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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인쇄

한자 祈禱
라틴어 preces
영어 prayer

   인류는 최초부터 종교를 가졌듯이 처음부터 기도를 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도는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속한 행위이다. 또한 인간에게 있어 가장 보편적이고 오래된 것이며 내적이고 심오한 행위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과 자연초월하여 무한으로 향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기도 안에서 절대자와 ‘너’ 와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며 자신의 한계와 나약함과 죄를 인정하는 가운데 절대자에게 매달리어 자신이 채워지기를 원한다. 기도에는 원시 종교에서부터 벌써 여러 가지 모양(맹세, 제물 봉헌, 청원, 저주,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전구, 감사 등)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인간학적으로 볼 때 기도는 인간자연초월하여 절대자에게 자신을 여는 인격적인 교류 행위이다. 이 기도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발견하고 실현시키고 성장시키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절대자를 삶의 원천과 중심과 목적으로 받아들여서 신에 의해서 살고 신을 향하여 살게 된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기도는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야훼께서는 ‘과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셨으며, ‘현재’에는 그들의 번영을 축복하시고, ‘미래’에 가서 완성된 구원약속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같은 야훼계약을 어겼으므로 재난과 패전 등의 벌을 받아야만 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신음하고 슬퍼하여 야훼께 외치게 되었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여 구원자를 보내 주셨으니 그들은 다시 야훼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하게 되었다. 하느님인간간의 이 같은 생생한 교류에 대해서 시편과 지혜 문학서가 감동적인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고대에는 왕과 예언자가 백성들을 위해 야훼께 기도하고 제물을 바쳤으며, 예언자야훼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여 회개를 권고했었다. 예루살렘성전이 세워진 뒤부터는 사제들이 기도를 주관하면서 제물을 바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전은 ‘기도하는 장소’(이사 56:7)가 되었다. 사실 야훼께서 즐겨 받으시는 것은 예절이나 제물이 아니라 진실한 기도의 자세이다. 정의를 실행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며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는다면 야훼께서는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신다. 야훼와의 이러한 관계에서 드리는 기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윤리적인 책임을 자각하게 하고 정의자비사회를 실현하게 하였다. 기도가 전례(典禮)로서 규정되었던 시기기원전 5세기경이다. 그 전례적인 기도는 야훼의 존엄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못하고 천사가 항상 야훼인간 사이를 중계했었다. 이리하여 야훼와 백성간의 친교는 차차 형식주의와 율법주의로 흐르게 되었다.

   인류의 기도와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는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다. 예수께서는 기도의 사람이셨으며 기도는 그분의 존재 전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복음서는 가끔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한다. 특히 그 분이 사건과 관련된 중요한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그 분은 기도하셨다고 말하고 있다(마르 14:32-36, 루가 3:21, 6:12-13, 9:28-29). 예수께서는 다른 종교가와는 달리 기도에 대한 자기 체험을 말하지도 않고 또 기록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기도의 모범이시지만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 기도하시지 않았다. 기도는 예수께 호흡과 같이 필수적인 것이었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제자들이 예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주의 기도’를 가르치셨다(마태 6:9-14, 루가 11:2-4). ‘주의 기도’는 모든 기도의 모형이며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7가지 기원은 기도의 근본적인 내용과 자세를 말해 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지만 당신은 하느님을 ‘Abba’(아빠)라고 부르셨다(마르 14:36). 예수의 기도는 이 ‘아빠’와의 끊임없는 대화, 자녀다운 친교, 그리고 깊은 일치였다. ‘아버지’는 일종의 거리감과 경의,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반면, ‘아빠’는 아무 거리감과 두려움이 없는 완전한 일치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 ‘아빠’야말로 그리스도교하느님의 본질을 말하는 적절한 표현이다. 사실 이 단어만큼 그리스도교하느님에 대한 개념을 충분히 표현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아빠’란 예수께서 아버지와 본성상 동등하고 하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외아들이기 때문에 당신만이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었다. 결국 예수께서 아버지를 불렀던 ‘아빠’야말로 원래의 기도이며 진정한 기도이다.

