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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젊은이야, 일어나라(루카 7,11-1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17 조회수1,329 추천수1 반대(0) 신고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젊은이야, 일어나라(루카 7,11-17)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하는 사람과 봉사자들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한다. (1티모 3,1-13)
사랑하는 그대여, 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훌륭한 직무를 바라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3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4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5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6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는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7 또한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방을 받거나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습니다.
8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 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 됩니다.
9 그리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10 또 그들을 먼저 시험해 보고 나서  흠잡을 데가 없는 경우에만 봉사직을 수행하게 해야 합니다.
11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알고 모든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12 봉사자들은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자기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3 사실 봉사직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들은 좋은 명성을 얻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더욱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화답송 시편 101(100),1-2ㄱㄴ.2ㄷㄹ-3ㄱㄴ.5.6(◎ 2ㄹ)
◎ 저는 온전한 마음으로 걸으오리다.
○ 자애와 정의를 제가 노래하오리다. 주님,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저에게 언제 오시리이까? ◎
○ 저는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걸으오리다. 불의한 일을 제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 ◎
○ 제 이웃을 몰래 헐뜯는 자, 저는 없애 버리고, 거만한 눈 오만한 마음, 저는 참지 않으오리다. ◎
○ 제 눈은 이 땅의 진실한 이들에게 머물리니, 그들이 제 곁에 살고, 흠 없는 길을 걷는 이, 그런 이가 저에게 시중을 들리이다. ◎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의 죽은 외아들을 되살리신다. (루카 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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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제1독서 (1티모3,1-13)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됩니다."   (8)

 

티모테오 전서 3장 1-7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감독 직분(훗날 주교직에 해당)을 수행하는 일을 독려하고, 감독의 자격 요건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어서 이제 3장 8-13절까지 봉사자(훗날 부제직에 해당)의 자격 요건봉사자의 직분을 잘 수행한 자가 받을 보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여기서 '마찬가지로'로 번역된 '호사우토스'(hosautos; likewise)이제 사도 바오로가 감독의 요건에 대한 언급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내용으로서 봉사자의 요건에 대해 말할 것을 나타내지만, 이것 역시 앞의 감독의 요건과 유사할 것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봉사자'로 번역된 '디아코누스'(diakonus)의 원형 '디아코노스'(diakonos)본래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요한2,9)을 뜻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봉사하는 자'라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더 널리 사용되었다.

로마서 16장 1절콜로새서 1장 7절 등에서는 교회 및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의미로 쓰였으며, 코린토 전서 3장 5절에서는 '일꾼','사목자'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이것을 볼 때, 이 '디아코노스'(diakonos)라는 단어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일들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포괄적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가 3장 8절에서 말하는 '디아코노스'(diakonos)사목자 이외에 교회의 업무를 담당하는 일꾼을 말한다.

 

신약에서 이들에 대한 최초의 언급사도행전 6장에서 등장한다.

스테파노를 비롯한 일곱 명이 교회의 일꾼으로 간택되어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는 장면에 나오지만, 거기에서는 '디아코노스'(diakonos)라는 명칭이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곱 명이 부제 직분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다.

 

사도행전 6장에 의하면, 이들의 교회안에서의 임무는 주로 실무적인 것에 국한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이들을 실제적인 일과  행정에 있어서의 교회내의 전문가들로

인식하기도 한다.

 

한편 본 단락에서 주목할 것은 감독의 요건과 봉사자의 요건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같다는 점이다. 다만 봉사자의 요건으로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일구 이언하지 않는)이나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는 안된다는 것이 추가되었다.

 

'한 입으로 두 말하지'로 번역된 '딜로구스'(dillogus)의 원형 '딜로고스'(dillogos)는  본래 '두 번'(마르코14,30.72)이라는 뜻의 부사 '디스'(dis)'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레고'(leg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 폴리카르포스는 이것을 '남을 중상하다'라는 의미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어떤 것을 말하면서도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어떤 이는 '한 가지 사실을 놓고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서 교묘히 처신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술에 빠져서도 안되고'는 3장 3절의 '술꾼이 아니라'와 거의 같은 의미라고 보면된다. 여기서 '빠져서도'에 해당하는 '프로세콘타스'(prosechontas)의 원형 '프로세코'(prosecho) 역시 '관심을 가지다'라는 소극적 의미에서부터 '전념하다', '열중하다', '빠지다', '인박히다' 등의 적극적인 의미도 갖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많은 술에 열중하여 빠져 있지 아니하는'(not indulging in much wine)이 된다.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구제하고, 교회 재정을 관리해야 하는 봉사자(부제)에게 있어 이것은 치명적인 결격 사유이다.

