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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유다서, 요한 묵시록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10 조회수5,421 추천수1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유다서

 

 

유다서 저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교우들에게 서간 집필 동기를 밝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공동 구원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편지를 쓰려고 여러모로 애쓰던 참에,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해진 믿음을 위하여 싸우도록 여러분에게 권고하는 편지를 써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3절) 이어서 그 직접적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몇몇 사람이 몰래 숨어들어왔기 때문입니다.”(4ㄱ절) 여기서 말하는 ‘몇몇 사람’은 이단을 설파하는 거짓 교사들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천상의 존재들 곧 천사들을 모독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까지 부인함으로써 교회 분열을 초래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몸을 더럽히고 주님의 주권을 무시하며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합니다.”(8절) 그들의 정체는 아마도 영지주의자들로 추정됩니다.

 

 

영지주의?

 

영지주의자들은 오로지 영지[靈智, Gnosis]를 통해서만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오로지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므로 육적인 것 뿐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다 업신여깁니다. 그들은 결국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님까지도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유다가 바라보는 거짓 교사들?

 

다음 구절이 유다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저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로서, 현세적 인간이며 성령을 지니지 못한 자들입니다.”(19절) 유다는 이와 같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 교우들에게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유다서의 마지막 시대에 대한 경고?

 

“그들[사도들]이 여러분에게, ‘마지막 때에 자기의 불경한 욕망에 따라 사는 조롱꾼들이 나타날 것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18절) 그들은 누구입니까? 유다서가 답을 줍니다. “저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로서, 현세적 인간이며 성령을 지니지 못한 자들입니다.”(19절)

 

 

유다서 저자의 당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굳게 믿고 기다릴 것을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20-21절)

 

 

최후 심판은 하느님께서?

 

유다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분명히 밝혀둡니다. 움터온 마지막 때를 놓치지 말고 거짓 교사나 이단으로부터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사도들이] 여러분에게, ‘마지막 때에 자기의 불경한 욕망에 따라 사는 조롱꾼들이 나타날 것이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아울러 저자는 대천사 미카엘도 심판은 다 주님께 유보된 권한으로 알고 그분께 맡겨드렸다고 일러줍니다. “그러나 미카엘 대천사도 모세의 주검을 놓고 악마와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모독적인 판결을 내놓지 않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 하고 말하였을 뿐입니다.”(9절)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요한 묵시록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Apokalypsis Iesou Xristou”(1,1)라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계시[Apokalypsis]’라는 표현은 일반 그리스 문학에서뿐 아니라 칠십인역 구약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초대교회에서 ‘계시[Apokalypsis]’라는 표현은 세상 끝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휩싸여 나타나심을 일컫는 관용어로 자리 잡게 됩니다. “……..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로마 2,5) “하느님께서는 정녕 의로우시어, 여러분에게 환난을 겪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겪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같이 안식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 일은 주 예수님께서 능력을 지닌 당신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이루어질 터인데, 그때에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에 휩싸여 오시어, 하느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벌을 주실 것입니다.”(2테살 1,6-8; 참조: 1코린 1,7; 1베드 1,7.13)

 

 

요한 묵시록은?

 

애초부터 읽는 이들을 모두 참 행복으로 초대하는 책[성서]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1,3) 이 ‘예언의 말씀’은 저자가 자주 인용하는 구약과 묵시록의 모든 말씀 곧 하느님 말씀을 모두 아우르는 말입니다. 묵시록에는 ‘행복선언[makarios 행복하다]’이 모두 일곱 차례 나옵니다(이곳 외에: 14,13; 16,15; 19,9; 20,6; 22,7.14). 신구약의 예언이 다 같이 자신의 저서 묵시록 안에서 만나 완성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듣고 지키는 이들?

 

성서를 회중 앞에서 낭독하는 이는 곧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권리를 위임받은 봉사자를 뜻합니다. 듣고 지키는 이들은 예배에 참여한 모든 회중을 지칭합니다. 묵시록 저자 요한은 회중 앞에서 성서를 큰소리로 읽는 이나, 이 생명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이들이나 모두 다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당시 심한 박해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박해에 굴복하지 말고 구원의 말씀을 낭독하고 또 그 말씀에 따라서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격려와 권고의 말씀입니다.

