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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11: 신앙의 특성(154~160항)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19 조회수2,510 추천수0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1. 신앙의 특성(「가톨릭 교회 교리서」 154~160항)


하느님을 믿지 않은 책임은 회피할 수 없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군이 타냐에게 묻습니다. “넌 왜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니?” 타냐는 뜻밖의 질문에 당혹스런 표정을 짓습니다. “그때는 전쟁 중이었어요. 거리는 온통 불바다였고 저를 보호해 줄 상황이 아니었어요.” 장군이 타냐에게 다시 묻습니다. “아버지와 헤어진 진짜 이유가 뭐야?” 타냐는 가슴 속에 묻어둔 말을 꺼내놓습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제 손을 놓아버렸어요.” 장군이 말합니다. “그렇구나. 사실은 그 사람은 네 아버지가 아니란다.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의 손을 놓지 않는 법이지. 너의 친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란다.”(참조 「통하는 기도」, 차동엽)

 

타냐는 아버지가 자신의 손을 놓았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잃었습니다. 믿음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이 은총이기에 믿음은 은총의 열매인 것입니다.(153항 참조)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믿음을 주시기 위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우리는 ‘성령’, 혹은 ‘은총’이라 부릅니다. 아버지가 자녀의 손을 놓지 않듯, 하느님도 은총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은총만으로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 은총을 받는 사람의 ‘결단’이 요구됩니다. 믿음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 것입니다.(154~155항) 사랑은 초대하지, 강요하지는 않습니다.(160항 참조) 그 초대에 응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관계는 항상 상대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는 한에서 인격적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개신교의 교리와 차이가 발생합니다. 개신교는 마르틴 루터의 주장대로 믿음은 은총만으로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에덴동산에서 벌을 받아야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아니라 죄를 짓도록 방치하신 하느님이 되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은총을 주십니다. 다만 받고 안 받고는 인간에게 달린 것입니다. 이를 인간의 ‘자유의지’라 합니다.

 

이 자유의지 때문에 ‘책임’이 발생합니다. 믿음에 인간의 결단이 들어가지 않으면 인간이 심판받을 이유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칼뱅과 같은 개신교 신학자는 ‘예정설’을 다시 꺼내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오로지 하느님 은총의 열매라면 심판의 근거가 없어지기에, 어쩔 수 없이 심판은 하느님이 처음부터 결정해 놓으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니교에 빠져있던 아우구스티누스도 처음엔 예정설을 믿었지만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아 이렇게 말합니다. 

 

“믿기 위해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158항)

 

이해하는 것은 지성을 통한 인간의 노력입니다. 믿음을 위해 인간의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지성으로 내려지는 결단의 결합입니다. 

 

믿음이 은총의 열매이지만 또한 인간의 선택이기에 믿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무한한 믿음의 근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표현 앞에서도 믿지 못한다면 이는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을 믿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믿음은 관계를 목적으로 합니다.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믿기로 결단하면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전의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됩니다. 이전의 관계를 청산해야 하고 상대와 맞추기 위해 오랜 습관도 버려야합니다. 이렇듯 누군가를 믿으면 변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믿게 되면 이전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변하기 싫어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선택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믿는 것도 인간의 결단이고 믿지 않는 것도 인간의 결단입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3월 17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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