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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흘러넘치는 구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11 조회수10,654 추천수1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흘러넘치는 구원(Das überströmende Heil)

 

 

예수님께서 수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외딴곳에서 갑자기 배불리 먹은 군중은 그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 입에서 늘 다시 회자되었을 테지요. 복음서에서는 적어도 여섯 군데에서 그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마르 6,30-44; 8,1-10; 마태 14,13-21; 15,32-39; 루카 9,10-17; 요한 6,1-15 참조).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처음 시작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이야기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충만함에 있습니다. 그 충만함이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넘치는 충만함을 단지 이 기적 이야기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그러한 충만함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흥청망청 넘치는 충만함 

 

카나의 기적이 그렇습니다(요한 2,1-12 참조). 카나라는 고을에서 벌어진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동이 납니다. 흥이 깨질 판입니다. 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혼인잔치가 일주일 내내 지속되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을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손님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혼인은 일생에서 최고 정점을 이루는 일이었으니까요.  

 

메시아 시대의 넘치는 충만함이 바로 이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포도주 기적에서 드러납니다. 대략 500에서 700리터 정도 되는 물이 포도주로 바뀝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차고 넘치며, 한계를 모릅니다. 커다란 항아리마다 포도주가 찰랑찰랑 그득합니다. 포도주도 최상급이어서, 잔치의 책임을 맡은 이가 놀라워하며,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어떻게 잔치 말미에 내놓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흥청망청 넘치는 충만함은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도 일어납니다(마르 14,3-9 참조). 한 여인이 아주 값비싼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머리에 향유를 붇습니다. 제자들은 할 말을 잃고, 어떤 이들은 값비싼 향유를 그처럼 허투루 쓴다고 투덜거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두둔하십니다. 

 

예수님의 여러 비유에서도 흘러넘치는 충만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마르 4,1-9 참조), 땅에 뿌려진 씨앗들이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결실을 맺습니다. 군데군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마태 13,31-32 참조), 바늘구멍만 한 겨자씨가 큰 나무, 곧 생명나무로 자라나 그 가지들마다 하늘의 새들이 깃들입니다.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에서(마태 13,44-46 참조), 가난한 품팔이꾼이 밭을 갈다가 밭에 숨겨진 엄청난 보물을 발견하고, 진주를 거래하는 부유한 상인은 어느 날 난생 처음 보는 놀라운 진주를 발견합니다. 크기도 크기지만 형언할 수 없는 광채를 내는 진주입니다. 

 

그물의 비유에서(마태 13,47-48 참조), 사람들이 물가로 끌어 올린 그물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들이 가득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루카 15,11-32 참조), 상속 재산을 탕진하고 아들의 권리를 남용한 작은아들을 아버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버지는 달려가서 작은아들을 부둥켜안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손에 반지를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에서(마태 18,23-35 참조), 임금은 만 탈렌트를 빚지고 삶이 파탄 난 가련한 종의 빚을 모두 탕감해줍니다. 만 탈렌트는 6,000데나리온의 만 배나 되는 금액입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온종일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지요. 그러니 임금이 탕감해준 만 탈렌트는 6,000일의 품삯에 만 배를 해야 하는 액수인 것입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마태 20,1-16 참조), 주인은 오후 다섯 시가 되어 맨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도 온종일 일한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합니다. 저녁때가 되자 그들에게도 온전히 하루 품삯을 지불합니다. 

 

이런 예는 끝도 없습니다. 복음서를 들여다보는 곳마다 넘치는 충만함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흘러넘치는 충만함, 과잉과 흥청망청에 대해 말합니다. 

 

 

충만함의 법칙 

 

분명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역사의 근본 법칙이 여기서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요셉 라칭어(베네딕토 16세)는 이를 가리켜 ‘충만함의 법칙’이라 불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보다 더 베푸십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할 만큼 더 주십니다. 구원역사의 이러한 근본 법칙을 복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진다’(마태 13,12 참조).  

 

예수님의 말씀인즉, 가진 자, 곧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이는 더 받아 철철 넘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과잉, 풍요로움, 흥청망청 넘치는 충만함이야말로 구원의 시대가 왔음을 드러내는 표상입니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적고 옹색한 것은 이에 걸맞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느님 자신이 흘러넘치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그런 생명을 넘치도록 나누어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과잉과 충만함의 이 원칙은 이미 창조에서도 드러납니다. 꽃과 나무만 해도 얼마나 다양하고 많습니까? 그저 열 종류의 꽃으로라도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한 생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씨앗들이 생성되고 사라질까요? 무수히 태어나고 사라지는 태양계와 은하수와 별들의 무리를 보십시오! 

 

지구라는 “작은 행성 ‘하나’에 인간 정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온 우주가 동원됩니다.(요셉 라칭어) 

 

생각이 이에 미치면,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을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계속 이런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마침내 ‘하나의’ 백성을 찾아내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민족들이 동원되었는가?” 그 백성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의 은총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지점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 백성 하나 때문에 하느님께서 얼마나 많은 민족들을 동원하셨는지에 대해 이사야서는 대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다. 내가 이집트를 너의 몸값으로 내놓고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너 대신 내놓는다.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 대신 다른 사람들을 내놓고 네 생명 대신 민족들을 내놓는다.”(이사 43,3-4) 

 

 

죽음과 생명의 법칙 

 

물론 하느님께서 ‘너 대신’ 다른 이들을 내놓으시는 것에는 당신의 아드님을 내놓으시는 것도 포함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쓰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놓고 보면, 흘러넘치는 구원의 충만함이 낭만적인 동화의 세계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그 충만함이 곳간에는 쌀이 넘치고, 항아리에는 우유가 떨어지지 않고, 자루에는 늘 황금이 채워지는 나라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흘러넘치는 은총은 우리 자신이 죽은 다음에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 자기고집을 내려놓고, 자신의 약점과 무력함을 인정할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빈손이어야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한, 하느님께서 행동하실 공간은 없습니다. 하느님께 행동하실 공간을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하느님도 우리에게 충만한 구원의 선물을 주실 수 없습니다. 늘 다시 교회를 채우는 광채는 교회의 열심한 노력과 도덕적 수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광채는 교회 안의 수많은 거룩한 이들에게서 옵니다. 자신의 약점을 고백하고, 온전히 듣는 이가 되며, 하느님께서 행동하시도록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무엇을 바라지 않는 이들에게서 옵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8년 7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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