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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인쇄

라틴어 Jesus Christus
영어 Jesus Christ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누가 말하고 있는가 : 그리스도교의 창립자로 통하는 나자렛 출신 예수란 분이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린다. 예수란 단어는 "하느님이 살리신다"는 뜻인데, 유태교 문화권에서 흔히 쓰이던 사람의 본명(本名)이며, 그리스도란 그리스말은 히브리어 ‘마샤’(메시아)를 번역한 것인데 기름 부음을 받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인물을 가리킨다. 구약성서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어렵게 된 까닭에 한국에서는 예수를 단순히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지만, 예수의 정체와 역할을 드러내는 호칭(하느님의 아들, 주님, 구세주 등)을 사용하는 교회의 전통은 예수가 단지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주장해 왔다. 다른 종교의 창설자(모세, 마호멧, 석가모니 등)와 달리,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예수는 그분이 계시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 못지않게 신앙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예수 그리스도냐 하는 문제는, 예수란 인물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인간신앙적 결단과 증언을 요구한다고 하는 사실을 처음부터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누구나 이 문제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지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다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환기시켜 둘 필요를 느낀다.

   신앙인으로서의 입장을 떳떳하게 밝혀 놓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인데 그들은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참된 아들로 고백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죽음을 이기고 인간으로서도 살아 계시다는 부활 신비를 통해서, 그분의 지상생활을 이해하고 소개하는 복음서와 신약성서의 다른 저서를 바탕으로 해서, 그들의 각 문화권의 요구에 따라,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세상에 계실 때 아버지라고 부르시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명시해야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지상 예수께로 돌아가는 독특한 방법을 고려해야 하고, 삼위일체 교리로 정리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기본 부자(父子)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동양문화권에 진출하자, 그리스도 교인들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명명(命名)해야 하였다. 그들은 전통사상[天사상]을 무시하지 않고 잡신[천지신명]들과 혼동하는 일도 없이 하느님의 초월성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께서 아버지로 모시던 하느님을 천주(天主)라고 불렀다. 천주님이라고 불린 하느님은 철학가들의 신과 민간 종교인들의 이신(理神)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명시했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상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가 희미해졌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 역할을 맡은 뛰어난 현인 내지, 불쌍한 중생을 위하여 고생하는 선각자 정도로 생각될 위험이 있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는 선배교회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예수와의 관계를 밝힐 과제를 안고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예수의 주장과 정체가 신인(神人)관계를 기본적으로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이외에도 수많은 현대인들이 예수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순수한 종교의 범위를 떠나서도 나자렛 예수처럼 인류사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 드물 것 같은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부당하게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의 소리가 들린다. 사실상 오래 전부터 예수란 인물이 많은 사색가나 철학가들을 매료시켜 왔고, 하느님과 교회를 거부하면서도 예수에 대한 존경과 공경을 표한 사회개혁가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막다른 길에 빠진 공산주의 철학가들도 예수께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예수의 진면목을 흐리게 하고 자기네들의 세속적인 싸움터에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들이려는 속셈은 고발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주장대로 예수께서 참으로 인간이시고 우리 역사 속에 인류의 구원을 마련하시고 온갖 악에서 인류를 해방시켜 주시는 인물이라면 신앙 말고도 예수께 접근하는 다른 길, 즉 역사적인 방법이 당연히 트여야 한다는 견해도 검토해 볼만하다.