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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펀펀 사회교리: 원수인 돈을 사랑하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30 조회수4,621 추천수0

[펀펀 사회교리] (67) 원수인 돈을 사랑하자 ① 돈을 대하는 인간의 근본적 자세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지 생각해야

 

 

“으이구, 돈이 원수지 원수야!”

 

아침부터 베드로가 신문을 들고 구시렁대고 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신문 기사를 들이대며 비장한 듯 말을 한다.

 

“신부님 좀 보십시오. 그놈의 돈 때문에 또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지 뭡니까!”

 

[4년 전 생활고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송파 세 모녀 사건’과 유사한 모녀 사망 사건이 충북 증평에서 발생,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남편과 사별하고 빚 독촉에 시달리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40대 여성이 4살 난 어린 딸과 함께 숨진 지 두 달여 만에 발견됐다.](2018년 4월 8일 연합뉴스)

 

신문기사를 찬찬히 보던 백 신부가 혀를 차며 말한다. 

 

“그러네요. 돈이 원수네요. 제가 지난주에 동물 복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람에 대한 복지가 우선 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던 기억나시죠?!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복지 사각지대가 심각하게 많습니다. 4년 전 ‘세 모녀’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사회보장체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안타까운 선택을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1년쯤 지나서 ‘국민기초 생활 보장법’을 ‘맞춤형 급여 제도’로 개정했기에 이런 일이 더 이상 없으리라 기대했었는데….” 

 

“신부님, 우리도 복지에 대한 일을 하고 있지만, 재원부족이라든지 인력부족 때문에 복지 대상자를 찾아 가기가 힘든 실정 아닙니까? 또 지자체나 정부에서 제시하는 복지혜택 대상자 선정 기준이 너무 까다롭기도 하구요. 이래저래 참 쉽지가 않습니다.”

“베드로씨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런 물질적 부족함이나 제도의 부족한 점만 한탄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돈을 대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자세가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돈을 대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자세라…. 흠, 사회교리로서의 돈 문제인가요? 역시 신부님은 주제 선정을 하는 능력이 신기하리 만치 탁월하십니다. 사회교리 분야가 아닌 것 같은데, 이야기하다보면 사회교리가 맞으니 말입니다. 어쨌든 지면 그만 잡아먹고 이야기 계속 하시죠.”

 

“하하, 이야기 시작합니다. 먼저 돈의 역사를 알아보고, 이어서 성경 말씀을 들어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와 돈에 관해서 묵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제목이 왜 ‘원수인 돈을 사랑하자’냐고요? 마태오복음서 5장 44절 중에,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에 말했듯이 돈이 원수 아닙니까? 사람들은 가끔 지긋지긋하게 싫은 것들을 원수로 여기고 삽니다. 그러면서도 또 그 지긋지긋한 원수가 없으면 죽고 못 삽니다. 예를 들어 술만 보더라도 그렇게 술 때문에 집안 망하고 인간관계 다 깨어지고 고생고생하고도 또 그놈의 원수인 술을 사랑하죠. 우리는 돈, 술, 담배…. 그 원수들을 사랑하고야 맙니다. 아이고, 지긋지긋해라!”

 

* 백남해 신부(요한 보스코·마산교구 사회복지국장) - 마산교구 소속으로 1992년 사제품을 받았다. 마산교구 사회사목 담당, 마산시장애인복지관장, 창원시진해종합사회복지관장, 정의평화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가톨릭신문, 2018년 4월 29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68) 원수인 돈을 사랑하자 ② 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베드로씨는 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부님, 제발 어려운 질문 좀 쉽게 하지 마십시오. 사전에 보면 ‘돈은 일반적인 유통수단으로 사물의 가치를 나타내며, 상품의 교환을 매개하고, 재산 축적의 대상으로도 사용하는 물건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뭐 이런 거 물어 보시는 건 아니시죠?”

