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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견진교리: 전례생활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1998-11-17 조회수7,417 추천수3

견진 교리 교안( 5 )

        1998. 11. 17 (목)

   제목 :  전례생활에 대하여

 

  0. 서론

오늘은 견진교리를 하는 다섯 번째 날입니다. 지난 4번째까지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사에 대해서, 기도에 대해서, 성서에 대해서,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여러 가지를 말씀드리기는 했습니다만, 말씀드린 것을 자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들었으며, 앞으로 여러분의 생활에 그것을 어떤 방법과 모습으로 드러낼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했던 것은 조금 준비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처럼 사람이 조금만 준비하면 다른 사람들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준비해서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을 삶으로 보이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생활로 드러내려고 할 때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이유는 인간의 입장에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은 완벽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사람의 바램은 저만치 앞서가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완벽하게 하고 싶기는 한데, 내 힘은 부족하고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하겠습니까?

 

  1. 해결을 위한 말씀 한 가지 :  청지기 비유 (루가 16,1-8 함께 읽기)  (신약 편 145-146면)

 ** 위에 제시한 성서를 함께 읽는다 **

청지기<steward: 양반 집 수청방(守廳房:청지기가 거처하는 방)에 있으면서 잡일을 맡아보던 하인>의 비유 이야기를 함께 읽으셨습니다.  자신의 호구지책(糊口之策:먹고사는 방책)에 위협이 다가오면 사람의 행동은 빨라집니다.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위에서 제가 시작으로 질문한 내용< : 사람이 갖는 욕심만큼이나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따라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답이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축낸 청지기를 부자인 주인은 칭찬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한번 주어진 선물이 어떤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무관심하거나 간섭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에서 통하는 일이고, 하느님은 당신이 베푼 선물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관심을 갖습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칩니다.  이 소리는 하느님이 할 일 없어서, 시간이 남아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받은 선물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일 들 가운데는 간단한 것에 진리가 담겨있는 것이 많습니다.  많다고 자신할 수 없다면 어느 정도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질문한 것의 답은 발버둥치는 것이고, 삶에서 성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신앙인으로 발버둥치고 성실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발버둥친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몇 년 전에 누군가가 저에게 물은 것에 대한 응답으로 제가 한 답입니다.  그 어떤 친구는 제게 어떤 생각과 자세로 사제생활을 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언제나 답할 말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제 삶을 돌아보니 그것이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발버둥친다는 표현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전에 대학입학 학력고사가 있었을 때, 체력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학능력 시험으로 바뀌었으니 그 내용에는 어떻게 변함이 생겼는가는 모르겠습니다.  남자의 경우에는 철봉에 매달려 한번이라도 더 턱걸이를 하려고 애를 쓰고, 여자의 경우에는 그 철봉에 오래 매달려 있으려고 애쓰는 모습, 떨어지지 않고 한번이라도 더 하려고 온 몸을 비틀어대고 마지막 안간힘을 다 쓰는 것 그것이 발버둥치는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고, 사제로 살아가면서 그런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하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습니다.  같은 입장에서 제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한 가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격언에도 있듯이, ’첫 술에 배부르랴?’하는 말처럼, 전례에 참여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한 가지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견진성사라고 하는 네 글자로 지칭되는 이 교육을 위해서도 여러분은 오늘까지 벌써 다섯 번째 이곳에 나오셔야 했고, 오늘까지 힘들지만 들으셔야 했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금요일 당일 예절이 있고, 그 예절의 준비를 위해서는 목요일에도 나오셔서 자리확인을 하고 최종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약 90명, 여러분들이 교리에 나와서 제 이야기를 듣는 본인의 자세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쁨에 넘칠 것까지야 없겠지만, 이 견진교리 시간이 기다려지는 분들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저도 여러분들에게 재미없게 교리를 말하는 탓도 있겠지만, 우리의 신앙이 마음 설레는 삶의 기쁨으로 이끌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여러분들이 갖는 마음 자세도 고쳐 잡아야 할 요소가 있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항상 재미있고 즐겁게 살려고 합니다.  요즘의 텔레비젼과 영화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재미있고 즐겁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그 뜻을 어떻게 알아듣고 있으며, 어떤 방법을 통하여 그것을 얻으려고 하는가?  재미있고 즐거운 것은 흔히 가볍습니다.  가볍다는 것은 당장에는 우리의 엉덩이가 바닥에 붙어있지 못하도록 들썩거리게 하지만, 우리의 생활에 지속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허허......"하고 웃고 지낼 수 있는 것은 되겠지만, 오래도록 남아서 내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못된다는 것이겠죠.