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 관한 역사학적인 연구방법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유인즉, 성서의 독특한 성격을 배려하지 않고 부활교리를 제외하고 즉음으로 끝나는 지상생활만 연구한다면, 예수신비를 제거하고 예수의 주장과 활동을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세기에 역사예수신앙의 그리스도를 대립시켜 놓고, 신자들이 모시는 그리스도가 초대 교회의 조작품이라느니 바울로 사도가 그리스 신화를 본떠서 예수를 신격화했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비방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헌 분석 방법을 정리한 역사학자들의 요구를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리스도인들 이 예수에 관한 자료[복음서]를 거의 다 신앙인으로서 전수했다 하더라도 예수는 분명히 가상인물이 아니고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성실한 사학가들은 19세기에 나돌던 허황한 가설들은 일축하고 예수 시대의 환경을 재발견하면서 예수설교, 주장, 활동의 독특함을 잘 드러냈다는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19세기 작가들의 기분에 따라 무기력한 몽상가로, 혹은 예리한 사회개혁자로 통하던 예수하느님 나라에 전념하고 죽음을 각오하는 자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종교사회학적으로 간단하게 풀이해 낼 수 없는 신비로운 그 인물의 언행을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전세기의 작가들이 남긴 문제를 떠나서 예수역사성을 중요시하는 이유도 있다. 예수인간성을 규명하던 전통적인 인간학이 무너지자 우리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으로 전제되는 인간성을 되찾는 길은 역사뿐이다. 예수가 정말 역사적인 인물이라면, 즉 우리 인간사회 속에서 부대끼고 죽음까지 당한 인물이라면 그분일 참된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역사신앙이 서로 상반되기는커녕 역사의 한계성과 신앙의 특징, 즉 역사신앙의 차이점과 연관성을 제대로 직시하면 예수에 대한 적절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은 추상적인 진리의 체계가 아니라 독특한 의미를 띠는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2. 역사예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 자유주의 선입관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던 성서의 문학비판을 통해서 예수역사성을 뒤흔들었던 19세기의 역사주의를 벗어나서 현대의 성서해석학자들은 사학적인 방법으로 예수의 진면목을 재발견하였다. 역사예수의 궁극적 비밀을 드러내보여 주지는 못하고, 모든 삶을 예수께 내거는 신앙생활의 동기를 제공하지도 못하며, 하물며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쪽으로 이끄는 확증을 제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를 이해하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역사의 한계성과 신앙의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고 신앙의 불가피성을 증명하려는 호교론을 피하며 전근대적 방어태세를 버리면 역사는 그 나름대로 대단히 귀중한 도움을 준다.

   예수에 관한 문헌을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남긴 기록들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 밖에서 당대 일반 사학가들이 남긴 글들이다. 후자부터 살펴보면, 유태인 사학요셉 플라비우스는 로마제국의 ‘판무관’ 본시오 빌라도시대에 낳은 제자를 가진 현인으로 보이는 예수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증언[유태교 고대사기 18, 63-64]을 남겼고, 로마제국사학가들은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알려진 인물이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에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기록을 남겼다[타치투스, 연력 15.77.3, 수에도니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생애 25, 4]. 소(小)프리니우스가 110년쯤 비티니아 총독으로 지낼 때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 처형된 그리스도를 하느님처럼 신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남긴 저서들은 복음서들(마르코 : 70년, 마태오루가 : 80년, 요한 : 90년 이후)과 바울로서간(50∼60년)과 다른 작가의 서간으로 형성된 우리의 신약성서를 말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초기 공동체들은 지상에 계시인간이신 예수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복음서를 작성하였다. 복음서를 구성하는 여러 전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승이 사실과 가장 가까운 전승이라는 문학비판의 단순한 주장을 떠나서 보다 확실한 사학적인 원칙에 따라 현대 사학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예수의 모습을 추궁할 수 있다. 예수에 관한 사학적인 연구방법의 원칙이 이른바 ‘차이의 원칙’이다. 초대 공동체가 자기 관심사에 따라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조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으나 초기 공동체가 도저히 조작할 수 없는 장면과 발언들은 이를 예수의 지상시대에까지 소급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당시 유태교의 배경으로 보아서, 당대 사상과 맞지 않는 부분도 역시 배척할 수 없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신약성서가 예수의 일생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해서 제공하는 자료들을 분석해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뜻 깊은 사실을 발견한다. 