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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을 교리편 정리.....2006-09-08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08 조회수5,736 추천수1
 

<2006년 9월 8일--믿을 교리편의 요약편 정리.....제1항부터 110항까지...>

-믿을 교리 편  전체 요약 정리


      1. 아주 긴 시간동안, 제가 여러분에게 우리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라 말할 수 있는 ‘믿을 교리’에 대한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듣기 힘드셨지요?  제 생각에는 자세히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사명 때문에 그렇게 했는데, 여러분들의 입장은 제가 가진 것과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열심히 설명한다고 했는데,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 길고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여러분들의 배움을 방해했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지만 제가 가진 목적은 여러분이 알아듣는 일을 방해하는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 그럼, 왜 그렇게 길고 자세하게 했느냐?  지금은 도대체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겠는데.......라고 제게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면서, 제가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여러분이 제가 말한 내용을 한꺼번에 다 알아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도, 여러분들이 차후에 특별한 시간을 내서 이 자리에 한 번 더 함께 하여 또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런 내용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는 믿음에 관련된 내용들이기에, 잘 들어야 한다는 뜻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3. 말하는 저도, 여러분 앞에 서 있으니까, 욕심을 부려서 긴 시간을 말씀드렸지, 아마도 여러분처럼 자리에 앉아서 듣는 사람이었다면,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난리쳤을 것입니다.  뭔 소리를 저렇게 오래한담......(투덜투덜..).......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위치가 다르고, 입장이 다르면 말이나 욕심도 달라지지요?  제가 사제로서 가진 사명감 때문에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힘들었을 고통도 무시했다고 우긴다면, 여러분은 제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4. 여러분이 저를 무조건 이해해달라고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이 교리시간에 편하게 놀 줄 알고, 대충대충 할 줄도 알지만, 여러분들이 애써 참여한 이 시간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서 여러분을 힘들게 한 것입니다.


      5. 자, 이제는 서론의 잡담에 해당할 이야기는 그만 두고........내용에 따라 짧게라도 요약을 하겠습니다.


      6. (1항-12항)까지 첫 번째 항목은 천주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천주교는 하느님이셨지만, 사람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좀 더 잘 알아듣고,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고자 세우신 참된 종교라고 했습니다.


      7.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배우는 방법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실현되고 그들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聖經)과, 교회의 전례나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성현(聖賢)들의 삶을 통해서 배울 수 있고 얻어들을 수 있는 성전(聖典)을 통해서라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그런 구별만 익힌다고 해서 하느님의 뜻을 저절로 배울 수 있거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꾸만 만나려고 해야 하고, 자꾸만 익히고 읽고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유효기간을 오래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8. 그리고 그 하느님에 대한 것은 우리 사람들의 지혜와 지성이 뛰어나다고 해서 저절로 알아듣거나 연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알려주셔야만 가능하다는 뜻으로, <계시(啓示)>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 내용은 9번항에 나옵니다.


