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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비자교리.....2006.7.21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08 조회수3,732 추천수1
 

7. 구세주(救世主) (50항-68항)

                                                        <2006-07-21>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을 다룰 차례입니다.  사람의 이해와 하느님의 계시로 알아들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느님 가운데, 창조주이신 분을 우리가 성부(聖父)라 고백하고, 인류의 구원자로 인간으로 이 세샹에 태어나신 분을 우리가 성자(聖子)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역할을 지속해 나가시는 하느님은 성령(聖靈)으로 고백합니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할 부분은 하느님에 관하여 인간이 나누어 설명하는 두 번째 위격(Persona), 성자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하느님을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로 설명한다는 것은 지난번 시간들 언젠가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이렇게 저렇게 나누어서 설명한다는 것은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서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계시에 의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알게 되었고, 그 하느님을 사람의 말로써 알아들을 수 있도록 좀 더 잘 설명하려다보니까 나오는 현상일 뿐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하느님을 설명하는 목적도 우리의 지식이나 상식을 넓혀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자는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좀 더 정성스럽게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듣고, 그렇게 알아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뜻을 구별해서 우리 삶에서 잘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구세주에 대한 내용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들처럼 감정을 가지졌으며,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들처럼 고난을 겪으셨고, 그렇게 사셔서 우리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50항과 51항은 구세주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시작이니까 함께 읽어보시죠.

50. (문) 구세주(救世主)는 누구시뇨?

   (답) 구세주는 예수그리스도시니 천주 성자(聖子)로서 사람이 되신 자시니라.

51. (문) 예수 그리스도라 함은 무슨 뜻이뇨?

   (답) 예수라 함은 구세주란 뜻이요, 그리스도라 함은 성유(聖油)로 축성되신 임금과 대제관(大祭官)이란 뜻이니라.


어떤 사람이든지 세상의 삶이 평안하고, 아무런 불만이 없고, 하는 일마다 척척 잘 되고 아무런 걱정거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단정적일까요?  어쨌든 나와 다른 사람들은 분명히 있겠지만,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일 없이 완벽하게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행복해보이고, 내가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분명 그 사람의 삶에는 힘겨운 일들이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삶을 힘겹게 감싸고 있을 때, 그런 일들에서 탈출하겠다는 생각이나 자세를 가진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직접 노력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될 것 같은 가능성이 보이거나 도전의식이 있을 때는 말입니다.  헌데, 여러번 했는데도 실패했다던가, 이제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정도로 힘이 빠졌다고 할 때에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런 경우, 철학적인 표현을 쓰면, 사람은 절대자(絶對者)를 찾는다고 합니다.  인간의 힘을 넘는 대상을 찾아서, 내가 겪는 어려움들을 이기고 달리 대하게 해달라는 힘을 청한다는 이야기겠지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그 절대자는 하느님입니다.  물론 그 절대자를 눈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저도 하느님이 어떤 모습인지 여러분에게 설명드릴 재간은 없습니다. 


이 시간은 제 개인적인 감정이나 경험을 중시해서 말씀드리는 시간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에서 알려주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으로 설명돼 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거나 만나지 않거나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선택과 결정입니다.  저는 그저 그 길에 가 닿을 수 있도록 설명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힘겨울 때, 그 삶을 바꾸어 줄 구세주를 찾습니다.  그 세상을 구원하는 분을 가리켜 우리 그리스도교회에서는 주님, 혹은 구세주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누구이겠습니까?  사실은 인간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어느 누구도 그 합당한 대상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 맘에 차지 않기 때문이겠죠.  제가 여러분에 말씀드리는 그 대상이 구원자(救援者)가 될 수 있다면, 나라고 왜 그 구원자가 될 자격이 없겠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인간의 표현을 써서, 인간으로 오신 구세주에 대한 교회의 설명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제가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해석이니까, 정통적인 가르침과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가운데, 한 위격이신 성자가 ‘하느님으로서 계시다가 심심해서 우리 인간사에 내려왔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방식을 곁들여 말하면, ‘사후봉사(事後奉仕)’를 확실히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드셨으니, 끝까지 책임지는 것입니다.  어떤 재료를 써서 만들었든, 그리고 그 피조물이 어떤 행태를 보이든, 당신의 뜻을 알아들을 만한 인간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구원의 길을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출발부터 제멋대로 행동했던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리가 없지요?  인간이란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에 계신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교육시켜 봐도 알죠.  어릴 때는 그저 모든 것이 부모님의 뜻대로 되는 것 같지만, 4살인가요, 그 정도만 넘어가면 벌써 자기 고집대로 합니다.  이러한 특성을 보이는 인간에게 하느님이 어떤 방법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알려 줄 수 있을까?  참으로 난감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느님이 택하신 방법은 당신의 아들을 사람으로 보내어  활동하게 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느님이 인간 육신을 취하셨다’해서 육화(Incarnation: appearance in human form. in+car(nis):육(肉=flesh)으로 들어가다)라고 합니다.