즉 그분의 죽음을 기점(基點)으로 하여,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 공생활을 거쳐 그분의 탄생에로 소급해 올라갈수록, 역사적 확실성의 정도가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돌아가신 날짜에 관해서는 우리가 거의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요한 복음서를 바탕으로 하여 연대기적 계산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에 돌아가셨다고 할 수 있다. 죽음과 관련하여 최후만찬의 날짜에 있어서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사이에 차이가 있는데, 전자에 따르면 예수의 최후만찬이 유태교 과월제 때에 주행사로 여겼던 식사 도중에 이루어졌던 것 같고, 반면에 요한에 따르면 예수께서 과월절 전날에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어서(요한 19:17-36) 최후만찬은 물론 그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공생활에 대하여는 4개 복음서의 증언으로 보아서 서기 27∼28년에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셨다는 결론이 타당하다. 그러나 활동경위에 있어서는 복음서의 기록들을 조화시킬 수 없다. 공관복음서에 따라 예수께서 갈릴레아에서 대중을 상대로 활동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제자들의 양성에 전념하시고 마지막으로 겨우 일주일 사이에 성도에 입성하시기도 하고 성전정화하시기도 하며 유태교장상과 잦은 충돌 끝에 잡히시어 처형되셨다는 복음서의 순서가 문학적 기법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예수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마르코 복음서에 기록된 것과는 달리 예수의 여정이 무척이나 복잡하였다. 예수의 탄생 연도에 대하여는 복음서의 기록과 일반 역사가 전해주는 자료들을 맞출 수가 없다.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4년에 사망했다는 사실과 마태오 2:19과 루가 3:1에 언급된 퀴리니우스 시리아 총독이 실시한 인구조사(기원전 7년)로 미루어 보아 서른 살 가량 되어(루가 3:23)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의 탄생 연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복음에서 장소와 시기에 관한 언급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예수의 전기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의 일생이 특정한 장소와 일정한 사회 속에서 이루어졌음이 틀림없으나 평범한 공간과 시간을 능가하는 차원에서 예수의 비밀을 암시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 듯하다.

   예수의 죽음 이후부터 예수주님으로 모시는 공동체들은 지상에 계시예수에 대한 자료를 전하려고 애썼던 것이 사실인데, 그 자료를 사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해 보면 예수의 인물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문헌에 의하면 공생활을 시작하신 무렵에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 당시에 퍼져 있던 종교단체(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엣세파) 중 특정한 사조인 세례운동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당연히 예언자의 모습을 취하시고 종말론적 사상에 역점을 두셨다는 의미이다. 세례운동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 즉 심판과 구원의 시기를 선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례운동의 배경으로 미루어 보아 이런 상황 속에 나서신 예수께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방법으로 여겨졌던 유태교제도의 주축을 이루는 성전예식과 율법의 엄수문제와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기본제도에 대하여 융통성 있는 태도를 취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에 관한 기본사상을 받아들이고 회당에 다니시면서도 전통적인 규칙과 거리를 두고 유태교에 대하여 굽힐 줄 모르는 자유를 보이셨다. 유혈제사를 올리던 장소의 의미를 새롭게 하시고(마르 11:15-19) 성전의 파괴를 예고함으로써 하느님을 만나는 새 장소를 마련할 의사를 표시하셨다. 안식일에 관한 규칙을 상대화시켰고(마르 2:23) 율법을 재해석 하면서도 새 가르침을 선포하셨다(마르 1:27). 구원의 유일한 방법으로 통하던 예식과 율법에 도전함으로써 예수께서 새로운 구원제도의 선포자와 창설자로 나타나셨다. 예언자라고 자처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예언자로서 행동하시던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임하는 과정에서 정치폭력을 배제하였는데, 이는 권세를 떨치며 하느님 나라와 부합하는 이스라엘의 왕국을 수립하리라는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사상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당시 대중들의 기대와 종교계의 지배적인 사상에 비해 예수께서는 이색적인 인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새 시대의 예언자로 나서신 예수께서는 자기 삶속에서 하느님 나라에 해당하는 표징을 보이려고 계획적으로 행동하셨다. 악령을 쫓아내는 구마행위와 치유활동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 뿐 아니라 그 나라를 이룩해 주시고 실현시켜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려고 하셨다.

