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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행복한 비유 읽기: 착한 사마리아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8-13 조회수6,030 추천수0

[전원 신부의 행복한 비유 읽기] 착한 사마리아인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29-37)

 

저에게는 잊히지 않는, 소록도에 대한 아주 오랜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젊은 시절 삶의 길을 찾지 못해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하던 때, 당시 나병을 앓던 시인으로 알려진 한하운의 ‘전라도 길-소록도 가는 길에’라는 시 한 편을 읽고 찾아간 곳이 소록도였습니다. 더욱이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프란치스코 성인전에 성인과 나환우와의 만남 일화를 읽고 감동을 받아 나환우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소록도에 이르는 다리가 건설되어 육지의 일부가 되었지만 80년대만 해도 소록도는 서울에서 하룻길에는 도달할 수 없는 한반도 남쪽 끝 참으로 머나먼 섬이었습니다. 또한 소록도에 들어서도 나환자 마을까지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아서 제2안내소부터는 가족이나 특별한 연고가 없으면 통제를 받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정상적인 입장이 불가능했던 저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산길을 돌아 반칙을 써가며 그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소록도의 성당 정문 앞에서 상태가 아주 심해보이는 한센병 환자 한 분과 마주쳤습니다. 성인이라도 될 듯 환우들에게 봉사를 하며 얼마간 지내고자 했던 의기양양했던 저의 꿈은 그 환우와 마주치는 순간 무참하게 허물어져서 그길로 저는 그 섬을 빠져나왔습니다.

 

소록도에서의 부끄러운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게 된 것은 최근 매스컴을 통해 보도된 소록도의 ‘할매 천사’라고 불리는 마리안느(Marinnne Stoger)와 마가렛(Margaritha Pissarek) 두 간호사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이분들은 한국전쟁의 상흔과 가난이 극심하던 폐허의 나라에 20대 젊은 나이에 와서 평생을 소록도에 머물며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한센병을 지독한 전염병으로 생각하던 시절이라 의사들조차도 가까이 하지 못하고 환자들과 떨어져서 꼬챙이로 환부를 찔러보며 진단을 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벽안의 천사들이 환자를 안고 손으로 환부를 닦아주고 치료해주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우리나라 의사들도 환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자신들의 전 생애를 다 바치고 나서 나이가 들자 소록도 사람들에게 폐가 된다며 본국으로 홀연히 떠났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그것도 가장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일생을 함께 한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는 소록도에서의 제 부끄러운 기억을 불러내어 마음 한켠에서 미안함과 감사한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수님과 율법학자 사이에 이웃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 불행한 사람에 대하여 심리적 거리는 어디까지인지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왔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이웃에 대한 개념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한되어 있었고 한 발 더 나아가 바리사이들은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이웃일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이방인이나 세리 등은 당연히 이웃이라는 개념에서 철저하게 배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학자의 이웃에 대한 질문은 이미 이러한 자신들의 제한된 이웃 개념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들을 위한 사랑의 한계와 자신의 책임이 어디까지인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예루살렘에서 예리코에 이르는 길은 약 27km 정도 거리였는데 이 길은 옛날부터 강도 사건이 종종 일어나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길에서 강도들을 만나 초주검이 되어 있는 어떤 사람을 두고 그 옆을 지나가는 세 명의 등장인물의 태도를 통해 그들 중 참된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율법학자가 기대하는 이웃이라면 당연히 사제, 레위인, 유다인의 순으로 한정하여 비유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 번째 등장인물은 다름 아닌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에 속한 지역으로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는데 여기는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생존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이주정책에 따라 사마리아에는 이방인들이 대거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교 문화가 혼재되고 혼혈결혼이 성행하면서 유다인들의 고유한 신앙은 혼탁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바빌론 유배 이후에도 귀환한 이스라엘에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기를 거부하였고 그들이 보내온 예루살렘 성전 재건비용도 거절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유다인들의 차별은 기원전 330년경에 그리짐(Gerizim) 산에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세우면서 더욱 심해져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유다인들이 정서적으로 상종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마리아인을 세 번째 등장인물로 내세워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제와 레위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 있는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라고 표현합니다. 어쩌면 사제와 레위인은 성전에서 전례를 앞두고 죽은 자들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레위 21,11-13) 때문에 그가 죽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여 피해 갔을 거라 변명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길의 방향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이었음을 말씀하시어 그 변명의 여지를 막아 놓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성전예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기에 당연히, 심하게 다친 사람을 구하는 행동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착한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세 명의 등장인물은 같은 상황에서 같은 사람을 보았지만 사제와 레위인과는 달리 사마리아 사람만이 연민(compassion)의 마음으로 다친 이를 보았습니다. 그는 상처 난 이를 싸매주고 치유해줄 뿐 아니라 노새에 태워 여관에 옮기고 비용까지 대주며 온전히 돌보아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유다인에게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마리아인의 착한 행동을 내세워 진정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통해 인종, 국경, 종교, 성별 등 어떤 신분상의 이유로도 배제될 수 없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곧 우리의 이웃이라는 대답을 이끌어내십니다.

 

다시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분의 삶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에게는 국경도, 인종도, 종교도, 그리고 어떤 처지의 사람도 그들을 막을 벽이 될 수 없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오로지 사랑(compassion)만이 모든 벽과 경계를 허물고 이웃이 되게 한다는 예수님 비유의 가르침을 그분들은 온전히 보여주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6항.) 라고 했지요. 여러 사교모임에 참석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도 단 한 사람의 이웃도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 몇 사람을 만나며 살아도 모두에게 이웃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유 속의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단 한 사람에게 바친 사랑일지라도, 참된 사랑은 모든 이에게 이웃이 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모든 벽과 경계를 허물고 이웃이 되게 하는 그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이미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우리 안에 그런 이웃이 되어주는 사랑이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 전원 -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영성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도봉산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저서로 『말씀으로 아침을 열다 1ㆍ2』 『그래, 사는 거다!』가 있다.

 

[생활성서, 2019년 8월호, 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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