자, 길게 설명했습니다만, 위에서 함께 읽은 두 가지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먼저 50항의 내용은 ‘구세주(=The Savior)라는 말의 뜻은 ’세상을 구원한 주‘라는 뜻이고, 그분의 이름을 우리는 예수라고 부릅니다.  신앙에서는 말이지요.  이 예수라는 말의 뜻은, 이스라엘의 언어인 히브리말의 ’여호수아‘라는 말의 줄임말이고, 여호수아라는 말의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가리켜 세상의 구세주(=the savior of the world) 혹은 메시아(=the Messiah)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교를 빼고,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종교나 신앙에서 절대자가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오셨다고 가르치는 곳은 없습니다. 


51항에 나오는 말 가운데,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을 간단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으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두 번째 위격인 성자,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으로 특별히 선택되고 축성된 분’을 가리킵니다.  처음에는 보통명사였겠지만, 지금은 예수님에 대해서 적용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대제관이라는 말은 제관들 중의 으뜸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가지 신앙내용들 가운데, 사람으로 태어나신 과정, 또는 육화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그 과정을 살피는 ‘강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순서입니다.


    7.1 강생(降生: --- 신(神)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고 인간으로 태어나다

천주교를 가리켜, 계시종교라고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언어와 지식으로 그 모든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붙인 설명이기도 합니다.  이런 신비스러운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서도 적용될 것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기만 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저절로 다 되지요?........라고 물으면, 대답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사실은 우리들 각자가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우리 몸에 일어나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음식이 들어가면 왜 입에서는 그것을 잘게 부스라고 하는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왜 그것을 위장으로 갈 때까지 식도가 연동운동을 하는지 설명할 재간은 없습니다.  물론 간단하게 그 모든 일은 뇌가 시키는 일이니까....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뇌는 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는지.....그리고 뇌가 그렇게 하도록 실제로 지시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우리가 알아듣거나 설명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몰라도 음식을 먹으면 알아서 자동적으로 일이 진행됩니다.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소화시킨 다음에 양분을 거두어들이고, 그 양분을 다시 더 작은 다른 물질로 바꾸어 혈액을 통해서 운반하기도 하고, 우리의 세포끝까지 이동시켜 사용하기도 합니다.  왜 그런 과정이 그렇게 알아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처럼, 하느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강생(降生)’이라는 신비도 인간이 온전히 알아듣거나 해석할 수는 없는 신비(神秘)입니다.  적어도 인간이 자신만의 고집을 갖고,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세를 버리지 않으려고 할 때는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영적(靈的)인 존재이신 분이 육(肉)을 취하셨을까?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하셨을까?  이익을 추구하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 움직이는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이 강생 및 육화의 신비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먼저 52항과 53항의 두 항목입니다.

52. (문) 천주 성자 어떻게 사람이 되시뇨?

   (답) 천주 성자, 영혼과 육신을 취하사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나심으로 사람이 되시니라.

53. (문) 동정녀 어떻게 예수를 낳으시뇨?

   (답) 동정녀 성신의 전능으로 예수를 잉태하여 낳으시니 그 몸은 전과 같이 아이(=동정) 몸이니라.


하느님이 인간이 되는 과정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신비이고, 그것은 계시이며, 그것은 예전에 일어난 일이기에 지금처럼 과학이라는 잣대를 갖고 움직이는 기준으로 설명하려면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 일 투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믿음이고, 그 믿음은 2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유지돼 왔고, 그 믿음은 우리가 살아온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경에는 구세주의 강생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도 있고, 그 실현 과정을  기록한 부분도 있습니다.  성경에 쓰인 내용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경에 나온 기록의 많은 것들은 ‘믿음의 기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대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그렇게 믿음의 기록들을 과학의 잣대로 해석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4절부터 16절 사이에는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原罪)’의 처벌에 대한 내용<성경 5면>이 있습니다.  이 처벌 내용 가운데, 악의 힘으로 등장한 뱀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라고 창세기에 나오는데, 이 부분을 가리켜 구세주에 대한 첫 번째 예고라고 합니다.