   역사학적인 입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여러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해 보면 첫째로 구원문제와 관련하여 예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예식제도와 율법에 도전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이미 지나간 옛 제도를 거부하였고 죄의 용서를 베풀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함으로써 다가오는 구원, 즉 완성에로 발전하는 구원을 향하게 하셨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서 구원이란 새 인간관계는 지금 당장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활동하는 예수께서 당신 가르침과 행동, 제자들에게 즉각적이고 전폭적인 추종을 요구하시는 태도를 통해서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구원을 실현한다는 인상을 주셨다. 둘째로 예수의 언행을 보면 예수의 정체문제가 제기되게 마련이다. 예수는 누구이길래 이런 권위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 당대인들이 예수세말예언자로 보고 있었지만 이미 본 바와 같이 너무 막연한 견해였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여러 호칭(메시아, 다윗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들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묵인하는 예수께서는 당대인들이 전통적인 사상과 통념을 버리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려는 듯한 인상을 주셨다. 사람의 아들이란 신비로운 명칭을 이용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 나라의 절대적인 봉사자와 담당자로 암시하려 하셨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세월이 갈수록 유태교장상과 빈번한 충돌로 인하여 죽음을 의식하고 각오하셨다는 사실을 빠뜨릴 수 없다. 권위를 발휘하고 신인관계를 새롭게 한다는 주장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활동의 초기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다가 마침내는 순교하던 예언자들의 운명을 당하리라고 의식하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당신 권위를 절대화한 일이 없었고 오히려 스스로 아버지라고 부르던 하느님께 얼마나 철저히 의존해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요약해서 말하면 구원에 있어서 엄청난 권위를 주장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주장하신 예수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질문을 야기시킨다.

   3. 믿는 이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 : 굳어진 사회에 도전하는 용기를 칭찬하거나 신인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인생문제를 직시하는 사색에 공감하는 태도는 그리 어렵지 않으나, 문헌들이 ‘단순한 예수’를 능가하는 예수를 소개한다 해도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참된 아들로 고백하는 차원은 다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역사 속에 온 인류를 위하여 인간으로서 살았던 그 예수를 통해서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의 주장은 유태교를 위협하는 공격으로 이해될 수 있고, 신자들의 고백은 신인관계에 입각하는 대인 관계를 요구함으로써 정치를 상대화시키는 도전으로, 전통이나 어떤 철학에 따르는 인간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모험으로 보인다. 하느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시는 신이 아니고 인간의 존엄성을 상상 외로 들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주장과 신자들의 고백이 위험하고도 매력 있는 공상으로 타락되지 않기 위하여서는 끔찍한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이는 곧 예수 죽음의 장벽이다. 다시 말해서 사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앞지르고 있다면, 예수란 인물이 모든 이념의 기수가 된다면 그분의 신분과 역할이 무의미하게 되고 만다. 그렇다면 지상의 예수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넘어가는 과정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가? 과거의 예수와 현재의 그리스도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고백하는 신앙이다. 제자들은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예수에 대하여 신뢰심을 가졌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정했으며, 그분을 위하여 투신(投身)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승의 수치스런 죽음과 함께, 그들이 삶을 내걸고 생명을 바칠 만한 근거도 같이 사라졌다. 유태교 사회에서 하느님의 모독자로 처형된 자가 구원의 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운 인물에 집착한 나머지 예수의 사상을 퍼뜨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왜 사상보다 그분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유일한 구세주로 받들었을까? 선의와 신뢰로 시작된 애착이 순수한 신앙으로, 즉 그분의 신비를 알아 모시는 유일한 접근 수단으로 변했던 것일까? 그것은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신 뒤에 그들이 예수를 살아 계신 분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의 표징 정도밖에 못 되는 발현에서 뿐만 아니라, 온 생활 속에서 예수의 현존을 느꼈다. 