   제자들은 예수죽음부활을 체험하고 그 열매인 성령을 받았을 때 성령에 의해서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예수형제들이 되고 아빠의 총애를 받아 하느님생명까지 이어 받게 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새 창조 및 새 탄생이 이루어졌음을 확증해 주신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라 4:6, 로마 8:15도 참조) 아버지와 외아들 사이의 사랑의 끈이신 성령께서는 인간 예수로 하여금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게 해 주셨다. 이제 같은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아버지의 자녀와 예수형제가 되게 하시고 예수와 같은 입장에서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시고 기도하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기도의 원동력이며 스승이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기도, 아니, 인간의 모든 기도는 예수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며 예수의 기도의 연장이다. 성령으로 인하여 일종의 신비스러운 ‘양도’ 또는 ‘교환’이 일어나 예수의 기도가 그리스도인 안에 들어가 아버지께 바쳐진다. 다시 말해서 삼위일체 안에 오고가는 부자(父子)간의 교류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 안에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의 신적인 친목 안에 끌려 들어가 외아들과 같은 입장에서 ‘아빠’라고 부른다. 이것이 바로 기도이며 이는 거저 주시는 은총이다. “이제는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내 안에서 기도하시는 것이다”(갈라 2:20 참조). 이렇게 볼 때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의화(義化)의 사실을 말과 다른 수단으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성 요한 다마셰노는 기도를 “하느님께 영혼을 올리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밖에도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하느님과의 친교’(성 금구 요한), 그리고 ‘하느님과의 친밀함’(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며 ‘하느님과의 일치’이다. 기도의 내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오리제네스는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여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기도는 애정을 다하여 하느님을 쳐다보는 행위” 또는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애정으로 가득찬 행위”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말했던 신 · 구약성서교부들과 성인들의 가르침을 요약해서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여러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친교이다. 기도는 예수께서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시는 행위에 참여하는 행위이므로 하느님은총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기도는 구도(口禱)와 염도(念禱)로 구분된다. 구도는 일정한 기도문 또는 문귀를 외는 기도이며, 염도는 기도문이나 문귀를 쓰지 않고 내심에서 하는 침묵의 기도이다. 구도는 전례기도와 비(非)전례기도로 나눌 수 있다. 전례기도는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 즉,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기도이다. 전례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성직자의 지도에 따라 교회가 인준하는 경문을 사용하고, 교회의 이름으로 바치는 것이어야 한다. 전례 기도에는 최고의 기도인 미사와 그 밖의 성사, 준성사, 성무일도, 말씀의 전례 등이 있다. 비전례기도는 전례가 아닌 모든 구도이며 공동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바친다. 아침, 저녁기도, 로사리오 기도, 십자가의 길 기도, 여러 호칭기도, 자유로운 형태의 기도 등이 비전례기도에 속한다. 화살기도는 개인적인 비전례기도이다. 염도는 저자에 따라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묵상 염도, 감동적인 염도, 단순한 염도[수득적 관상(修得的 觀想)], 신비적인 염도[주부적(注賦的) 관상]로 구분된다. 이것은 구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염도가 깊어져 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여러 가지 중개수단(언어, 상상, 이미지, 상찰 등)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점차 직접적이고 순수한 친교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기도는 구원을 얻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대개 구원은총을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베풀어 주신다. 기도는 ‘마음의 호흡’과 ‘영혼의 음식’과 같은 것이므로 얼마 동안 기도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유혹을 받거나 죄를 범하게 되어 신앙생활에 해를 입게 된다. 리구오리의 성 알퐁소(St. Alphonsus Maria de Liguori)는 “기도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기도하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고 말하였다. 기도를 하기 위한 준비에는 간접적인 준비와 직접적인 준비가 있다 간접적인 준비는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서적인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뜻에 의하면, 간접적인 준비는 기도 직전에 하고 있는 일을 침착하게 평온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직접적인 준비는 몸과 정신의 긴장을 풀고 기도의 은총성령께 빌면서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감실이나 십자가, 상본 같은 것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혹은 눈을 감고 하느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의식하거나 예수께서 자기를 보고 계신다는 것과 자기도 예수께 말씀 드리고자 함을 생생하게 의식하는 일이다. 그와 더불어 기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재인식하고 기도를 잘 하려고 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기도에서 위로와 기쁨을 맛볼 때가 있고 잡념과 무미건조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도 중에 느끼는 기쁨이나 어려움으로 기도를 평가할 수 없으며 생활과 행동에서 맺어지는 그 열매로 평가해야한다. 기도 중에 큰 위안을 받고 특별한 체험을 한다 해도 생활에 아무 변함이 없다면 소용이 없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기도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보다 사랑하게 될 때만이 그 기도가 진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도 중에 느끼게 되는 위로와 기쁨은 영적, 내적, 감정적, 감각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여러 가지 종류와 단계가 있다.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여야 하되 위로와 기쁨을 맛보려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 참다운 기도란, 자기 만족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특히 감정적인 위로와 감각적인 기쁨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기도를 방해하는 잡념과 무미건조도 그 내용과 원인에 있어서 여러 가지 종류와 단계가 있다. 즉 기도의 준비 부족, 양심의 가책, 고민, 불안, 질병, 고통 등으로 인한 것들이 있으며 또한 지나친 긴장, 흥분, 마음의 산만 등으로 인한 것들도 있다. 반면, 자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나 이유가 없는데도 잡념과 무미건조가 생길 수도 있다. 이런 때는 인간의 연약함, 한계성, 또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시련이다. 시련에도 여러 단계가 있어, 단순하고 가벼운 시련이 있는가 하면, ‘감각의 암야’, ‘영혼의 암야’(십자가의 성 요한)까지도 있다. 잡념과 무미건조에 대해서 취해야 할 자세는 침착, 인내, 끈기이다. 분심과 무미건조의 상태를 의식할 때마다 초조함과 불안, 흥분 등을 피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기도에 들어가는 노력을 되풀이해야 한다.