 

 

그때는?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1,3ㄴ) 그리스도의 재림 때와 재림 때에 이루어질 하느님 심판의 때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때[ho kairos]’는 한마디로 구원의 때입니다. 그리스도교 묵시문학에서 ‘그때’는 단지 박해시대에 교우들을 위로하며 혹독한 박해에 굴하지 말고 순교를 각오하라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죽음과 부활]과 더불어 인류구원의 완성이 벌써 시작되었음이 선포되는 은총의 때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인류 구원위업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표현입니다.

 

 

‘그때’와 더불어 우리는?

 

루카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희년선포를 떠올리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그리스어 본문: eniauton kyriou dekton; 히브리말 이사 61,2: shanat rasson le JHWH]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9) 희년 규정(레위 25,8-55)에 바탕을 두고,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날의 희년선포로써 온 누리에 전적으로 새로운 때, 인류 구원의 때가 움터왔음을 선언하십니다. 묵시록 저자 요한이 말하는 ‘그때’는 이렇게 이미 예수님의 희년선포와 어떻게든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 종들에게”?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주신 계시입니다.”(1,1) ‘당신 종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신앙인을 말합니다. 이 ‘당신 종들’이 1장3절에서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듣고 지키는 이들”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9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요한 묵시록 (2)

 

 

묵시록 저자 요한은?

 

유다교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묵시록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묵시록 저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문체와 신학이 요한복음서와 많이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셈족의 배경이나 교리의 유사성 측면에서는 요한복음서와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바는 누가 정확한 저자인가를 찾아내는 데 있지 않고, 요한으로 전해오는 저자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주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요한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트모스 섬에 갇힌 요한?

 

저자 요한은 자신의 처지를 요약적이면서도 섬세히 전해줍니다.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1,9)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교를 믿었기 때문에 나아가 그의 복음 선포 활동 때문에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되었다는 증언으로 보아, 요한이 실제로 그 섬에 유배 와서 살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파트모스는 옛 항구도시 에페소로부터 남서쪽으로 100여 킬로 떨어진 섬인데 폭이 9킬로미터에 길이는 16킬로에 이릅니다. 이 섬은 옛 로마시대에 유배지로 이름난 곳이었습니다.

 

 

묵시록 수신인은?

 

묵시록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로 되어있습니다.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1,4) 요한은 그 일곱 교회 이름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1,11) 성서에서 ‘일곱’은 충만함이나 완성을 상징적으로 이르는 구원의 숫자입니다. 따라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는 어느 일정 지역의 몇몇 공동체를 이르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 곧 세상 모든 교회를 한데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묵시록 집필 목적은?

 

요한은 크게 세 가지 목적으로 묵시록을 집필합니다. 요한은 첫 번째로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자신들의 옛 [유다교]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 고자 합니다. 두 번째로 아직 유다교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유다교 신자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자 하는 의도로도 묵시록을 씁니다. 세 번째로 자신이 지금 누리는 엄청난 은총을 외교인들도 누리게 하고자 묵시록을 씁니다.

 

 

묵시록 저자 요한은?

 

묵시록 내용을 섬세히 분석해나가다 보면 저자가 구약의 지식을 바탕으로 쓰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묵시록 처음부터 끝까지, 유다교 전승에 정통한 유다인이 아니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요한이 히브리말 전통에 깊이 젖어있는 인물임이 특히 4-5장에서 두드러집니다. 요한 자신이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나아가 그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참 그리스도인으로’ 인도하고자 하는지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곧 구약전통에 매달리지 않고 보다 자유로이 신약시대에 걸맞은 모습으로, 그리스도께[그리스도교로] 나아가도록 인도하고자 하는지를 7,1-14에서 명확히 보게 됩니다.

 

 

십사만 사천 명(7,1-14)은?

 

요한은 이 상징적인 숫자를 통하여 엄청난 신학을 전해줍니다.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7,4) 요한은 보다 구체적으로 144,000명의 내용을 밝힙니다. “이렇게 인장을 받은 이들은 유다 지파에서 만 이천 명, 르우벤 지파에서 만 이천 명……. 요셉 지파에서 만 이천 명, 벤야민 지파에서도 만 이천 명이 인장을 받았습니다.”(7,5-8)

 

 

144,000의 의미는?

