가는, 80년대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고 끝날 때 흘러나왔던 애국가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을 것입니다. 독립군들이 불렀을 애국가! 지금 우리에게 없는, 그러나 있어야 할 어떤 것을 노래하는 비장함이 느껴지지요. 그런데 저는, 이사 8,23-9,6의 ‘태어난 아기’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면 그런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왜 그럴까요?

 

 

“한 아기가 태어났고”(9,5)

 

8,23-9,6과 11,1-9은 7장의 임마누엘 예언에 이어지는 것으로서, 훌륭한 임금에 대한 기대를 표현합니다. 앞서 7,14의 임마누엘이 일차적으로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를 가리켰던 것처럼, 이 본문들도 가장 먼저 히즈키야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런데 그 “평화의 군왕”(9,5)이 다스리는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8,23)라는 구절을 보면,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공격에 시달리던 때를 나타내는 듯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 영화롭게 되리이다”(8,23)라고 하니, 아직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9,5에 따르면 그 아기는 태어났고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장차 임금이 될 그 아기가 태어났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7,14)라고 했었지요. 그 표징이 이제 주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더 가능성이 큰 것은, 지금 임금이 즉위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9,5에 임금의 여러 호칭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주변 문화에서는 임금이 즉위할 때, 그에게 여러 호칭을 부여하곤 했습니다.

 

아기가 태어났다는 표현도 임금의 즉위를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을 군왕 시편인 시편 2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는 하느님께서 “내가 나의 임금을 세웠노라!”(시편 2,6) 하고 선포하시므로 임금의 즉위를 위한 시편이라고 여겨지는데, 여기서 하느님은 그 임금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하고 말씀하십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의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신의 아들로 간주되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임금이 즉위하는 때가 그가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사야서의 이 본문을 임금의 즉위라는 맥락에서 읽으려고 합니다.

 

 

“평화의 군왕”(9,5)

 

그 임금에게 주어지는 호칭들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9,5에는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9,5)이라는 이름들이 언급됩니다. “놀라운 경륜가”는 한 마디씩 번역하면 ‘놀라움의 기획자’입니다. 이 말은 ‘놀라운 기획자’라고 이해할 수도 있고 ‘놀라운 일을 기획하는 자’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용맹한 하느님”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호칭을 임금에게 적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21에서는 같은 표현이 하느님께 적용됩니다(“용맹하신 하느님”으로 번역됨).

 

하느님의 호칭이 사람들의 이름으로 쓰이는 예는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시편 45,7에서는 임금에게 “오, 하느님 같으신 분!”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도 번역을 다듬은 것일 뿐 원문은 “하느님!”입니다. “영원한 아버지”도 현대인의 감각에는 과도하게 보일 수 있지만, 본래의 의미는 임금이 백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평화의 군왕”이라는 호칭도 난점이 있기는 합니다. ‘군왕’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사실 임금을 뜻하지 않고 고위 관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장차 올 메시아 임금을 ‘평화의 임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평화는 그 임금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이 호칭들은 과연 얼마나 현실적일까요? 다윗 왕조의 임금들 가운데 히즈키야가 ‘비교적’ 훌륭한 임금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임금으로 즉위할 때 이러한 이름들을 그에게 붙여 주었다면, 그의 임기 말엽에는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사야 예언자 또한, 아시리아군이 쳐들어올 때 이집트에 의지하려 하고(31장) 나중에는 바빌론과도 손을 잡아 보려 했던(39장) 히즈키야를 꾸짖을 것입니다.

 

이제 9,5의 호칭들을 읽을 때에 느껴지는 비장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비장함은, 히즈키야든 누구든 다윗 왕조의 어느 임금도 이러한 호칭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했다는 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호칭들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느낍니다.

 

 

“그의 왕권은 강대하고”(9,6)

 

이제 그 임금의 통치에 대한 묘사를 좀 더 살펴봅시다.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영원한 왕권과 평화입니다.

 

그는 다윗의 왕좌에서 강대한 왕권을 행사할 것이며,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 왕국을 굳게 지켜 갈 것입니다(9,6 참조). 이 내용은 2사무 7장에 전해지는 나탄의 예언에 가깝습니다. 다윗이 하느님께 집(성전)을 지어 드리려고 했을 때, 하느님은 오히려 당신께서 그에게 영원한 집(왕조)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나탄의 이 예언은 구약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본문입니다. 메시아 사상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조가 건재한 동안 이 예언이 왕조를 지탱하는 신학적 기반이 될 수 있었다면, 왕조가 무너진 다음에 이 예언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이들에게 희망의 근거가 됩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졌어도 하느님의 약속은 무너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다윗의 후손’에 대한 기다림이 싹틉니다.

 

이사야서의 예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9,6)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 왕조는 언젠가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면 이 선포는 우리에게 다시 기다림을 남길 것입니다.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9,6)

 

그 임금의 통치에서 두 번째 특징은 평화입니다. 평화라는 주제는 이 본문에서 매우 중시됩니다. 그 시대에는 “땅을 흔들며 저벅거리는 군화도 피 속에 뒹군 군복도 모조리 화염에 싸여 불꽃의 먹이가 됩니다”(9,4). 이사야서에서 군왕 메시아에 관한 다른 본문인 11,1-9에서도 평화는 메시아 시대의 특징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11,6).

 

그러나 예언자가 “앞으로는”(8,23) 이렇게 되리라고 노래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멍에, 장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 저벅거리는 군화, 피에 뒹군 군복. 어디서 이런 표현들이 나왔을까요? 네, 현실에서 나왔습니다.

 

현실이 정말로 평화롭다면 피에 뒹군 군복을 불에 태울 필요가 없습니다. 피에 뒹군 군복이 없을 테니까요. 지금 이사야가 눈앞에 보고 있는 현실은 끝없는 전쟁으로 뒤흔들리고 있는 세상입니다.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가 부서지고 군화와 군복이 불에 타 없어지게 되는 것은 현실에 반대되는 이상입니다. 바로 그래서 이 본문이 비장합니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이다”(9,6)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약속은 살아 있습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진 후에라도 하느님은 이 약속을 이루십니다. 이사야서에 이 본문이 남아 있는 것은 그러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이 약속들이 이어짐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 “이민족들의 지역”(8,23)인 갈릴래아에서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9,1; 마태 4,15-16 참조).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는 “조상 다윗의 왕좌”에서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루카 1,32-33)입니다.

 

이 일이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9,6) 이루실 일이기에, 인간의 역사에서 그 실현이 불완전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언젠가 그 기다림은 꼭 성취됩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은 그 실현을 향해 가는 길 위의 이정표였습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6년 8월호(통권 485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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