 

“아니 사전적 의미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좀 더 인문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욕망의 무게, 인간욕망의 단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이 자급자족하던 고대 부족사회에서는 돈이 필요 없었습니다. 각자 잘 하는 일을 하면서 공동체에 기여하며 살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이 모이고, 많은 물질 속에서 더 가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돈을 만들어냅니다. 돈이란 것이 처음엔 교환 가능한 물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금, 은, 동, 철로 진화하고, 종이돈으로 바뀝니다. 이제는 신용 화폐가 대세죠. 거기다가 비트코인이니 하는 ‘가상 화폐’까지 등장했습니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미래에는 어떤 화폐가 나올까요? 2011년 개봉된 미국영화 ‘인 타임’에서는 시간이 돈으로 쓰입니다. 커피 한 잔에 4분, 권총 한 정에 3년…. 이런 식입니다. 부자는 다른 사람의 시간을 모아서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을 우리는 씁니다. 실제 시급으로 돈을 계산하니, 시간이 돈과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냥 가만히 있는 시간이 돈이 되는 것은 아니죠. 무엇이든 돈을 주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할 때 시간이 돈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신뢰가 형성 되어야 돈이 돈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개인인 내가 종이 한 장에 ‘돈’이라고 쓴다고 해서 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원하고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인된 기관(조폐공사)에서 발행할 때 돈이 됩니다. 하지만 공인된 기관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믿음을 얻지 못하면 제대로 된 돈이 아닙니다. 짐바브웨 달러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2009년 초에 ‘100조 짐바브웨 달러’로 고작 계란 세 개를 살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자국 화폐 발행을 중단하고 미국 달러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랜드화’를 공식 화폐로 쓰기에 이릅니다. 돈이 사회적 신뢰를 잃어버리면 일어나는 극단적인 현상입니다. 이 이야기를 거꾸로 의미 주어보면, 내가 하찮게 여긴다면 돈은 아무 가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돈 대신 내가 가진 재능을 기부하고 적립하였다가, 내가 필요할 때 다른 사람의 재능을 기부 받아서 생활하는 ‘대안 화폐’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정이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요?” [가톨릭신문, 2018년 5월 6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69) 원수인 돈을 사랑하자 ③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신부님, 지난주에 말씀하신 ‘대안화폐’가 마음을 확 끕니다.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그래요? 베드로씨가 인정이 살아있군요. 대안화폐는 기존 화폐질서의 문제점들(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환경보호 등)을 보완하기 위하여 생겼습니다. 그래서 ‘대체화폐’라고도 부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대안화폐’는 사회운동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크게는 도시 단위로 할 수도 있고요. 작게는 가정에서 할 수도 있습니다. 아빠 생일에 아이가 돈으로 산 선물 대신 ‘어깨 주물러 드리기 5회’, ‘구두 닦아 드리기 3회’ 이런 심부름권을 드리잖아요. 그것도 큰 의미에서 일종의 ‘대안화폐’가 되는 것이죠. 한 도시가 ‘대안화폐’를 실시한 것은 대표적으로 1983년 캐나다 토론토 부근의 광산 마을 ‘코목스 밸리’에서 ‘마이클 린튼’의 제안에 따라 시작된 것이랍니다. 자, ‘대안화폐’는 이정도 하고요. 어른들 이런 말씀 많이 하시죠.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 맞는 말씀입니다. 돈 가지고 잘난 체하고,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인식으로 뻐기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말입니다. 아무리 돈이 좋고 대단해도 ‘돈은 사람보다 한 수 아래다!’ 이런 말이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현실도 그럴까요? 돈을 사람이 만들기는 했지만 과연 사람이 돈을 지배하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돈의 주인이 아니라 돈이 사람을 부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참 무서운 말로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옛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러게요 신부님, 돈 때문에 자식까지 팔아넘기고, 부모를 살해하기도 하고, 형제간에도 칼부림을 하고, 친구도 배신하는 것이 드라마나 소설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

 

“자, 이 악마의 친구인 돈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을까 살펴볼까요? 성경에 돈이나 재물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돈이 인간 생활의 중요하고도 큰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성경검색 창에 ‘돈’이라고 입력하면, 돈에 관한 검색어가 전체 448건이라고 나옵니다. 정말 많이 나오죠. 신앙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696건), 소망(15건), 사랑(1875건)이죠. 소망보다 돈이 더 많이 나온답니다. 성경 말씀 중에서 마태오복음 6장24절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씀만큼 예수님께서 돈에 대하여 정확하게 밝히신 곳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200주년 기념 성서’ 번역을 보면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표현 중에서 ‘재물’을 ‘마몬’이라고 표현합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5우러 13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70) 원수인 돈을 사랑하자 ④ 칠죄종 중 탐욕의 마귀 ‘마몬’

 

 

“신부님 지난주에 하시다 만 ‘마몬’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십시오.”