자기들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 예수를 살아 계신 인격체로 체험했는데, 이는 그들의 새 생활이 지상 예수 곁에서 느끼고 체험했던 것과 부합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생활 속에 바로 그 예수를 체험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죽음의 포로가 아니라 부활하신 몸으로 계신다고 믿었다. 현존하시는 예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 전에 쌓아두었던 경험에로 되돌아가게 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예수께 대한 기억을 악몽처럼 깨끗이 잊어 버렸을 것이다. 예수의 주장과 지상생활을 무효화시키는 죽음을 극복하는 이변이 없는 한, 그들은 단순한 추억 속에 예수께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새 형태로라도 인간으로서 살아 계신다고 고백하는 제자들은 예수의 정체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임하시어 인간들에게 죄의 용서와 새 생명을 베푸신다는 복음을 골자로 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느님의 현존에 해당하는 표징(치유 · 구마 · 죄의 용서)을 보여 주신 예수께서, 옛 예언자와 달리 선포가 뿐만 아니라 구원의 첫 수혜자(受惠者)로 나타나셨다.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구제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3:16에 따라 ‘의화’되셨다. 죄 있는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이 예수의 의로움을 드러내 보이셨고 죄의 결과를 취소하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인간예수를 위하여 구원의 능력을 결정적으로 행사하셨다. 그리고 끝나기도 전에, 즉 최후 심판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런 혜택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인류의 구세주로 드러나셨다. 시간 속에, 바로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우리들에게 하느님이 찾아 주시는 길을 터 주신 예수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시는 유일한 중개자(仲介者)로 나타나셨다. 지상에 계시예수의 언행에 입각하여 다른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한층 더 나아가서 구원이 있다면 오직 하느님이 마련하신 구원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수를 위하여,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진 이 구원사건을 보고 예수와 하느님의 관계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상에서 하느님을 ‘아빠’로 부르시던 그 예수를 당연히 하느님의 친아들이라고 고백해야 했다. 영원토록 하느님으로 계시시간 속에 인간으로 계시는 변함없는 그 아들이 우리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계시자이시다. 아드님은 인간이 되신 과정과 죽음에서 부활하신 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성신의 역할을 드러내 보이셨다(로마 8:9-11). 하느님과 아들 사이에 맺어진 부자관계, 그리고 아들과 그 인간 예수의 동일성을 보장하시는 성신께서 계시됨으로써 하나이신 하느님이 삼위일체계시다는 신앙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한 하느님,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으로 고백되면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신앙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인간 예수부활시키신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가 제자들의 깨달음을 정리하고 예수의 정체와 역할, 즉 구원자이신 예수와 하느님의 관계를 명시하는 과제를 맡았다. 메시아와 의인들에게 적용되었던 구약성서의 전통적인 호칭을 재개발하여 예수의 정체와 역할을 규명하는 초대 교회예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이 복합호칭을 분석해 보면, 원래 하느님께만 적용되었던 주님이란 호칭은 인간을 위하여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활동방식을 잘 드러내는데 원래 이스라엘을 구해 주는 자를 뜻하던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이제 온 인류의 구세주라는 의미로 통한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호칭은 본성문제에 앞서 하느님이신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한 관계를 말해 주고 있는데, 히브리 사고방식대로 부자관계는 종적 관계보다 횡적 관계, 즉 동등한 입장을 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호칭은 신성에 있어서 예수의 위치를 알맞게 말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이란 단어는 예수의 아버지이신 천주 성삼 제1위를 가리키는 것이 신약성서와 특히 바울로 서간의 통례이다. 호칭에 못지않게 초대 교회예수인간성과 신성을 표현하는 도식(靈-肉, 前-後, 上-下 등)을 개발했다(로마 1:3-4). 변함이 없는 아들이 하느님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계시다는 사실을 표명하는 이 도식들은 나중에 발전하는 그리스도론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 담긴 내용을 보존하며 설명하는 교회는 희랍문화권에 접근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인간성을 재확인하고 신성인간성의 상호관계와 이 두 본성의 주체이신 아들의 위치를 밝히는 업무를 수행해 왔다. 인간이고 하느님이신 아들이 마련하신 구원의 조건을 거울로 삼아 교회가 소위 ‘구원론적 원칙’에 따라 우리 구세주의 정체를 명시하였다. 구원을 물질세계에서의 해방으로 잘못 이해하는 이단을 공박하는 교부들이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재확인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아들과 동일시해야 하는 말씀이란 호칭을 우주의 이치란 의미로 이해하고 예수를 뛰어난 피조물로 보는 아리우스 같은 자가 있었는가 하면 예수를 말씀과 육체의 결합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인간예수영혼을 부정하는 아폴리나리스 같은 자도 있었다. 