   기도의 수련은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과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나뉜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기도하라”(루가 18:1)고 가르치셨고, 사도 바울로도 “언제나, 늘 기도하라”(에페 6:18, 1데살 5:17)고 말하였다. 계속적인 기도의 수련화살기도성서 구절(특히 시편) 등을 되풀이해서 외는 수련이나 주님과 함께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거나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수련 등이다. 주님은 또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도하라고 하셨다(마태 6:6 참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도하는 수련묵상, 관상(觀想) 등이다. 늘 기도하는 것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도하는 것은 상호 보충관계에 있다. 늘 기도하면 할수록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도하게 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도하면 할수록 늘 기도하게 된다. 이 두 종류의 기도는 점차 가까워져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의 현실이 된다. 이 현실은 예수 안에서 절정에 도달했었다. 예수야말로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친교와 깊은 관상 안에 사신 분이셨다.

   늘 기도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도한다면 기도가 생활 속에 침투되어 마침내 기도와 생활이 단 하나의 현실이 된다. 이 현실 역시 예수 안에서 절정에 도달했었다. 예수야말로 기도와 활동을 온전히 조화시키고 통합시키신 분이셨다. 그리스도인도 늘 기도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도하면서 이 두 종류의 기도가 한 현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며, 또한 기도와 활동을 조화 통합시켜 한 현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金保祿)

   [참고문헌] Catholic Encyclopedia, pp.667-678 / The Catholic Encyclopedia for School and Home, by St. Joseph's Seminary and College, Dunwoodie, Yonkers, 8vol, pp.615-619, New York 1965 / Sacramentum Mundi, 5vol., pp.74-81 / 上智大學 宗敎硏究所編, キリスト敎を生きる祈り, 東京 1975 / 男子洗足カルメル會, 祈りヘの道, 東京 1975 / ドソ・ヴィタル・ルオデー, 念禱の種タな道, 東京 1972.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