 

술에 인이 박혀 살아가는 이들은 판단력이 분명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제력이 부족하므로, 이런 자들에게 봉사자의 직분을 준다는 것은 교회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한편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pursuing dishonest gain)로 번역된 '아이스크로케르데이스'(aischrokerdeis)의 원형 '아이스크로케르데스'(aischrokerdes)본래 '은밀한'이란 뜻을 지닌 '아이스크로스'(aischros)와  '유익한' 이란 뜻을 지닌  '케르도스'(kerdos)의 합성어로서 단적으로 말해 '은밀하고 비열한 수단으로 이득을 취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신약에서 본문한 동일한 표현으로  티토서 1장 7절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런데 봉사자의 자격 요건으로 제시되는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되고'3절에서 감독의 자격 요건으로 제시되고 있는 '돈 욕심이 없으며'라는 어구는 물질적 측면에서 깨끗해야 함을 권고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전자는 불법적인 돈, 곧 깨끗하지 못한 돈을 뜻하고, 후자는 합법적인 돈이란 뉘앙스를 나타낸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봉사자(부제)의 자격 요건을 거론하는 8절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물질을 모으기 위해서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이는 횡령자나 착복자 같은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정당한 방법이나 수단으로 물질을 모으지 않고, 불법적인 수단과 방법으로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기에게 맡겨져 있는 양떼 즉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다만 그 성도들을 통해서 자신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가리켜 삯꾼이라고 하셨고, 이리가 공격해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자라고 하셨다(요한10,12).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7,11-17)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3~14)

 

루카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직접 예수님께 대해 '주님', 곧 '퀴리오스'(kyrios)를 사용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그 전에 사용된 '퀴리오스'(kyrios)다른 이들의 고백이나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사용한(루카6,5) 것들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루카 복음 7장 11~17절에 이르는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그전까지 행하신 기적 가운데 가장 절정에 달한 것이며,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처음으로 '퀴리오스'(kyrios)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까지도 다스리는 주권자요,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분임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여기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he; he had compassion)의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번역은 '그의 마음이 동정으로 흔들렸다', '가슴앓이를 했다'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한 과부로 인해 가슴앓이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이 과부가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7장 13절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진 예수님께서 과부로서의 고달픈 삶을 살아온 한 여인이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뼛속 깊이 동감하시고 계시는 장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데, 루카 복음사가는 이것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2위 천주 성자이심과 동시에 불완전하며 연약한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친히 겪고 이해하실 분이심을 보여 주면서 예수님의 인성(人性)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회당장 아이로의 딸이나 라자로의 소생 사건에서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이다. 단 하나의 희망이었던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과부를 보시며, 창자까지 뒤틀려질 정도로 깊게 공감하시며 먼저 다가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의 인간적인 감정, 특히 소외되고 불쌍한 자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인간애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관에 손을 대시자'

 

상여를 멘 자들이나 과부가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몸소 그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가셨다.

그리고 죽은 젊은이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에 손을 대셨다. 하지만 유대인의 정결법에 있어서, 죽은 시체나 무덤 또는 주검에 관계된 것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한 일이다(레위22,4; 민수19,11.16).

 

유대인의 관념으로는,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에 죽은 이에게 손을 대는 것 자체만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소 그 부정한 것에 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기에 딱하고 안쓰럽게 여기신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미 율법에 대하여 초월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말의 '관'시체가 들어있는 사방이 닫혀 있는 나무 상자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에 해당하는 '소루'(soru; bier; coffin)의 원형 '소로스'(soros)시체를 지탱하는 '들것'(bier)이나 작은 버들가지로 만든 뚜껑이 없는 '위가 뚫린 관'(open coffin)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을 때 사람이 따로 관 뚜껑을 열 필요가 없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4)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12절에 '죽은 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는 '테트네코스'(tethnekos)라는 완료 분사로 쓰인 이미 '죽은 이'와 이야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이미 죽은 시체를 향해 '젊은이야' (네아니스케; neaniske; young man)라는 호칭으로 부르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시체를 향해 '너에게'('소이'; soi; to you), 곧 살아있는 인격체에게 쓰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미 죽은 이에게까지도 생명의 주님의 되신 예수님의 말씀의 신적 능력이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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