 

“예, 베드로씨. ‘마몬’은 ‘칠죄종’과 연결된 일곱 마귀 중 하나입니다. 칠죄종과 마귀를 연결시켜 보면, 식탐의 마귀 바알제불, 탐욕의 마귀 마몬, 색욕의 마귀 아스모대오스, 질투의 마귀 레비아탄, 나태의 마귀 바알 프오르(벨페고르), 분노의 마귀 사탄입니다. 이 중에서 마몬은 탐욕의 악마(마귀)입니다. 마몬이란 말은 시리아 말로 ‘부(富)’, ‘돈’이라는 뜻입니다. 마몬이 세력을 갖게 된 것은 중세시대부터입니다. 중세시대 가톨릭의 부패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그 이전에는 부를 축적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 또한 재물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 이전에는 마몬이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중세에 이르러 ‘부르주아’층이 출현하고, 교회 또한 돈에 대한 욕심을 부리게 되자 마몬이 중요한 악마로 여겨집니다. 마몬은 늘 땅만 보고 다녔는데 뭔가 떨어진 게 없나 해서랍니다.(여러분은 하늘을 보고 다니시죠?) 황금만능주의를 뜻하는 ‘맘모니즘(Mammonism)’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재물(마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돈이라는 마귀를 따를 것인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섬길 것인가 선택하라는 준엄한 질책이십니다.” 

 

“신부님, 하느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지만 돈과 하느님을 같은 선상에 놓고 선택하라는 것은 좀 과한 말씀 아닐까요? 돈에도 급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기를 치거나 도둑질을 해서 번 더러운 돈도 있을 것이고, 열심히 일해서 정당한 임금으로 받은 값진 돈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냥 뭉뚱그려서 돈을 마몬(악마)으로 규정해 버리니 당혹스럽습니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고 부자가 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말입니다.” 

 

“베드로씨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사실 저 조차도 이 말씀은 거부감이 강하게 드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정당하게 노동과 노력을 들여서 버는 돈은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힘들지만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일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은 그 사람의 노동 가치가 더 크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래서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을 우리는 좋아하고 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씨 말처럼 돈을 마몬인 악마로 규정해 버리면 열심히 일하는 건전한 노동자들이 좀 거시기 해집니다.”

 

“앞으로 월급 올려 달라는 말은 못하겠습니다. 그걸 노리신 건 아니시죠, 하하. 농담입니다. 어쨌든, 돈에 대한 성경 말씀 한 구절이 아주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앞으로 신부님 말씀이 기대됩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5월 20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71) 원수인 돈을 사랑하자 ⑤ 일용할 만큼의 양식

 

 

