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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예수님, 하느님(8,12-30)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6,965 추천수0

[요한 복음서 해설] 예수님, 하느님(8,12-30)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 복음 첫 장에서부터 예수님을 가리켰던 표징이 ‘빛’이다(1,4). 빛을 받아들여 모두가 하느님의 생명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게 요한 복음의 저술 의도이기도 하다(20,30-31 참조). 다만, 빛을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전적으로 우리 선택의 몫이고, 빛을 빛으로 보고 나아가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로 갈라진 두 세상은 요한 복음이 쓰이고 읽혔던 시대의 자화상이기도 했다(3,19-21 참조).

 

유다인 대부분이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더러는 믿기도 했다(7,31 참조). 예수님은 믿는 이의 탄생을 위해 믿지 않는 이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신다. 본디 믿는 이는 없다. 믿지 않는 이가 믿는 이가 되며, 빛이 오셨기에 어둠은 빛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어찌 보면 불신앙의 자리가 신앙이 생겨날 좋은 기회의 자리인 셈이다(8,30 참조).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궁금해했다. 유다인들은 철저히 하느님을 따르던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직접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셨다. 하느님으로 하나 되는데 문제가 없을 듯하지만, 유다인들은 늘 예수님을 두고 논쟁하기 바쁘다. 매번, 도대체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다(8,25 참조). 유다인들이 궁금해하는 건, 예수님이 아니라 제 삶의 방식일 수 있다. 그러니 늘 묻는다. 예수님께 묻고, 그분의 증언에 대해 확실히 해 두고자 한다. 혼자서 증언하는 것은 참되지 않으니 둘이나 셋이 함께 증언해야 한다는 유다 율법(민수 35,30; 신명 17,6 참조)을 근거로 어떻게든 예수님을 알려고 한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인들의 무지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생겨난다. 먼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에 현혹되어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빛이 세상에 와도, 생명을 주러 하느님이 당신 외아들을 보내셔도, 우린 재테크에, 자녀 교육에, 심지어 오래 살기 위한 건강 정보에 혈안이 되어 있을 수 있다. 세상이 나아갈 방향과 올바른 가치에 대한 고민은 피곤한 것이라 치부한 채, ‘잘 산다는 것’이 ‘얼마를 버느냐’는 기준으로 갈무리될 수도 있다. 삶이 무언지, 삶의 가치가 무언지를 잃어버리거나 혹은 잊어버린 세상이 되는 데 일조했을 수도 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 역시 그러했다. 하느님을 따른다면서 하느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질문보다 율법을 지켰는지 아닌지, 안식일을 지켰는지 아닌지를 더 많이 묻고 따졌다(9장 참조). 유다인들의 무지는 ‘현실’이라는 비겁한 핑계 속에 하느님을 포박한 데서 기인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근원과 세상이 나아갈 바에 대해 집중하셨다. 파견되신 이로서 파견하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 하셨고, 그 뜻을 십자가로 완성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요컨대, 예수님은 당신이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셨다(8,14 참조). 행복하고 싶고 자유롭고 싶다고 하면서도 눈앞의 이해관계에 철저히 묶여 있는 우리로선 ‘왜 사는지’라는 물음이 늘 부끄럽다. 목숨까지 걸진 못하더라도 살아가야 할 삶의 이유와 방향을 묻는 일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유다인들이 무지한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과 그들이 머무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8,23). 물론 세상은 하나고 둘로 나뉜 적이 없다. 요한 복음이 말하는 아래의 세상과 위의 세상은 ‘영성적’ 차원의 구별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빛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8,24). ‘내가 나이다’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실 때 사용한 표현이다(탈출 3,13-16 참조). 풀어 이야기하자면, ‘예수, 바로 내가 하느님’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는 것은 제 삶이 전부가 아님을, 그래서 다른 존재와의 관계로 나아가야 함을 고백할 때 가능하다. 예수님을 보면서 제 삶에 유익한 무언가를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죄에 머무는 것이다. 죄란 다른 것이 아니다. 제 것에 눈이 멀어 다른 것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것이 죄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뜻과 당신의 논리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 된 분이셨다.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8,26).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8,29).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들 안에서,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하느님의 세상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통해 당신 삶의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짚어 내셨고, 그것으로 그분의 삶은 하느님에 대한 ‘증언, 그 자체’였다.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은 곧 하느님 나라였다.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면서도 실제 삶의 자리에선 단죄와 심판을 일삼고 하느님 나라가 멀었다며 이원론적 세계관을 ‘즐기던’ 유다인들에겐 제 삶이 하느님 나라일 수 있다는 예수님의 세상이 낯설고 불편하였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당신의 근원과 당신이 사는 세상을 밝히 보여 주셨다(8,28 참조).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하느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결과다(3,16-17 참조). 하느님의 그 사랑이 완성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은 일방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살덩이를 이 세상에 내던지셨는데,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무관심으로 하늘에 유폐시키는 것은 아닐까.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식으로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일, 알고 보면 참 쉽다. 의심하면 된다. 묻고 또 물으면 된다. 내가 왜 사는지, 사는 이유가 뭔지,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살아서 제 삶의 근원과 그 자리를 잃어버리면 이 세상에 당신 천막을 세우신 예수님도 하느님도 잃게 된다.

 

기억하자, 본디 믿는 이는 없다. 믿지 않는 데서 믿는 이가 탄생한다. 믿음이 있기 위해 우린 삶을 의심하고 물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8,30).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8월호(통권 485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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