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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견진교리: 성서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1998-11-10 조회수7,800 추천수4

견진 교리 교안  ( 3 )

주제 : 성서

        1998. 11. 10. 화.

지난 첫 번째에는 견진성사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날에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날입니다.  제가 세 번째 날인 오늘 말씀드릴 내용의 주제는 <성서>에 대한 것입니다.  성서라는 주제를 통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성서를 어떠한 마음자세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두 번의 기간에 말씀드린 내용은 사실상 성서에 근거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은 믿음으로도 알 수 있기는 하지만, 약한 인간들은 눈으로 보는 것, 뭔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니,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성서를 다루고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보시려면,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서 견진교리를 통해서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도 짧고 여기서 하는 <성서에 대한 이야기의 목적>은 당연히 견진교리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지, 여러분들이 성서에 대해서 갖고 있을 궁금증을 모두 풀어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조금 겁나는 것은 시간이 다급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교리이기에 오늘은 합니다만, 혹시라도 훗날 틀린 것이 있다면 다시 수정(修整)해 드리는 시간을 갖기로 하겠습니다. <성서>에 대한 이야기 시작합니다.

 

 1. 성서란 무엇인가?  무엇을 성서라고 하는가?

이것은 첫 번째 질문입니다.  간단하게 물었으니, 간단하게 답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느님께서 자기 자신과 인류에 대한 자신의 의지에 관하여 계시한 바를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기록자가 작성한 책들의 집합체로서 교회가 정전(正典:CANON)으로 인정한 것’들을 말합니다. <가톨릭대사전 637면. 성서란?>

말이 복잡하죠.  간략한 말로 자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인간이 읽고 알아들을 수 있는 글로 쓰여진 하느님 자신에 대한 것과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의지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복잡하나요?  그 이상은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의 생활에 대해서 재미를 느끼며 그것을 즐기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성서를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인간의 생활에 재미를 느끼고 있고 내가 하는 일들이 모두 내 뜻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는데 굳이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의지(意志) 따위를 알아서 무엇하겠는가?’하는 생각을 갖기 쉽기에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지금 현실에서 성서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거나 현실에서 소홀히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재미에 지나치게 심취(深醉)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분명 이렇게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가끔씩이라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도둑질도 해 본 사람이 잘 한다’고 했습니다.  평소의 삶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고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정마로 다급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성서의 구분 :  구약성서, 2경전, 신약성서,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성서는 크게 구분하면,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으로 구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옛 계약을 가리켜 ’구약’이라 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새로워진 계약을 ’신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말뜻을 설명하는 것이고, 우리가 책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조금 다르게 나눕니다.  우리가 가진 성서의 목차를 보면, 좀 더 달리 구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서의 구별은 오경과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로 나눕니다.  이렇게 종류별로 나눈 것에 구약성서 46권이 적절하게 그 성격에 따라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나누어진 구약은 제 1 경전과 제 2 경전으로 다시 나눕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오래 전부터였지만<최초의 경우: 1795-1780년의 이가환 정약종 번역했다고 함. 1892-1897년에 일부, 1910년에 한기근 신부의 사사성경 1922년 한기근 신부의 사도행전 번역.  나머지는 1941년 덕원 분도 수도회 실라이허 신부의 번역하여 1971년까지 교회공인본으로 사용해왔음.>,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공동번역은 1977년에 초판본이 나온 것입니다.  낱권으로 번역된 성서는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지금처럼 한 권의 책으로 나온 것은 시기가 꽤나 늦은 편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구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가 하느님의 아들로 오셔서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구원사업의 완성’ 이후에 쓰여진 것은 신약성서라 하고, 그 이전에 쓰여진 것은 구약성서라 합니다.

쓰여진 언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책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신약성서는 희랍어, 즉 그리스어로 쓰여졌고, 구약성서는 지금 말씀드린 희랍어로 쓰여진 부분이 있고, 이스라엘 문자였던 히브리말로 쓰여진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쓰여진 언어에 대한 평가에 따라서 개신교와 천주교에는 성서의 권수를 달리 계산합니다. 개신교에서는 구약성서 중에 애초에 히브리말로 쓰여지지 않은 것을 성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쓰여진 언어에 따라 구별하면 구약성서 중에서 히브리말로 쓰여진 것은 39권, 희랍말로 쓰여진 것은 일부분 보충된 내용을 포함하여 9권(실제 계산에서는 7권만 셈한다), 신약성서는 27권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39+7+27=73권이고, 개신교에서는 39+27=66권으로 계산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예수님의 구원사업 완성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이야기할 때, 농담 비슷한 말로 묻는 내용이 잇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시기상 구별은 언제부터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 때(마태 27,51)를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을 제한하거나 어렵게 하던 그 가로막이 장애물이 제거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3. 성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이렇게 서론으로 말씀드린 내용들 다음에, 성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살펴 볼 차례입니다.