NAB에서 창세기 3,14 : “I wil put the enmity(=증오,적의) between you and the women, and betweem your offspring(=자식,자녀, 자손, 후예) and hers;  He will strike at your head, while you strike at his heel.


구약성경, 이사야예언서 7,14<1722면>에는 “주님께서 몸서 여러분에게 표징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탱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 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임마누엘 예언이라고도 합니다.  이 예언은 유다국가의 임금이었던 히즈키야가 다스리던 나라에 아시리아라는 나라에 쳐들어왔을 때, 그 나라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 나라는 그 침략을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라고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전쟁에서 한판 붙으면 우리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될지 저수지 물의 분량을 보러 내렸갔던 임금에게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NAB에서 이사야 7,14 : “Therefore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this signs: the virgin shlee be with child, and bear the son, and shall name him Immanuel.


    신약성경, 마태오 복음 1장<1-2면>에는 하느님의 두 번째 위격인, 예수그리스도께서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하여 태어나신 과정을 간략하게 적고 있습니다.  또한 루가복음 1장-2장<125면-132면>에는 좀 더 설화의 형식을 빌어서, 천사가 마리아라는 여인에게 찾아오고, 천사이 예고대로 마리아가 결혼도 하지 않고, 합일(合一)의 잠자리를 거치지도 않은 몸으로 아기를 갖게 되고, 그 아기가 태어나게 되는 과정까지 담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하느님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을 이해하는 것이 신비스러운 일이었던 것처럼,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일도 이처럼 신비로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마리아라는 여인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셨고, 우여곡절 끝에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시작합니다.  사람의 몸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듯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마리아라는 동정여인에게서 육체를 취하신 것입니다.  이 때에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다윗의 후손과 정혼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 예수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임금, 다윗의 정통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53항에서 다루는 내용이 여러 가지 판단을 낳습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그다지 중요할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낳고도 정말로 처녀였는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이리저리 달라진다고 해서, 우리 삶에 무슨 차이가 날까요?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 말에 목숨을 겁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다음에도 동정녀라고 하는 것은 교회공동체의 억지주장이고 말이 안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다음에 동정녀이든지 아니든지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무슨 차이가 날까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고도 동정성을 유지했느냐 하지 못했느냐 질문하며 그 답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들이 갖는 못된 심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류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방법을 사용하신 하느님이 ‘당신의 힘으로 여인을 보호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즉 사람의 상황으로 치면,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없던 상황(=간음한 여인은 공동체 앞에 끌려나와서 돌에 맞아 죽어야한다, 신명기22,13-29;혼인과 처녀성과 간음에 대한 규정)는 상황에서, 앞뒤를 재지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기로 했던, 특별한 사람에게 그러한 은총을 하느님이 내리신다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문제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뿐 아니라, 하느님의 일까지도 우리의 생각대로 좌우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분명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도전이야 인간의 특성이고, 자유이지만 안되는 것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분수를 알아야.......올바로 살 수 있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뱁새가 황새를 따라 똑같이 갈 수도 없지만, 그렇게 가려고 하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기 딱 좋은 것이지요.  불가능한 일은 도전하지 않아야 삶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입어 받아들이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세계에도 있는 것 없는 것 모조리 뒤집어서 속시원한 것도 있지만, 적당히 가려져있고, 적당히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있을 때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혼인하는 두 남자와 여자가 상대방에 대해서 남김없이 모두 알 수도 없지만, 또 안다고 하면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모르니까 서로를 위해서 맞추려고 애쓰고,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선물도 주는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이 보존해주시는 깨끗함 그것이 바로 ‘동정’입니다. 그리고 신앙에서는 하느님이 그 일을 해 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끝으로 한가지 더 가톨릭교회에서 마리아의 동정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의 세계에서 경험하지 못하고 체득할 수 없는 일을 해주신 하느님을 공경하자는 것입니다.  말하는 바를 정확히 꿰뚫지는 못합니다만,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서 개신교는 절대적으로 반대합니다.  인간으로 예수를 이 세상에 낳아준 여인 마리아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대하거나 무시하면서도, 그로부터 태어난 하느님의 구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율배반의 모습입니다.  어떤 대상이 귀중하게 되었다면, 그 싹을 간직했던 과거 역시도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한 인류구원의 길을 시작하셨다면, 그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중요성도 따로 보존해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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