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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소예언서 읽기: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져(아모 5,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036 추천수0

[소예언서 읽기]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져(아모 5,2)

 

 

멸망을 선포한다면 마땅히 그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예언서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멸망의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아모 2,6-16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네 가지 죄”에 대한 고발은 3-6장으로 이어집니다.

 

 

“불행하여라, 걱정 없이 사는 자들”(아모 6,1)

 

아모스는 흔히 ‘정의의 예언자’라고 일컬어집니다. 그가 첫 번째로 비판하는 것은 사회 불의입니다. 그가 특별히 강하게 비판하는 죄목 한 가지는 가난한 이들을 희생시켜 누리는 상류층의 사치입니다. 아모 1,6-2,3에서 다른 여러 민족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는 것이 주로 국제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억압 때문이었다면, 2,6-16의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은 주로 이스라엘 동족 내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기인합니다.

 

여기서 아모스의 시대적 배경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시대는 전쟁이 끝나고 안정된 상황에서 경제가 발전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발전의 혜택은 모든 이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부유한 이들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들은 착취를 당하여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있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는 이들은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아모 2,6 참조). 부유한 이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아모 6,4) 향유를 바르고 술을 퍼마시며 흥청거렸습니다(아모 6,1-7 참조). 아모스는 북부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의 부유층 여인들을 “바산의 암소들”이라 부르며, 그들이 빈민을 짓밟는다고 고발합니다. 권세 있는 이들의 집은 화려하고 술과 음식이 넘쳐 나지만, 사회에는 폭력과 억압이 난무합니다(아모 3,9-15; 4,1-3; 6,1-7 참조). 세상의 정의를 세워야 할 재판마저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면서도 평온한 날이 계속 이어지리라 바랄 수 있을까요? 다가오는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눈이 먼 듯합니다. 걱정 없이 사는 자들이 불행하고 마음 놓고 사는 자들이 불행하다고, 아모스는 역설을 말합니다(아모 6,1 참조). 그는 이스라엘이 이미 쓰러졌다고 말하며 이스라엘 집안을 위해 애가를 부릅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구나”(아모 5,2). 이스라엘이 아직도 건재하다고 믿는 이들 앞에서, 아모스는 그 이스라엘이 벌써 죽었다고 말하며 이스라엘을 애도합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출신이 아닌 남부 유다 출신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가 전한 말씀이 더 강하게 와 닿습니다. 성공과 번영의 길을 달려가고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찾아가 그들의 옳지 못한 삶이 죽음을 불러들이고 있음을 말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아모스에게 맡기신 몫이었습니다.

 

 

“제발 용서하여 주십시오”(아모 7,2)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고발 다음에 이어지는 다섯 환시는(7-9장 참조) 이제 심판이 피할 수 없이 다가왔음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깨우치시고자 예언자를 보내시지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심판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

 

다섯 환시 가운데 처음 두 번의 환시에서 하느님께서는 메뚜기 떼(아모 7,1-3 참조)와 불을 보여 주십니다(아모 7,4-6 참조). 그것들은 이스라엘에 다가오는 징벌을 나타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뭄과 장마가 농작물의 피해를 가져오는 대표적 재해인 것처럼, 메뚜기 떼는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는 재앙입니다. 환시 가운데 메뚜기와 불이 농작물을 모두 없애버리는 장면을 본 아모스는 ‘야곱’, 즉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합니다. “제발 용서하여 주십시오”(아모 7,2), “제발 멈추어 주십시오”(아모 7,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간청을 받아들이십니다.

 

전구는 예언자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언자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편에 서서 하느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달할 뿐 아니라, 그가 하느님에게서 들은 심판의 선고를 전할 이스라엘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이집트 탈출 때 광야에서 백성이 불평할 적마다 모세가 하느님께 그 백성을 위하여 간청을 드렸듯, 예언자는 일방적인 하느님만의 도구가 아니라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심판 선고를 들은 아모스의 첫 반응 역시 전구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의 전구를 들어 주시어 재앙을 거두셨다는 것은, 아직 이스라엘에게 회생의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이라도 하느님께 돌아간다면 멸망을 피할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이야기는,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불행을 원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힘을 다해 그 불행을 막고자 했다는 것을 보여 주며 그의 심판 선고를 설명해 줍니다. 예언자들이 심판을 선고하는 것은 동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동족과 아무런 연대성 없이 하느님의 심판을 통보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진실을 말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동족을 깊이 사랑했기에 그들에게 거부와 반대를 받을 줄 알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숨길 수가 없던 것입니다.

 

 

“지나쳐 버리지 않겠다”(아모 7,8)

 

이어지는 두 환시에서는 다림줄(아모 7,7-9 참조)과 과일 바구니(아모 8,1-3 참조)를 보여 주시는데, 그 의미가 자명하지 않기에 두 번 모두 설명이 뒤따릅니다. 다림줄을 드리워 쌓은 성벽 옆에 주님께서 서 계신 세 번째 환시에서는 산당들과 성소들이 황폐해지고 예로보암 집안에 재앙이 닥칠 것이 예고되고(아모 7,9 참조), 여름 과일 한 바구니를 보여 주시는 네 번째 환시에서는 이스라엘의 종말이 선포됩니다(아모 8,2 참조). ‘여름 과일(카이츠)’이라는 단어가 ‘끝(케츠)’과 발음상 비슷하기 때문에, 여름 과일 환시는 이미 종말이 다가왔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두 환시 다음에는 각각 다른 본문이 이어져 있습니다. 이는 앞에 나온 심판 선고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언을 가로막으려 하는 베텔의 성소는 폐허가 되고,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이스라엘은 종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환시에서는 다른 어떤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 직접 멸망을 선포하십니다.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고 아무도 피신하지 못하리라”(아모 9,1). 저승까지, 하늘까지, 바다 밑바닥까지 달아난다 해도 그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처음 환시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모스의 전구를 들어 주시는데, 세 번째 환시부터는 아모스의 전구가 나오지 않을까요? 이제 이스라엘에게 남은 길은 멸망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가 전구하지 않아 하느님께서 들어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더 이상 그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겠다”(아모 7,8)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모스가 더는 전구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멸망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멸망만이 이스라엘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것입니다. 아모스도, 그 시대의 이스라엘도 멸망이 구원 역사의 일부임을 깨닫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멸망을 겪으면서 비로소 하느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에서 양 떼를 치던 아모스를 낚아 채 북부 이스라엘에까지 가서 멸망을 선포하게 하신 것, 아모스에게 보여 주신 여러 환시, 아모스의 두 번에 걸친 전구,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멸망을 피하게 하기 위한 하느님과 예언자의 시도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망할 때까지 두 손 놓고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완전히 멸망을 겪고 나서야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오직 하느님의 자애 덕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심판 선고가 구원 역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까? 멸망의 시대를 산 아모스는 우리보다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대로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등을 썼고, 《약함의 힘》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4년 3월호(통권 456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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