 

구약에서 7, 10, 12는 더불어 온전함, 완성에 이름, 충만함, 구원 등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12,000은 12[충만한 수]×1000[충만한 수 10×10×10] × 12[이스라엘 12지파]입니다. 누가 만일, 굳이 우리말 셈법으로 더 쉽게 설명하라고 졸라댄다면 ‘충만함×충만함×충만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법합니다. 그러니까 유다 지파로부터 벤야민 지파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12지파 모두가 각기 12,000명씩이었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모두 다’에 이르기까지 제한 없이 얼마든지 환영한다는 뜻입니다. 이마에 인장을 받았다 함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합니다. 그 수를 셀 수조차 없이 수많은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12지파×12,000명=144,000명이 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144,000명이란 곧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왜 유다 지파가 맨 앞에?

 

누구나 곧바로 떠올리게 되는 물음입니다. 루우벤이 맏형이니까 당연히 루우벤 지파로부터 열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참조: 탈출 1,2). 답은 간단합니다. 요한이 묵시록을 집필하던 시기는 이미 신약시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심으로써 전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움터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나오기로 약속된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에 당당히 유다지파가 으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민족들이 유다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묵시 5,5)

 

 

144,000명으로 상징되는 유다인들만?

 

구원에 이르게 됩니까? 결코 아닙니다. 유다 열두 지파에서 나온 144,000명에 뒤따라 나오는 구절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7,9ㄱ) 그들은 누구입니까? 요한이 이 질문에 아주 따뜻한 마음으로 답을 줍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7,9ㄴ) 한마디로 선민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는 누구나 다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보편 구원의지를 명시적으로 선포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부 이단들이 이 단락을 놓고 얼마나 엉뚱한 해석을 하고 있는지를 직시하고 교우들에게 올바른 깨우침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린양이 시온 산위에?

 

요한은 어린양을 중심으로 모인 십사만 사천 명을 다음과 같이 그려줍니다. “내가 또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14,1) 여기 시온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들어선 동산을 가리킵니다. 이 시온 산은 메시아 왕국 또는 지상 메시아 왕국의 중심부를 뜻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10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요한 묵시록 (3)

 

 

묵시록 집필 동기?

 

무엇보다도 지나친 천사 숭배를 막고자 묵시록을 집필합니다. 특히 영지주의(Gnosis)자들은 눈에 보이는 존재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만을 참 가치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들 눈에 예수님은 그리 중요한 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어 여느 사람처럼 육체를 지니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영적일 뿐 몸을 지니지 않았으므로 영지주의자들은 천사들을 예수님보다 훨씬 더 큰 숭배 대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천사 과잉 숭배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고자 묵시록을 씁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를 경시하거나 부정하니까?

 

그들은 당연히 육신의 부활을 인정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도 거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에 달리시어 속죄양으로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송두리째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영지주의자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서실 자리가 없어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의 의미도 없어지게 되고, 그들 눈에는 그리스도교가 설 터전을 찾기 힘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묵시록 첫 구절부터?

 

천사가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천사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분 심부름꾼 노릇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주신 계시입니다.”(1,1) 한마디로 천사는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꾼일 뿐입니다. 저자 요한은 묵시록 맨 끝에 가서 다시 한 번, 천사가 어떤 존재이며 어디에 서야 할지 그의 자리 매김을 명확히 해줍니다. “이 일들을 본 사람은 나 요한입니다. 나는 이 일들을 듣고 또 보고 나서, 나에게 이것들을 보여준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마라, 나도 너와 너의 형제 예언자들과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과 같은 종일 따름이다.’”(22,8-9)

 

 

영지주의에서 천사들은?

 

그들의 역할은? 영지주의에서 천사들은 천상 권력을 쥐고 인류역사를 좌지우지하며 주관하는 존재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천사들은 인류구원을 결정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영지주의에서 천사들은 죽은 이를 살리든가 부활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역할까지도 담당하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천상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에 반해 묵시록 저자 요한은 앞서 본 대로 다음처럼 천사들의 위치와 역할을 자리 매김 해줍니다. “나는 그[천사]에게 경배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마라, 나도 너와 같은 종이다.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너의 형제들과 같은 종일 따름이다. 하느님께 경배하여라. 예수님의 증언은 곧 예언의 영이다.’”(19,10) 천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 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한계 지어주는 말씀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천사 자신도 묵시록 저자 요한과 다름없는, 나아가 성서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과 같은 주님의 종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약 안에 천사들의 등장은?