      9. (13항-21항)까지에 있는 두 번째 항목은 천주(天主), 즉 하느님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교리서에는 하느님의 속성(屬性//a generic character//사물의 현상적 성질)을 사람들이 구별하고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이러저러한 분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구별은 사람이 경험으로 알았거나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경험하고, 사람이 이해하는 것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실제로 우리 삶에 함께 한다고 인정할 수 있는 몇 가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그 폭이 좁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별하는 하느님의 특성도 계시라는 항목과, 우리보다 앞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이론적으로 정리했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10. 특별히 20번 항목에, 세상에 고통이 왜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내용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두 고통 가운데 살아야만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상 사물을 바라보고 대하는 우리 사람들의 태도가 항상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고통에 대한 교회의 이런 대답이 지나치게 소극적일까요?  아니면 현실도피적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자유입니다만,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귀에 솔깃한 대답을 듣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11. (22항부터 25항)까지 나오는 세 번째 항목은 사람의 지성이 가 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신비인 하느님에 대한 사항입니다.  하느님은 신입니다.  우리는 인간이지요?  우리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제 1번 항목에서 읽고 들을 수 있습니다만, 이 하느님은 육체를 가진 존재인 우리가 직접 체득할 수는 없는 순수한 신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그 신이 한 분 이신 것은 분명하지만, 사람들은 그분의 존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에 대한 것만을 알아들을 수 있으므로, 세 분으로, 서로 다른 별개 존재로 보기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나 분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12. 하느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나누고 바라보지만, 그 세 위격 사이는 종속관계도 아니고 대립관계도 아니며, 상하구별이 있는 것도 아닌 관계로, 우리 신앙에서는 사랑의 관계로 알아듣고 설명하는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리 공평하고 평등하다고 해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13. (26항-32항)에 나오는 네 번째 내용은, ‘천지창조, 천사, 마귀에 대한 내용’입니다. 천지창조는 하느님(=구별하자면, 성부하느님)이 하신 일이고, 천사는 하느님을 일을 실현하는 영적인 존재, 마귀는 그 하느님의 일이 실현되는데 끊임없이 방해하고 허튼 길로 나아가려는 악마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마귀도 역시 천사로 시작했지만, 사람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받은 자유의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하느님과 대립의 길로 나아간 존재를 가리킵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가 변한 것이므로, 인간의 힘보다는 셉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마귀를 이기려면 하느님의 도우심을 얻을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14. (33항-43항)에 나오는 다섯 번째 항목은 ‘사람’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하느님은 인류의 최초 사람으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고 신앙에서는 말합니다.   물리적으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아담과 하와라는 한 조상에게서 나왔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애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혈통관계를 따져서 선후관계를 따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전해 내려오는 그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신중해야하겠지요?


      15. 최초의 사람을 만들고 하느님은 낙원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 최초의 사람들이 악에 기울어지게 되었고, 각자가 받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악의 길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원죄라 하고, 요즘에는 그 원죄를 사람들이 갖고 태어나는 것, 죄로 기울어지고 유혹에 쉽사리 넘어가는 경향으로 설명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게 되니, 최초의 인간은 얼마의 세월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낙원에서 쫓겨나지요.


      16. (44항-49항)에 나오는 내용은 원죄에 대한 것입니다.  자기 발로 호랑이 굴로 찾아들어간 것이 인간의 선택이었지만, 그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이 그대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으셨습니다.  원죄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각자가 아닌,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의 길로 간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자유였지만,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떠나는 것처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의지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길에서 다시 돌아서게 해주시는 것은 하느님만이 해 주실 수 있는 일이었고, 그 일은 훗날, 하느님께서 구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사람들에게 파견하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7. 인류가 자기 발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지만, 단 한 분, 인간으로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곤경가운데서도 구원사업에 동참하기로 했던 마리아는 이 원죄의 힘을 벗어나서 태어난 분이라고 신앙에서는 이야기합니다.  이를 가리켜 ‘원죄 없으신 잉태(혹은 무염시태, =immaculate,청순한, 순결한)’라고 합니다. 