구약성서는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 이전의 시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한 바를 집대성한 것으로 인류의 기원, 죄로 인한 인류의 타락, 타락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계획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 출애굽, 모세의 율법, 가나안 정착,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 등으로, 구약시대 전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예시하고 있다.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잡이인 세례자 요한, 예수의 탄생과 활동 및 교훈, 그리고 그 뒤를 이른 사도들의 활동, 세상의 종말 등에 관한 기록으로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천지창조로부터 시작된 구약의 구세사(救世史)는 신약을 통하여 완성되어 세상의 종말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렇게 요약해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어떤 것인지를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성서를 읽는 것입니다.  다른 보통의 책을 읽는 것과는 분명 다른 삶의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모세 오경과 여호수아기>

오경의 처음인 창세기에는 인류의 창조와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류의 창조와 범죄, 하느님의 구원약속과 노아의 홍수, 바벨탑 이야기는 역사 이전의 이야기로서 ’원역사’라고도 합니다.  이 내용을 통하여 창세기를 쓰고 기록한 사람이 가졌던 의도는 ’있는 사실 그대로의 보고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앙의 기록이라고도 합니다. 그 신앙을 통하여 인류에게 다가온 선물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창세기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선택과 하느님 은총의 흐름을 따라 우리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이사악과 요셉의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것이 창세기입니다.

 

다음에 읽을 수 있는 출애굽기에는 이집트 땅에서 400년간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부르짖고 그 소리가 전달되어 모세라는 인물을 통하여 그 뜻을 전달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모세의 탄생과 성장, 모세를 하느님이 부르시고 파견하시는 이야기, 이집트 백성을 치는 10가지 재앙 이야기, 출애굽기의 절정인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 광야 생활과 시나이에서 십계명을 받는 이야기,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법의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이 두 번째 책 출애굽기의 내용입니다.

 

레위기는 사람들이 가장 읽기 껄끄러워 하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다음에 나오는 성서이다. 사랑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정들을 잔뜩 그려놓은 율법서로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녀에게 성서를 가르칠 때 제일먼저 이 책부터 알려주었다고도 합니다. 법이라고 치부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생각하기도 어렵다고 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을 사랑한 민족답게 우리와는 달리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어떻게 하면 실천할 수 있는지, 각종 제사의식과  깨끗하고 거룩하게 사는 모습에 관해 자세한 지침으로 마련한 것이 레위기입니다. 따라서 레위기는 겉으로 우리가 보는 것처럼 딱딱하고 형식적인 율법서라기보다 거룩하게 살기 위한 삶의 길(토라)이라고 할 수 있다.

 

민수기는 레위기에 이어지는 성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출발하여 약속의 땅 입구인  모압평야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갖가지 광야 체험을 기록한 책이다.  내용에는 일관성이 없다고 하는 편입니다.  율법과 설화 등 성격이 다른 여러 이야기가 섞여  있는 것이 특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경이라는 전체 흐름에서 읽어야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민수기에는 특별히 광야에서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반역행위, 그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과 용서, 자비들이 잘 나와 있습니다.

 

다음에 볼 수 있는 성서가 신명기입니다. 모압 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지나온  역사를 회고하면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정들을  다시 한번 일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기에 나오는 율법들이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에  두 번째 법전이라고도 할 수 있기도 합니다.  이 신명기는 모두 34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하느님의 백성답게 율법에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런 내용을 조금씩 달리하면서 세 번 걸쳐 설교합니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지휘를 받아  가나안 땅에 사는 다른 민족을 무찌르고 그 땅을  차지하여 지파별로 분배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이 마침내 이루어진다.  이 여호수아서는 모두 24장이다.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이 어떻게 정복되었고  분배되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서와 예언서. 시서와 지혜서>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이었지만, 그들이 언제까지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완벽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에 이르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에서 벗어나 왕정체제로 갑니다.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으로 이어지던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남쪽 유다 왕국과 북쪽 이스라엘 왕국으로 갈라집니다.  기원전 935년의 일입니다.  이 후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인생 길을 걸어가는 쌍둥이가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북쪽의 나라는 기원전 721년에, 남쪽의 나라는 기원전 587년에 멸망합니다.  그 이후 국가가 다시 서는 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바라시고 원하던 길에서 멀어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다가온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종일관 목소리를 높이어 마음과 행동을 돌려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자들을 선두로 해서 그들이 가던 길은 점점 멀어지는 방법을 택합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던 내용은 세상의 징조를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예수님도 당신의 비유(루가 12,54-55) 가운데서,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또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서의 내용을 자세하게 말하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서를 자주 읽고 그 뜻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맛을 더 훌륭하게 느끼실 것이며, 거기에서 더 커다란 삶의 의미를 찾으실 것입니다.  한가지 바람이기는 합니다만, 우리 고양동성당에서도 성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백 번 인간의 말을 듣고 감탄하는 것보다는 단 한번만이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푹 잠겨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4. 성서를 공부하는 방법들 소개

