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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16주일. 2018년 7월 22일) .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20 조회수1,981 추천수1 반대(0) 신고

 

연중 제16주일. 2018722.

마르 6, 30-34. 예레 23, 1-6.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구원받기 위함이라 말하며 사람들을 율법(律法)준수(遵守)와 제물(祭物)봉헌(奉獻)에 얽매여 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이든, 자비하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배워 실천하며 사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함께 계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율법준수와 제물봉헌에만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직업적 율사(律士)와 제물봉헌을 담당하는 직업적 사제(司祭)들이 등장하면서 일어난 탈선(脫線)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이 세상의 원리를 적용하여, 잘 지키면 상 받고, 못 지키면 벌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제물봉헌에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인간 욕심의 원리를 적용하여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하느님이 좋아 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도 유대교에 속한 분이었지만, 그분은 율사와 사제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눈먼 길잡이들”(23,16)이라고 율사와 사제들을 혹평하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율사와 사제들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 인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하느님에 대해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인간 생명을 베푸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살아있게 살아야 합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거나,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죄인이라 단죄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도 하느님이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말씀(마르 2,17)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은 전도(傳道)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에 대해 예수님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들자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주는 마음입니다.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분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제자들이 기억하던 바를 기록한 문서들이지만, 그 안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한 결의(決意)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전도 활동을 한 후,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보고합니다. 이제 그들은 율법과 성전을 기준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준해서 실천하고, 반성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근거로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외딴곳으로 가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열어놓은 시야에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업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만 보이는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시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쉬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수고하며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11,28).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욕망과 성취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여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를 쉬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말할 때는 그분이 사랑하고 베푸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호세 11,1; 예레 3,19 참조).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예레미야예언서는 하느님이 은혜로우시다고 말한 다음,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절을 가장 큰 축일로 기념한 것도 우리 중심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은혜로우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해방을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중심의 좁은 시야에 갇히면,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자기 위에 군림하는 무서운 분입니다. 인간은 오로지 지키고,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얻어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도 은혜롭게 행동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감사에 참여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자기의 업적에만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예수님으로부터 참다운 자유를 배우라고 말합니다.요한복음서그대들은 내 벗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요한 15,14-1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할 일은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을 측은히 여기고, 그들이 은혜로우신 하느님에 대해 깨닫고, 그 은혜로우심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사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합니다. 재물(財物) 혹은 권력(權力)이 우리 삶의 유일한 보람으로 보여서 그것을 향한 욕심을 쫓다가 하느님 자녀의 자유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입신출세(立身出世)하고, 많은 것을 얻어 누리고 싶은 욕심은 인간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혼신(渾身)의 힘을 다 하여 매진하면서, 비굴하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나 한 사람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웃과의 유대를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측은히 여기고, 이웃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이웃과의 유대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진리입니다.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1-32).

 

하느님은 측은히 여기고 사랑하는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수양하지 않으면,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참다운 자유를 배웁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자기 한 사람만을 생각하는 속물근성(俗物根性)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예수님에게서 참다운 자유를 배워서 하느님의 진리를 살게 해 줍니다. 이웃을 측은히 여기는 은혜로운 사람이 하느님 자녀의 품위(品位)를 유지합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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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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