 

신약 27권 전체 안에서 천사는 191차례 등장합니다. 그 중에 72차례는 요한 묵시록에 나옵니다. 이와 같이 72회라는 압도적으로 많은 천사의 등장 숫자만 보아도 묵시록 저술 당시에 ‘천사의 존재와 역할’을 올바로 깨우쳐줄 필요성이 급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묵시록에 나오는 세 단계 표현?

 

묵시록에는 세 단계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1]지금도 계시고 [2]전에도 계셨으며 [3]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1,4; 참조: 1,8) 이는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분, 곧 영원으로부터 지금을 거쳐 앞으로 영원무궁토록 계시는 하느님 이름 ‘야훼’를 삼 단계에 거쳐 그리스말로 풀이한 구절입니다. 구약의 아람어 역본 ‘예루살렘 타르굼’에서 ‘야훼’가 세 단계 표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계실 분>으로 늘어납니다.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1,4)은 충만함을 뜻하는 상징 수로써 사람들에게 충만한 축복과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영을 지칭합니다.

 

 

성실한 증인……?

 

이어지는 세 단계 표현을 살펴봅니다. “또 [1]성실한 증인이시고 [2]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3]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5) 그리스말로 ‘성실한(pistos)’에 해당되는 히브리말 ‘에멭(emed)’은 첫 자와 가운데 자와 끝 자[모두 세 문자]를 합친 문자로서 처음에나 중간에나 끝에나 변함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증인이시고’는 메시아를 지칭하는 구약 사상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 보라, 내가 그를 민족들을 위한 증인으로, 민족들의 지배자와 명령자로 만들었다.”(이사 55,3-4)

 

 

이 세 단계 표현(1,5)의 뜻은?

 

“[1]성실한 증인이시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돌아가심을, “[2]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3]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오른편에 좌정하시어 온 누리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이르는 표현입니다. 바오로 서간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콜로 1,8)

 

 

이러한 세 단계 표현에서?

 

우리는 이미 초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확신이 신앙 고백문 양식으로 정착되어 전해오고 있었음을 봅니다. 그러한 내용을 우리는 특별히 <천상 예루살렘 예배>(묵시 4-5장) 장면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세 단계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단계를 봅니다. “[1]그 뒤에 내가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4,1ㄱ)” 하늘에 문이 열려 있음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해줍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연상해볼 수 있습니다.

 

둘째 단계를 봅니다. “그리고 처음에 들었던 그 목소리, 곧 나팔 소리같이 울리며 나에게 말하던 그 목소리가, ‘이리 올라오너라. 이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하고 말하였습니다.”(4,1ㄴ-ㄷ) 이는 어두움과 절망 상태에서 신비로운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구원의 여행을 암시해줍니다.

 

셋째 단계를 봅니다. “나는 곧바로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늘에는 또 어좌 하나가 놓여있고 그 어좌에는 어떤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4,2)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말은 이미 천상 영역으로 발들 들여놓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미 구원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pneuma) 믿는 이들을 주님 품안(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11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요한 묵시록 (4)

 

 

알쏭달쏭한 숫자 666 그 의미는?

 

“여기에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을 숫자로 풀이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그 숫자는 육백육십육[666]입니다.”(13,18) 여러 견해가 있지만 흔히 당시 교회를 심하게 박해했던 네로 황제를 지칭한다고 봅니다. 7이 완전함을 뜻하는 반면, 6은 불완전함을 뜻합니다. 6을 세 번이나 반복한 666은 아주 많이 모자란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이 숫자는 스스로를 신(神)이라고 자처하지만 실제는 마치 ‘짐승’만치도 못한 존재일 뿐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마흔두 달?

 

또는 ‘삼 년 반’은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국의 임금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IV)의 박해 기간에서 유래합니다(참조: 다니 7,25; 12,7). 42개월[3년 반]이나 1260일은 충만을 뜻하는 7년의 절반으로 박해나 어두운 시기를 뜻합니다. “[이민족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나는 나의 두 증인을 내세워 천이백육십 일 동안 자루옷을 걸치고 예언하게 할 것이다.”(묵시 11,2-3; 참조: 12,6.14; 13,5)

 

 

묵시록의 중심부(11,19)?

