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10.0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10-09 조회수1,454 추천수9 반대(0) 신고

 

2019년 10월 9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요나 4,1-11

1 요나는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났다.

2 그래서 그는 주님께 기도하였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4 주님께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말씀하셨다.

5 요나는 그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
6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오르게 하셨다.

그러자 아주까리가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그를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 주었다.

 요나는 그 아주까리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7 그런데 이튿날 동이 틀 무렵,

 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쏠게 하시니,

아주까리가 시들어 버렸다.
8 해가 떠오르자 하느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보내셨다.

거기에다 해가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9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11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복음 루카 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저는 책을 좋아합니다.

누구는 영화가 더 재미있다고

하지만, 저의 경우는 책이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졸거나 잠들 때가

많지만, 책을 볼 때는 아주 지루한

책이라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실 중고등학교 때 만해도

독서의 맛을 잘 몰랐습니다.

따분하기만 했고,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서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얻게 된 것이지요.

이제는 책 없이는 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의 경험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

이렇게 저렇게 좋은 점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그저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저의 책에 대한 경험이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 제가 특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채칼에 손이 베인 적이

있습니다.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채칼에 손이

베이면 아프겠지?’라고 막연한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그 고통을 겪는 것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직접 경험을 하고

나서는 얼마나 아픈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 그 뒤 더욱더

조심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읽고

또 읽다 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하지

 않기에 모르는 것입니다.

직접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만 그럴까요? 우리의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교우가 “신부님, 세례를

받았음에도 전혀 느끼는 것이

없어요.”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연합니다. 믿음을 키우기 위한

자신의 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곧바로 우리가

매 미사 때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이 기도는 당시의

유다인들이 의무적으로 바치는

기도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하느님을 ‘아버지’

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느님과 우리의 간격을

좁혀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멀리에

계신 분으로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아주 가까이 계신 아버지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냥 알아서 잘 되게 해주세요.’

라는 막연한 기도를 바치고,

세상일에만 온통 신경을 쓰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하느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직접 체험해야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고,

이 힘으로 세상을 더욱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후회가 남지 않는 정복은

우리 자신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

(주님의 기도 성당에 붙어있는

우리말 주님의 기도)


효도

저의 아버지는 지금 연세가

 90이 넘으신 고령이십니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 수술을

계속해서인지 많은 기억을

잃어버리셨습니다.

매주 미사를 함께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만나는데,

그때마다 여러 가지를 물어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해 모르는 것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후회를 하게 됩니다.
‘아버지 인생 이야기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다면….’
효도란 특별한 행동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로 부모를 궁금해하는 것이 아닐까요?

부모에 대한 편견을 한쪽에 내려놓고

그들 인생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한 효도가 아닐까요?

(이 바위에 앉아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다고 하지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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