“정당하게 열심히 일해서 번 돈 조차도 악마, 마몬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잘 와닿지가 않습니다. 좀 더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베드로의 고민에 백 신부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제 경험을 한 가지 말씀 드릴게요. 8, 9년 전쯤 4대강 반대 시국미사가 있었습니다. 그때 부산교구 신부님께서 강론을 하셨는데 주님의 기도 중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부분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특히 사제들이 입으로는 일용할 만큼의 양식, 하루 먹을 것만 주시면 된다고 기도하면서, 실제로는 주머니에, 통장에, 곳간에, 얼마나 많은 것을 쌓아 두고 있는가?! 이렇게 우리 스스로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와 다른 삶을 살면서, 재물의 유혹에 자신을 내 맡기고 마몬의 자식이 돼 가는데, 어떻게 4대강을 파 뒤집어 엎어 가면서 재물을 탐하는 악마 같은 그들을 꾸짖을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그들의 친구와 같을 수 있다. 우리 스스로 가난해지고, 마몬보다 하느님을 택하게 된다면 세상 권력자들도 변화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라도 하루 먹을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면서, 더 이상 내일 먹을 것을 쌓아두지 말고 살아가자”라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자신이 늘 더 많은 돈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뭐 그렇다고 그 이후 제 삶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늘 살던 타성에 젖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생각합니다. 제가 너무 넘치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정당하게 받은 월급이나 수고비라 하더라도, 가난한 이웃과 나누지 못한다면 그것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배신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돈이라는 것, 재물이라는 것이 내가 수고해 벌었더라도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아서 가난한 이웃에게 가야할 몫을 쌓아 둔다면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신부님, 참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물질에 찌들어 사는 현대 신앙인들이 꼭 새겨야할 말씀 같습니다. 마태오복음 6장 26절에 나오는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는 주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겠습니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씨가 저보다 말씀에 대한 믿음이 더 깊은 것 같습니다. 참 좋습니다. 좀 더 이야기를 해볼까요. 결국 아무리 귀한 것도 하느님과 그것 중에 택해야 한다면, 자식까지도 하느님께 봉헌했던 아브라함(창세기 22장)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바라십니다(사실 현실적으로 너무 과한 요구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변명 아래 돈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 일상화됐습니다. 결국 하느님과 마몬 중에 마몬을 택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5월 27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72) 원수인 돈을 사랑하자 ⑥ 부자는 무조건 하늘나라 못 간다?

 

 

“베드로씨는 돈이 얼마나 있으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신부님, 어려운 질문을 그렇게 가볍게 하십니까? 얼마면 만족하다니요? 돈이야 얼마가 있든 만족이 되겠습니까? 있으면 있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다다익선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면 신부님은 얼마나 있으면 좋겠습니까?”

 

“(베드로의 질문을 회피하는 비겁한 백 신부)그건 그렇고, 얼마만큼 돈이 있어야 부자 소리를 들을까요? 옛날에는 부자하면 백만장자였지만, 요즘은 억만장자쯤 되어야 합니다. 우리 전통 개념으로는 천석꾼, 만석꾼을 부자, 갑부라고 합니다. 부자는 좋은 것이죠? 모두 부자가 되고 싶어 하죠? 그런데 성경 말씀에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고 하십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하다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부자라는 이유 때문에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면 좀 억울하지 않을까요? 뭐, 돈을 벌기 위해서 죄를 지었다거나, 돈을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르거나, 갑질에 매진하였다면 모를까. 단지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은 좀 거시기 합니다. 그렇죠?” 

 

“네, 신부님, 좀 그러네요. 그럼 부자는 하느님 나라 가는 것은 영 글러먹은 겁니까? 난 부자 안 할랍니다.”

 

“하하, 그렇죠. 우리가 이 말씀을 들어도 당황스러운데 현장에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어땠겠습니까? 무척 당혹스러웠겠죠? 그래서 이렇게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6-27)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구원은 하느님께 달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역과 능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구원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권력으로 윽박질러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선업에 힘쓰겠습니다.”

 

“베드로씨, 점점 신앙이 깊어집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낙타 바늘귀를 뚫지 못하는 부자가 단순히 돈 많은 사람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 구원사업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2017 한국부자보고서’를 발간했답니다. 그 보고서를 보면, 부자는 막 꺼내 쓸 수 있는 현금 10억 원 이상을 저금하고, 순 자산이 110억 원 이상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은행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이겠습니다. 자, 우리가 부자 되기는 힘들 것 같고. 적어도 중산층만 되어도 먹고 살만하지 않겠습니까? 중산층을 알아볼까요?” [가톨릭신문, 2018년 6월 3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73) 원수인 돈을 사랑하자 ⑦ 중산층의 기준은?

 

 

“중산층이 뭘까요? 사전을 보면, ‘중류층-일반적으로 상류층들과 하류층들 사이에 있는 중간 정도의 부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집단이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재산 정도만으로 분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산에 따른 우리나라 ‘중산층의 기준’을, 부채 없는 30평대 아파트와 월 급여 500만 원 안팎, 1억 원 이상의 은행잔고와 중형자동차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답니다. 어때요 베드로씨도 동의하십니까?”