      18. 구세주에 대한 항목은 두 개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50항-58항)까지에 나오는 그분의 탄생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 항목은 까지로 구세주의 활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19. (50항-58항)의 강생은 하느님의 두 번째 위격인 성자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에 관한 신앙 내용입니다.   순수한 영적인 존재인 분이신 하느님이, 인간 가운데 한 여성이었던 마리아의 순종을 기초로 하여, 사람으로 태어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입니다.  이스라엘 부족 가운데서 다윗왕가의 혈통을 잇는 분으로.  그를 이 세상에 낳으신 인간의 어머니는 마리아, 혹은 성모라 부릅니다.  그렇게 구세주로 활동하신 분을 가리켜 성자 예수 그리스도라 부르고, 다윗 왕가의 혈통을 이었던 요셉을 가리켜 양부(養父,기르신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으로서 우리가 고백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이신 하느님을 가리켜 당신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20. (59항-68항)에 나오는 ‘구속사업’은 예수님의 본질적인 행위를 요약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나시어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분이고,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신 분으로서, 우리가 신앙인이 나아가야할 길을 알려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분은 또한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조사하여 얻어낼 수 있는 결과는 아닙니다.   믿음의 고백이고, 인간과 같은 고통이나 과정을 겪어야 할 이유가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21. 그런데, 그 예수님이 기꺼운 마음으로 수난을 겪으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처럼 보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하겠다고 덤비지도 못한 일인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삶의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고, 우리가 하느님에게로 다가서도록 마음과 삶을 돌리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바라보는 것이 교회의 입장입니다.  62항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22. (69항-74항)에 나오는 내용이 천주 성령, 혹은 성신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힘이 인간에게 드러나는 세 번째 모습입니다.  그 역시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교회를 통하여 펼쳐지고 드러나는 힘이라고 알아들으시면 될 일입니다.  이 성령이 사람들에게 내려온 것은 예수님의 승천후, 10일이 지난 다음이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억하던 펜떼꼬스트, 즉 추수감사절에 해당할 오순절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성령이 오셔서 한 일은 흩어져있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통합하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이후로 갈라졌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한 자리에서 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를 ‘가톨릭’이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보편적이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퍼져있어서 수많은 언어로 하느님을 찬미하더라도 그 말뜻을 한 가지라는 것이 이 가톨릭이라는 말 안에 담겨있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23. (75항-89항)에 나오는 내용은 우리 천주교회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남기신 가르침을 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실천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제자들로 하여금 공동체를 세우게 하셨는데, 그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물론 그 교회는 하느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더욱 더 올바른 길로 가게 되는 것이기도 하구요.


      24.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세상에 남은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분들의 선택을 통하여 세상에 유지, 존속, 발전해왔습니다.  주교님들이 그 후계자로서, 하느님의 뜻에 맞춰 행동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예수님이 세우신 유일한 공동체, 참 공동체로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본연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25. (90항-94항)에 나오는 내용은 교회를 통한 역할의 두 가지를 설명합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과 죄를 용서하는 권한에 대한 것입니다.  세상 삶에서도 우리가 살듯이, 신앙인들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모든 성인의 통공입니다.  세상기준은 산 사람의 관계에만 적용하고 말지만,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관계도 말하는 것이 모든 성인의 통공입니다.  우리들처럼 살아있는 우리가 선행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도 함께 기억하고 기도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26. 죄의 용서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는 그 누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겠습니까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없애신 본보기와 그 가르침을 따라, 그리고 예수님의 은총을 힘입어 교회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합니다.  물론 죄의 용서에는 우리들 각자가 준비할 것도 있습니다.


      27. (95항-105항)에 나오는 것이 사말(四末)에 대한 것입니다.  죽음과 심판, 천당과 지옥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이 서로 돕고 살도록 함께 하기 위하여 연옥이라는 곳도 우리 신앙에서는 가르칩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영혼과 육신이 다시 갈라져, 육신은 땅으로 가고, 영혼은 육신을 관리한 모양에 따라서 하느님에게서 합당한 심판을 받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방향을 잡게 되는 것이 사말의 내용입니다. 


      28. 죽음을 죄의 벌이라고 가르치는 내용을 잘못 받아 들여, 죄를 짓지 않으면 죽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육신은 세포의 힘이 다하면 죽을 수밖에 없지요?  죽음을 죄의 벌이라고 할 때, 그 말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들어야합니다.  혹시라도 하느님의 자비를 조금은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연옥이라도 기대할까요?


      29.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세상이 완성되는 그 언젠가에 우리는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판단에 따라 개별심판의 결정을 확인받고, 영원토록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는 낙원인 천국에서 함께 하는 판정을 받느냐,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길로 가고 마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살이를 통한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도 알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30. 짧지만(?), 믿을 교리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다음 기회에는 신앙인으로서 지킬 계명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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