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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Maubant, Pierre Philibert

   Maubant, Pierre Philibert(1803-1839). 파리 외방전교회원. 조선교구 선교사. 순교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한국명은 나백다록(羅伯多祿)이다. 프랑스 바시(Vassy)에서 태어나 1829년 5월 13일 신부가 되었다. 잠시 교구에서 보좌신부 생활을 한 후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3월 중국 사천(四川) 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서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만나 조선 선교사가 되기로 자원하고 조선에 입국하고자 복건성(福建省), 북경(北京) 등을 거쳐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이르렀다.

   그곳의 교우촌에서 1년간 머무르며 한문공부를 하였고 1835년 10월 20일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사하자, 이미 그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필요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바 있는 모방 신부브뤼기에르 주교가 준비한 길을 따라 조선 입국을 서둘렀다. 조선국경에 이르러 조선 교우들을 만나 1836년초 입국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가 되었다. 모방 신부는 조선말을 공부하면서 성사집전해야 했고 부활절을 서울에서 지내고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을 방문하고 200여명에게 영세를 주었다. 또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서두르고 이미 이 해에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의 경리부로 보냈다.

   1837년 샤스탕(Chastan, 鄭) 신부를 맞아 그와 함께 남은 공소들을 방문하였다. 새 공소를 세우고 공소회장을 세우는 등 교우들에게 필요한 지침들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 1837년 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입국하게 되어 조선교회는 이제 필요한 교회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또 교세도 급속히 신장되어 그의 입국 당시 4천 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1837년 말 8천 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러나 1839년 큰 박해, 즉 기해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이미 체포된 앵베르 주교는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게 자헌(自獻)할 것을 권고하였고, 두 신부는 자헌을 결심하고 9월 6일 홍주(洪州) 근처에서 대기중인 포졸에게 자헌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모방 신부는 여러 차례 신문과 고문을 받고 앵베르 주교샤스탕 신부와 같이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어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의 영관(榮冠)을 차지하였다.

   그의 시체는 20여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는 것을 교우들이 거두어 노고산(老姑山)에 안장하였고, 1843년에는 과천(果川)땅 삼성산(三聖山)으로 옮겨졌고 시복수속이 진행됨에 따라 1901년 명동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 모방 신부앵베르 주교 등과 함께 1857년 가경자(可敬者)가 되었고, 1925년에는 복자가 되었으며,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102위와 더불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