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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호세아서 - 사랑을 선포하는 호세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4,950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호세아서] 사랑을 선포하는 호세아

 

 

구약성경에서 우물은 매우 특별한 장소입니다. 성경의 몇몇 위대한 인물은 자기 배필이 될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사악의 신붓감이 될 레베카를 아람 나하라임의 우물가에서 만나고, 야곱은 라헬을, 모세는 치포라를 우물가에서 만납니다. 고대 사회에서 우물은 적어도 하루에 한두 번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소통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는 현대인에게 우물가에 대한 기억은 잊힌 것이거나 낯선 이야기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아주 오랫동안 소통의 장소였던 우물이 사라진 명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물을 얻기 위해 물동이를 지고 우물가로 향하던 여인들의 발자국 소리, 그들 사이에 오갔을 이야기와 웃음소리는 이제 기억 속에만 존재합니다.

 

이달에도 호세아의 샘터로 물을 길으러 갈 것입니다. 호세아의 샘터로 나아가는 여정은 과거로 향하는 여행입니다. 기원전 8세기에 활동한 예언자를 만나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지만, 잊힌 명소가 되어 버린 우물을 찾아 나선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이는 우리 각자의 과거와 만나는 여정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과거를 돌아보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입니다.

 

 

“악을 갈아서 불의를 거두어들이고 거짓의 열매를 먹었다”(10,13)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돌아와 신의와 공정을 지키고, 그분께만 희망을 두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역사를 돌아보라고 말합니다(9,10-13,15 참조). 과거의 삶을 그들의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의 시작은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이스라엘은 광야의 포도송이 같았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 너희 조상들은 첫 절기의 무화과나무 맏물같았다”(9,10).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을 점차 잃어 갑니다. 이집트를 떠나 모압 평원인 바알 프오르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모압의 신들을 섬겼고(민수 25,1-18 참조), 요르단 강을 건너 길갈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악행을 저질러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처럼 열매를 잘 맺던 이스라엘이 이방 신들을 위한 제단과 기념 기둥을 세우고, 단과 베텔에서 송아지를 숭배하여 멸망에 이르게 될 길에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기브아에서 행한 이스라엘의 범죄 역시 징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여 백성이 어디에서부터 어긋나게 되었는지 깨닫게 해 줍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꾸신 꿈이 무엇이었는지 상기시킵니다. 이스라엘은 길이 잘 든 암소로 하느님께서는 이 암소에게 쟁기를 끌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세상이라는 밭을 갈아 정의의 씨앗을 뿌리고 신의를 거둘 사명을 주실 것입니다. 정의가 비처럼 내릴 때까지 그들은 묵은 땅을 갈아엎게 될 것입니다(10,11-12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상에 정의의 씨앗을 뿌리는 대신 “악을 갈아서 불의를 거두어들이고 거짓의 열매를 먹었”(10,13)습니다. 예언자는 이제 그들이 스스로 행한 악 때문에 망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지난 삶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의 원래 모습은 어떠했는지, 언제, 어떻게, 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는지 살펴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이었으며, 우리를 위해 간직하신 꿈은 무엇이었는지 자문해 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11,8)

 

11장에 이르면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호세아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더 깊은 호소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제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여 주셨던 사랑의 역사를 돌아보라고 합니다.

 

우리는 갓난아이였을 때 어머니가 어떤 정성으로 우리를 돌보았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간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짐작할 따름입니다. 제 막내 여동생은 첫 아이를 낳고 나서야 비로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주며 키워 준 어머니의 사랑을 절감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호세아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머니처럼 극진한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돌봐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 이집트에서 불러내시어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품에 안아 주셨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밤새 보살피는 어머니처럼 이스라엘을 돌보셨고, 아이가 마음껏 놀 수 있게 하면서도 혹여 다칠세라 시선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젖먹이처럼 들어올려 볼을 비비고, 이유식이 따로 없던 시절에 한 것처럼 음식을 씹어 아이에게 먹여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실수록 그분에게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향해 하느님께서 애타게 말씀하십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8).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의 행실은 하느님을 분노케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망해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11,9)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며, 유배된 이스라엘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11,10-11 참조).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14,5)

 

11장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라면, 12-13장은 이방 신과 강대국에 의존하려 한 이스라엘의 배반의 역사를 드러냅니다. 이로써 예언자는 청중이 자신의 배은망덕을 깨닫고 진심으로 통회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 때 우리는 자신의 배반을 아파할 수 있게 됩니다. 호세아는 이를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먼저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 것입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그 안에 빼곡하게 수놓인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한 자는, 그 사랑을 모른 채 방황하고 울부짖으며 다른 곳에 눈을 돌렸던 배반의 역사 또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들에게 아무 염려 말고 주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반역만 꾀하던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14,5)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시면 그들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의 삼목처럼 자라게 될 것입니다(14,6-9 참조).

 

그들이 광야 시대의 그 순수한 사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아내로 맞이하고 번창하게 하실 것입니다(2,1-3.23-25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영원한 혼약을 맺으시며, 하느님의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이 될 것입니다(2,21-22 참조).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될 것입니다.

 

훗날의 역사는 호세아의 이 간절한 호소가 북이스라엘의 운명을 역전시킬 만큼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알려 줍니다. 그러나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고 끝내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호세아의 놀라운 예언은 이후의 예언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 우리가 호세아의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야 할 차례입니다. 그 물을 마시고, 그 물로 정화되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 김영선 수녀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미국 보스톤 칼리지에서 구약성경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6월호(통권 471호), 김영선 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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