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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편 그리스도인의 기도

교회 교리서
제2부 주님의 기도 “우리 아버지” 제3절 일곱 가지 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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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2828 “저희에게 주소서.” 이 말은 자기 아버지께 모든 것을 기대하는 자녀들의 아름다운 신뢰이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모든 생물에게 “제때에 먹이를”(시편 104[103],27)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원을 드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실로 이 청원을 드리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모든 선을 초월하여 더없이 선한 분이심을 깨달은 사람이기에, 우리 아버지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2829 “저희에게 주소서.”라는 청원은 또한 계약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는 ─ 우리를 위한 ─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이 ‘우리’(저희)라는 말은 또한 그분을 모든 사람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핍을 느끼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이루는 연대에서, 그들 모두를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드리는 것이다.
2830 “저희의 양식.”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께서 삶에 필요한 양식과, 물질적이고 영적인 ‘합당한’ 모든 재화를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우리 아버지의 섭리에 협력하는 이 자녀다운 신뢰를 강조하셨다.(97)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98) 오히려 온갖 불안과 걱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자녀답게 의탁하는 일이다.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정의를 찾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곁들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과연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자신이 하느님을 버리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99)
2831 그러나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 청원의 또 다른 깊은 의미를 일깨워 준다. 세상에 굶주림의 비극이 있다는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인 처신에서나 인류 가족인 그들과의 연대에서나, 자기 형제들에 대한 실질적 책임을 다하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이 청원은 거지 라자로의(100) 비유나 최후의 심판(101) 비유와 뗄 수 없다.
2832 반죽 속의 누룩과 같이, 하늘 나라의 새로움은 그리스도성령으로 이 세상을 ‘부풀어 오르게’ 해야 한다.(102) 이는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국제적 관계 안에서 정의를 확립함으로써 드러나야 하며, 올바르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없이는 올바른 사회 구조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2833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빵은 ‘여럿’을 위한 ‘하나’인 빵이다. 참행복에 언급된 가난은 나눔의 덕이다. 이 자발적 가난은 강요가 아니라 사랑으로 물질적 정신적 재물을 공유하고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줄 것을 요구한다.(103)
2834 “기도하고 일하여라.”(“Ora et labora.”)(104)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그대들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일하여라.”(105) 우리가 일을 하였어도, 양식은 여전히 우리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아버지께 양식을 청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드리는 식사 전 기도의 의미이다.
2835 이 청원과 이 청원이 부과하는 책임은, 사람들이 겪는 또 다른 굶주림에도 해당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106) 곧,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숨결(성령)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노력을 다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땅 위에서는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그렇기 때문에 이 네 번째 청원의 특별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생명의 빵, 곧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찬으로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된다.(107)
2836 “오늘”이라는 말은 신뢰심을 표현한다. 교만한 우리는 이 말을 생각해 낼 수 없었기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신다.(108) 특히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 아들의 몸에 관계된 것인 만큼, 이 ‘오늘’은 우리의 현세적 오늘뿐 아니라 하느님의 ‘오늘’인 것이다.
그대가 매일 빵을 받으면, 그대에게는 매일이 오늘입니다. 만일 그대가 오늘 그리스도를 모신다면, 그분은 날마다 그대를 위해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오늘은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때입니다.(109)
2837 “일용할”(epiousios)이라는 낱말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서만 쓰인다. 시간적인 의미에서 이 말은 우리의 ‘온전한’ 신뢰를 굳게 하기 위해 ‘오늘’이라는 낱말을 교육적으로 반복한 것이다.(110) 질적인 의미에서는, 생명에 필요한 것을, 더 넓은 의미로는 살아가는 데 충분한 모든 재물을 가리킨다.(111)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이 낱말은(epi-ousios; “반드시 필요한”), 그것 없이는 우리 안에 생명이 있을 수 없는, “불사불멸의 약”(112) 생명의 빵, 그리스도의 몸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113) 끝으로, 이러한 의미들과 관련된 이 말의 천상적 의미는 명백하다. 곧, ‘이날’은 주님의 날, 성찬으로써 미리 참여하는 하늘 나라의 잔칫날이다. 성찬은 다가오는 하늘 나라를 앞당겨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전례는 마땅히 ‘날마다’ 거행되어야 한다.
성체는 우리의 일용(日用)할 양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양식의 고유한 효험은 일치를 이루게 하는 힘입니다. 성체는 우리를 주님의 몸에 결합시켜서, 우리를 우리가 받아 모시는 당신 몸, 그 몸의 지체가 되게 합니다.……그런데 여러분이 날마다 교회에서 듣는 독서도 일용할 양식이며, 여러분이 듣고 노래하는 찬미가도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지상 나그넷길에 필요한 것들입니다.(114)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자녀로서 하늘의 빵을 청하도록 촉구하신다.(115)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동정녀 안에 뿌려져, 육체 안에서 부풀어 오르고, 수난으로 반죽이 되고, 무덤의 화로에서 구워져, 교회 안에 저장되고 제대로 옮겨져서, 날마다 신자들에게 제공되는 천상 양식인, 빵이십니다.”(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