 

저자 요한은 묵시록을 아주 정교하게 구상하고 일관성 있게 작품을 써나갑니다. 특히 이 구절은 요한 묵시록 정 중앙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우연일 수 없습니다. 저자 요한이 구약을 완성시켜주는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이곳에 이 구절을 배치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기점으로 이제부터 전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하자 합니다.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나면서,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떨어졌습니다.”(11,19)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하느님 계신 곳입니다. 하늘의 성전은 그분이 계시는 중심부입니다. 성전이 열렸다는 말은 그분께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신다, 계시하신다는 뜻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계약 궤가 나타났다는 말은 구약 어느 시기에 사라져버린 계약 궤가 다시 등장했음을 뜻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에 살아계시며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에서 계약 궤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자신을 계시하거나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 보이시는 증거로 이해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모습?

 

요한은 하느님 나라의 단면을 인간의 언어로 묘사해주고자 애씁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22,1-4)

 

 

유다교 사상?

 

11장 19절 배경에는 유다교 사상과 라삐 전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구약의 계약 궤는 천상 계약 궤의 모형을 본떠서 만들게 됩니다. “……. 내가 너[모세]에게 보여주는 성막의 모형과 온갖 기물의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탈출 25,9) 이같이 묵시 11,19에 나타난 계약 궤는 천상 성전에 있는 모형으로 이해됩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언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영적 성전?’ 아니면 그냥 문자 그대로 신비에 싸인 하늘의 성전, 천상 예루살렘 성전과 그에 걸맞은 천상 계약 궤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라졌던 계약 궤가?

 

실제로 유다인들은 구약에 사라졌던 ‘계약 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세상 종말에 가서 다시 나타나리라는 믿음을 간직해오고 있었습니다. “….. 예레미야 예언자는 신탁을 받고 나서 사람들에게 천막과 계약 궤를 들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올라가 하느님의 상속 재산을 본 그 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에 가서 예레미야는 동굴 집을 발견하고 천막과 계약 궤와 분향 제단을 그곳에 안치하고 나서 입구를 막아버렸습니다. 그를 따라간 몇 사람이 길을 표시해 두려고 다가갔지만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것을 알고 그들을 꾸짖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장소는 하느님께서 백성을 다시 한데 모으시어 자비를 보이실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때 가서야 주님께서는 저 물건들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리고 모세 위에 나타났듯이, 솔로몬이 그 장소가 특별히 성화되도록 청하였을 때에 나타났듯이, 주님의 영광과 구름도 나타날 것이다.”(2마카 2,5-8)

 

 

묵시 11,19에서?

 

번개와 요란한 소리, 천둥, 지진 등은 신현[Epiphany]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거나 발현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구절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인류역사 안에서 결정적이면서도 궁극적인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 계시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어떤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인류를 밝혀주는 사건임을 알려줍니다. 곧 하느님 계시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현재 진행형으로서, 종말론적인 성격을 띠고 다시금 밝게 드러나는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천상 예루살렘 예배?

 

묵시 4-5장에는 천상 예루살렘 예배가 펼쳐집니다. 묵시 4장에서는 어좌에 앉아 계시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중심입니다. 어좌에 계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천상 생물들이 밤낮 쉬지 않고 외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4,8; 참조: 이사 6,3)

 

묵시 5장에서는 먼저 어린양을 중심으로 어린양께 대한 찬미가 울려 퍼집니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5,6ㄱㄴ) 이는 신구약을 통틀어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가장 짧고도 가장 명확하게 계시해주는 구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곱 뿔은 전능하신 하느님을, 일곱 눈은 전지하신 하느님을 말해줍니다. 승리자로서 또 힘으로 충만한 모습은 유다교의 메시아사상에 상응합니다. 모든 대망을 다 성취시키는 승리자의 모습을 담은 메시아사상을 우리는 신약의 다음 두 구절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구원의 뿔을] 일으키셨습니다.”(루카 1,6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천상 예루살렘 예배의 절정?

 

천상 예루살렘 예배의 절정인 묵시 4-5장의 끝 부분(묵시 5,13-14)에서는 하느님과 어린양께 대한 찬미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하고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5,13-14) 묵시 4-5장 안에 묵시록의 핵심 신학이 담겨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J. Roloff, Offenbarung,25 참조). 하느님과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페라를 보듯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경배해야 할지까지 잘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묵시록과 미사 전례?

 

미사 안에서 세 번 거듭되는 ‘거룩하시다’(4,8)를 비롯하여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19,9) 등 곳곳에 묵시록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묵시록은 멀게 느껴서 그렇지 실제로는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는 성서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요한은 자신의 저서 묵시록을 통하여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어좌에 앉으신 하느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인도해줍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12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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