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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인쇄

한자 韓國天主敎
[참조단어] 교회사박해

   1. 배경 : 조선은 서구 세력의 동양 진출(西勢東漸)로, 중국, 일본과 함께 소위 ‘서학(西學)’이 일기 시작하였다. 한편 1593년 임진왜란 때, 스페인 예수회 회원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 장병을 돕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으나 전교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납치된 자 중에는 신자가 있었다.

   18세기 북경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과 중국에 파견되었던 예수회 선교사들과의 접촉(예: 소현 세자와 아담 샬)은 신앙의 전도는 없었어도, 서양 문물과 교회 서적이 들어온 계기가 되었다. 이때 이수광, 이익남인 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여 실학 운동에 자극을 주었다. → 천주 실의

   2. 창립 : 1770년경,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에 의해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1784년에는 북경에서 영세이승훈(베드로), 그리고 이벽, 정약전 등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를 조선 교회의 창립으로 본다. 이때 중인 계급 김범우, 최인길, 최창현, 권철신, 권일신 등이 개종하였다.

   3. 발전 : 또한 1786년 충청도 이존창, 전라도 유항검 등은 가성직 제도를 시작하여 이승훈사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 후 1794년 북경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한다. 이렇게 하여 1800년에는 신자가 만 명에 이르렀고, 정약용명도회를 시작하여 교리를 연구하고,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 교리, 교리서

   1801년에는 주 신부와 지도급이 순교하였고, 정하상 등은 1831년 선교사 파견 운동을 전개하여, 결국 조선 교구가 설립되고, 파리 외방 전교회파견되었다. 이때 초대 주교브뤼기에르였으나 중국에서 병사하고, 1837년 앵베르 주교가 임명되어 입국하였다.

   4. 박해(迫害) : → 박해

   5. 선교의 자유 : 19세기 말에는 구미 열강과 조약이 체결되고, 종교의 자유가 다소 보장되었다. 그래서 서울 종현, 인천 제물포 등지에 성당이 서게 되었다. 그 후 제주교난(1901년 교회와 제주 도민의 충돌 사건), 해서교안(1902년 황해도 지방 교회와 관청의 충돌 사건) 등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정부와 교민 조약이 체결되었다.

   결국 1899년(뮈텔 주교)에서 1904년에는 선교사의 정착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후 계속 개화 운동이 추진되어 1906년에는 경향 신문의 창간, 그리고 1911년에는 서울과 대구 교구 설립, 1942년에는 9개 교구가 설립되었고, 노기남 주교가 서울 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6·25를 맞아 많은 희생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도 계속 교회는 발전하여 휴전 당시 16만의 신자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고 1962년에는 신자가 53만에 이르자, 교계 제도가 설립되었고 김수환 대주교추기경에 서임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1981년에는 조선 교구 설립 150주년을 맞는 행사가 있었으며, 1984년에는 한국 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의 순교 복자 103위가 성인의 품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교회쇄신과 발전을 거듭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89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두 번째 내한한 가운데, 서울에서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현재 한국의 교세는 4백만의 신도를 헤아리고 있다.
출처 : [용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