 

“으휴~, 저는 중산층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습니다.”

 

“아이고, 너무 자기비하 하지 마십시오. 제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 용기가 좀 날 겁니다. 사실 중산층의 절대적 기준은 없습니다. 단지 재산의 문제를 떠나서, 사회문화적 수준과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자부심이 중요합니다. 미국 기준에서 보면, ‘자기주장이 당당해야 한다. 약한 자를 도와야 한다. 불법과 부정에 저항해야 한다.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영국에서는 미국에 더하여 ‘페어플레이를 하고,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이라고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외국어를 한 가지 정도해야 하며, 악기를 한 가지 다루며, 직접 참여하는 스포츠가 있으며, 남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선진국의 중산층 의미는 우리와는 많이 다르죠? 돈 보다는 사회적 참여와 남들과 다른 개성 있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요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선진국형 중산층 문화를 많이 닮아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씨도 운동은 ‘어부’하잖습니까? 노래도 남 못지않게 잘 부르시고, 군대 시절 장교 식당 취사병 경력 때문에 요리도 꽤하지 않습니까?”

 

“하하, 신부님. 또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힘이 좀 납니다. 그렇습니다. 꼭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가난하지만 나눌 줄 아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것인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나라와 돈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앨버트 놀런’ 신부님의 책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는 가난을 이상으로 삼지 않았다. 도리어 아무도 모자라는 사람이 없게 하려고 애썼다. 바로 이런 목적에서 예수는 물욕과 싸웠고 사람들로 하여금 재물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 소유를 나누어 가지라고 촉구했다’(96쪽)는 것입니다. 즉 돈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돈을 나누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돈이 많을수록, 나눌 수 있는 재물과 더 많은 기회가 생겨서 좋을 수도 있습니다. 거꾸로 ‘돈이 없어서 나누지 못하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기회가 줄어드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가난하면 구원도 멀리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돈뿐 아니라 기도와 희생, 작은 미소와 따뜻한 손길까지 너무나 풍부하게 있으니까요.” [가톨릭신문, 2018년 6월 10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74) 원수인 돈을 사랑하자 ⑧ 인격적 교류 없는 자선은 무의미

 

 

“베드로씨도 돈만이 아니라 나눌 수 있는 것이 참 많지 않습니까?”

 

“옙, 신부님 말씀 듣고 보니 저도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베풀 것이 많은 참 부자인 것 같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나누며 살겠습니다.”

 

“끝으로 다 아시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떤 부잣집 대문 앞에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라자로’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습니다. 얼마 후 부자도 죽어 저승에 떨어져 고통 받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보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부자가 아브라함 할아버지에게 ‘라자로’의 손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식히게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할아버지는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루카복음서 1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두렵고 무서운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거지 ‘라자로’가 부자 집 대문 앞에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워 있지만 부자는 ‘라자로’를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입니다. 로마 부자들은 음식을 반쯤만 먹고 깨끗한 바닥에 버리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부의 과시였습니다. 식탁에서 떨어진 이 음식은 노예나 거지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도 부자들이라면 먹던 음식을 식탁 밑으로 던졌고, 가난한 이들은 이 음식을 먹고 살았을 것입니다. 나름의 자선행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승에서 부자가 ‘라자로’를 알아보았다는 것은, 부자가 ‘라자로’를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어쩌면 부자는 억울할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듯이 살아왔는데, 왜 자신이 저승에서 고통을 겪어야하는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 가진 자들에게 보내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그 시대에 만연한 소극적이고 인격적 교류가 담기지 않은 형식적 자선은 무의미하다는 꾸지람입니다. 자, 종기투성이의 ‘라자로’가 여러분 대문 앞에 누워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12에 신고해서 보기 싫으니 치워버리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부랑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피해 다니겠습니까? ‘그래, 넌 얼마나 열심히 잘 하고 있냐?’라고 반문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과 별 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 드립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만은 내어 쫓기고 굶주리는 이들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을 꿈꾸시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000년의 긴 세월동안 우리 대문 앞에 누워있는 라자로를 외면해 왔습니다. 이제 돌보아야합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6월 17일, 백남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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