 

  3.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은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종류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줄 것이 더 많은 것처럼 보기 일쑵니다. 나 혼자 일을 하려면 많이 움직여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한 가지씩만 나를 도와준다면, 나의 모습은 금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형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한계가 있는 일이고, 그렇게 바라보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일은 기계 혼자서 결코 하지 못합니다.  이 물건이 저기로 옮겨지더라도 그것은 사람의 의지가 들어가야 합니다.  기계를 사용하면 사람이 맨손으로 움직이려고 시도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기계 혼자서는 절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전례생활에는 첫 번째로 미사에 대한 자세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귀중한 전례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이것이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찾듯이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거나 현재상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찾을 방법입니다.

오늘 조선일보(1998. 11.17. 26면)에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오억근’이라는 분이 ’광주  과학기술원 내에 외국인 전용식당을 건설하는데 써 달라며 1억 5천만원을 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기사로 난 선한 일 이전에는 실험연구비 지원으로 쓰라며 2억 5천만원을 지원했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나와 있었습니다.  아마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이런 일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깝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3.1 주일미사와 평일미사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떨까?  그것을 가장 먼저 생각해보면 우리 삶의 자세를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고양동 성당에 사는 신자들의 참여도에 대한 숫자놀음은 하지 않겠습니다.  신앙을 여러분들이 억지로 지켜나가실 것이 아니라면, 혹시라도 다른 자세를 가져달라고 부탁하는 것밖에는 다른 것이 아마 없지 않을까 합니다.  미사는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업적을 우리가 기억하는 잔치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개신교의 예식과 비교하여 천주교의 예식에 대하여 형식적이라고 비판하고 낮추어 보려는 생각들이 강하기는 합니다만, 그것 역시도 우리의 것에 대한 자긍심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미사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인간에게 본보기를 보이신 일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보이신 본보기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가장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는 사람들이 인간의 일에 대해서조차 완벽하게 알고 시작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해 나가면서 그것이 터득되는 과정을 밟습니다.  하물며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맞추려고 하는 경우야 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3.2 고해성사를 비롯한 다른 성사에 대한 우리의 자세

사람은 자신이 살아있을 때 변화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좋은 열매도 다른 사람보다 내가 먼저 맛봐야 기분이 좋은 것이고, 자녀가 혼인하고 잘 사는지 그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것도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갖는 바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지금까지 준비한 것이 견진성사입니다만, 이 시간을 통해서 듣고 보고 다짐한 것들을 꾸준히 실천해 나가는데는 다른 성사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고해성사에 빗대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희 천주교 신자들은 주일에 미사에 빠지면 커다란 통속에 들어가야 한다며.....", "나는 고해성사 하기 싫어서 미사에 빠지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심심찮게 씁니다.   역시 우스개 소리이기야 하겠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갖는 삶의 자세는 ’부담감’ 하나뿐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의 기쁨을 이야기하라면 아마도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며, 그렇게 된다면 잘못되는 일이 바로 그러한 자세입니다. 사람은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하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에 불과할 뿐 그대로 실행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3.2 기도의 몇 가지 형태 --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우리는 많은 경우 기도합니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했으니, 내 생각만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서 누구에게나 권장할 만한 일이 기도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과연 누구를 기억하고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우리자세를 돌아보게 하는 한 가지 요건이 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기도한다고 하면, 한풀이를 기억합니다. 혹시라도 나 자신만을 위해서 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 조금 넓어진다면 내 가족과 내 친척과 친지들만을 위해서 말해놓고 ’나는 기도 다했다’고 하지는 않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을 살맛 나는 곳으로 바꾸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가져야만 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에 우리가 머무는 본당의 모습도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나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4. 전례이외의 생활 -- 성서 지참하여 함께 읽기 운동 전개.

12월부터 당분간 본당에서 매일미사를 구입하여 여러분들이 앉는 성당좌석에 비치하겠습니다.  성당에 돈이 많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취소하지 않아서 인쇄에 문제가 생길 기간동안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부터 견진교리에 오실 때 성서를 가져오셨던 것처럼 성서 지참을 생활화하겠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개신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드렸던 사항의 연장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모습을 비참하게 보면 볼수록 그 애석함은 한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한 가지 비결은 우리 스스로를 행복하게 보는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의 동참을 바랍니다.  또한 집으로 돌아가시면 그렇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독지가도 구합니다. 성당에서 성가집과 신구약 합본성서를 비치하는데 도움을 주실 분은 제게나 사무실에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원칙적인 것은 개인들이 가져오셔서 보시고 다시 가져가시는 것을 기본으로 하겠습니다. 굳이 가져가기 힘들다고 하시면, 성당에 본인의 이름을 써서 놓고 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아마 당분간은 성서가 조금은 위치가 변동이 되거나 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우리 신자 여러분들이 성서공부에도 시간을 내셔서 함께 할 수 있기를 권장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집에 고이 모셔 놓는다고 해서 싹이 트거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뜻을 알아들으려고 애를 써야만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나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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