현대 인간학의 개념과 맞지 않다고 해서 문제의 심각성을 잘못 파악할 수도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죄 외에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시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상기시켜 주었던 점이 교부들의 공로이다. 예수신성을 중심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재표현하는 작업이 필요하였다. 본성보다 관계와 역할을 따지는 히브리문화권과는 달리 희랍문화권에서 성부, 성자, 성신이 유일한 신성을 공유한다는 니체아 공의회(325년)의 결의문을 통해서 교회예수신성을 재확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신성인간성의 단순한 결합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이런 경우에는 두 주체, 즉 하느님의 아들과 인간예수를 대립시킬 위험이 있는가 하면(네스토리우스의 이단) 인간신성 안에 흡수되다시피 하여 예수신성에만 기울어지는 에우티케스이단이 생길 우려도 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이라고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이신 아들이 유일한 주체이며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고 그 하느님의 아들은 신성인간성의 결합의 원인이지 결과가 아니라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칼체돈 공의회(451년)는 신성인간성이 혼동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아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주이신 예수께서 두 본성의 유일하고 동일한 주인이시라고 선포하였다. 나중에 이단이 생기는 대로 제2차(455년)와 제3차(680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들이 이 주요 결의문의 결론을 내렸다.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신 성자라고 함으로써 교회계시에 또 다른 교리를 첨가시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성서 내용에 대하여 유권해석을 내렸을 뿐이다. 성서적 용어가 아닌 단어나 개념을 이용했다 해도 계시를 변질시켰다기보다 계시의 내용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을 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4.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소 :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몸으로 이제 끝없이 인간으로 계시고 우리 세상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얼굴이라서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장소를 마련해 주셨다. 예수께서는 죽음으로 인하여 부재상태에 계시니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부활로 인하여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니 이제 인격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찾아 주신다. 당신 몸인 교회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세례자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이 교회를 통해서 성서를 당신의 말씀으로 활성화하신다. 교회를 통해서 당신 몸과 피를 나누어 먹이심으로써 우리를 찾아 주신다. 교회를 통해서 당신 몸과 피를 나누어 먹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생명에 참여케 하신다. 빵과 포도주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생명에 참여케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아들을 통해서 성신에 의하여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은 물질세계를 돋보이게 하고 물질에 상징적 가치를 부여 하시어 우리 구원의 실제성을 암시해 주신다.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만민 가운데 한 민족에 속해 있는 몸으로 시간 속에 짧은 기간 동안 이 세상에 살다가 죽음을 당하셨으니 인간성의 제한성을 취하셨고, 죽음을 넘어서 살아 계시부활한 몸으로 각 인간의 침해할 수 없는 자유와 유린할 수 없는 존엄성을 보장해 주신다. 태어나고 죽고 부활한 그 몸이 하느님의 계시이며 인류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살아 계시예수 그리스도는 신인 관계를 완성시킴으로써 인간의 최후 목적과 동시에 인간성의 절정에 달하는 길을 밝히셨다. 사람과 함께 살아 계시예수 그리스도는 오늘의 인간 사회를 새롭게 하는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따라서 신자들은 과거의 예수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써 현재의 예수를 추종하고 있다. 신자들이 과거의 예수모방하는 것은 부활을 부정하는 것임과 동시에 예수를 이용하는 것이 되는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물질세계와 인간사회와 각 개인이 하느님과 의존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과의 의존관계가 피조물의 상대적인 자율성을 보증하면서 각 인격자의 자유를 살린다. “이 세상생명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1고린 3:22-23)이기 때문이다. (文世華)

   [참고문헌] Ch. Duquoc, Jesus Homme Libre, Cerf, 1974 / W. Kasper, Jesus der Christus, Matthas-Grunewald-Verlag, 1974 / Ch. Duquoc, Christologie I(1968), II(1974), Cerf / Ch. Perrot, Jesus et l'Histoire, Desclee, 1976 / B. Sesboue, Jesus Christ dans la Tradition de l'Eglise, Desclee, 1982 / J. Moltmann 著, 김균진 譯,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한국신학연구소 출판부, 1978.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