성서를 공부하는 방법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서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 뜻을 온전하고 완벽하게 알아듣기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살면서 어떤 사람의 소설책이 좋았다고 하면서도 두 번 세 번 여러 번 읽고 또 생각하고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지침서로 작용하는 책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혹 가다가 삼국지를 그런 책의 하나로 꼽기는 합니다.  그래서 평생 10번만 읽으면 인생에 성공한다는 그런 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듯 한데.... 잘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담겨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이 연구한 방법으로 완벽하게 알아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애초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욕심이야 저만치 앞서고 하고 싶은 일은 많다고 해도 그것이 어찌 완벽하게 됩니까?  안되죠.  그렇게 하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실망만 더 커질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위치와 능력, 그리고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에 따라서 성서를 알아들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요즘 성서공부로 등장하는 몇 가지 방법을 말씀드리는 정도로 하겠습니다.

그룹성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다음 주 견진성사 때에 오셔서 견진 미사를 집전하실 주교님이 외국에서 도입하여 토착화시키려고 애쓰신 그런 방법입니다.  구약에서는 칠단 창세기와 출애굽기., 신약에서는 마르코와 요한을 중심으로 공부합니다.  지식 전달의 방법과 생활 나눔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지난 1972-3년경부터 소개되기 시작한 방법이라고 합니다.

성서 못자리라는 것도 있습니다. 지금 서울교구 세종로 본당의 주임신부로 있는 안병철 신부님이 창안하신 방법이라고 합니다.  신학교에서 성서에 대한 내용을 가르치고 계시는 분인데, 그 공부방법을 소개하는 것이 내년이면 10년이 된다고 합니다.  이 공부방법은 신약편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성서라는 것이 삶의 모습과 떨어져서 형성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에서 시작합니다.  과거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알아듣고 어떤 삶의 결실을 맺어야 하는지를 연구합니다.  이 방법과 그룹성서는 접근 방법이 다릅니다.

또 다른 의미가 강조되기는 합니다만, 외형적으로 일단 성서를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성서 40주간’, 혹은 ’성서 100주간’의 방법, 지금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정’이라는 방법도 있기는 합니다.

 

 

 5. 우리 삶에 성서를 가까이하고 친숙하게 하기

우리 신자들은 과연 성서를 얼마나 접하고 사는가?  성서에 대한 이야기를 해 나가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서를 지나치게 어려운 것으로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성서는 내가 공부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의 결실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지, 그 열매가 결코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혹시라도 성서를 공부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의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집에 성서는 다 있죠?  그렇다고 한다면, 그 성서를 여러분들은 얼마만한 중요성을 가지고 대하십니까?  바빠서 못 보시죠?  읽으려고 하면서도 ’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하면서 그저 놓고 마시죠. 성서보다는 텔레비젼을 더 가까이 놓고 사시죠.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지내고 계신다면,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서는 자꾸만 멀어진다는 것을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사과나무 아래에 누워서 맛있는 사과를 보면서 "저 사과가 언제나 나에게 떨어지는가?  난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리면 위험합니다.  우리가 그 사과를 먹으려면 사다리를 놓거나 펄쩍펄쩍 뛰거나 막대기를 휘두르거나 해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해서 떨어지는 사과를 씻어서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누워서 기다리다가는 떨어지는 사과의 힘에 내 이빨이 부러지거나 내 눈두덩이가 밤텡이가 됩니다.

그렇게 성서를 대하지 않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여호와 증인의 제 1의 선교 대상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옳든 그르든 간에 우리가 성서에 대해서 지금까지 가졌던 자세와는 뭔가 다르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미사에 오실 때, 성서를 가져오십니까?  매일미사만 가져오시죠?  성가집과 더불어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에서조차 성서를 직접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뺏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개신교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비판하기는 합니다만 그들 가운데서 우리가 배울 점은 있습니다.  공자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나요?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라고 말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남을 비판하면서 닮기도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개신교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것 정도는 닮았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6. 성서를 보는 목적

우리가 성서를 봐야 할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방법을 알아듣고 우리도 그 기쁨에 조금이나마 동참하고자하는 목적입니다.  즉 하느님이 인류에 대해 하신 일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그 하느님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올바르게 접근하는 방법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바로 성서를 우리가 가까이 하는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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