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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2주간 월요일]중풍병자치유 (루카 5,17-2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09 조회수2,94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9년 12월 9일 화요일

가해[대림 제2주간 월요일]중풍병자치유 (루카 5,17-26)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오시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리니,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고 예언한다. (이사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8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9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화답송  시편 85(84),9ㄱㄴㄷ과 10.11-12.13-14(◎ 이사 35,4ㄷㅂ 참조)
◎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예수님께서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며 중풍에 걸린 이를 고쳐 주시어,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신다. (루카 5,17-26)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이사35,1-10)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5~6ㄱ)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5)

 

본절부터 7절까지는, 종말에 선민 이스라엘의 땅에 넘칠 환희과 기쁨을 예고하는 35장 1-2절에 이어, 다시 하느님께서 가져오실 당신 백성들과 그들의 땅의 역동적 회복을 예언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역동적 구원은 부분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 성취되었다.

 

특히 5절과 6절은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되심을 입증하면서 답하신 말씀과 동일한 것이다(마르7,37 ; 루카7,22 ; 마태11,2-6).

즉 이것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문 서두에 제시된 '그때에' 에 해당하는 '아즈'(az ; then)일차적으로는 메시아 시대 나타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것은 주님께서 도래케 하시는, 온전한 회복의 나라,영원한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이루어질 그 나라로 귀결된다.

 

한편, 하느님께서 회복케 하시는 역사(役事)가 이루어질 날에 일어나게 될 사건으로 먼저 제시되는 것은 맹인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열리고'에 해당하는 '티파카흐나'(thiphaqahna) '열다' 의미를 지닌 '파카흐'(phaqah)수동형으로서, '열릴 것이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이 단어가 수동형으로 사용된 것 그것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것이다.

 

즉 맹인의 눈이 열리는 역사가 전적으로 주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이것은 문자 그대로 맹인이 눈을 뜨고 보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며, 영적 어두움 속에서 멸망의 길을 걷던 자들이 진리의 빛을 보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던 백성에게 내려졌던 책벌이 풀리는 것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이사6,10; 29,18).

그들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게 될 것이며,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더 이상 무익한 이방의 강대국이나 헛된 이방의 우상이 아닌, 완전한 구원이신 주 하느님만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어지는 본절 후반부는 '눈먼 이의 눈' 에서 '귀먹은 이의 귀'로 바뀌었을 뿐, 앞 부분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평행 대구 문장으로 풀이된다.

여기서는 청각기관인 '귀'란 표현이 사용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했던 자들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귀가 열리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역사가 이루어 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떠뜨리리라.' (6ㄱ)

 

예수님은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 여덟 해나 누워있던 병자 치유하셔서 그로 하여금 걷게 하셨으며(요한 5,2-9),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해  그로 하여금 사슴처럼 뛰게 하였다.(사도 3,1-9)

이처럼 메시아 시대가 되면, 절름발이도 건강한 다리를 갖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영적으로 해석하면, 불완전한 신앙을 가졌던 자들이 신앙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고,  죄의 굴레에 얽매여 바르게 사는 데 있어 제한을 받던 자들이, 그 굴레를 떨쳐버림으로 인해, 진리의 길을 마음껏 활보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중 갈릴리 지방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셔서, 그로 하여금 말을 분명하게 하신 사건(마르코 복음 7,31-37)을 연상케 한다.

 

이것 역시도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과거에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못했던 자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며, 하느님의 진리를 침묵하던 자들이 입을 벌려 담대히 그 진리를 증거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으로 알아 들을 수 있다.

 

한편, 앞의 5절의 경우는, 메시아의 활동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표현이 모두 수동형으로 사용되어,하느님의 주도적인 역사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 발로 걷고 입으로 말하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는 강조 능동형과 능동형 동사 사용되었다.

 

이것은 메시아 시대의 회복의 양상이 하느님의 주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자들의 적극적인 순종과 증거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대림 제2주간 월요일(루카 5,17-26,) (마태9,1-8 해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4~5)

 

마태오 복음 9장 4절'아시고'에 해당하는 '이돈'(idon; knewing)원형'호라오'(horao)로 추정되는데, '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의 마음속까지도 정확하게 꿰뚫어 관찰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해 여기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시편 7장 10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의 심장, 즉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으로 계시된다.

천주 성자이신 예수님께서도 전지전능하신 신적(神的) 속성을 가지고 계셨기에 즉시 율법 학자들의 마음을 간파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는 내용은 마르코 복음이나 루카 복음에는 없고, 마태오 복음사가가 첨가한 부분이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율법 학자들의 생각이 하느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보호하려는 율법의 근본정신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제2위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의 마음속에서 시작된 주님을 대적하는 마음은 결국 주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병고침의 기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죄사함의 기적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당신 자신이 바로 그 권세를 지니신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음을 마태오 복음사가가 부각시키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신의 일차적인 독자인 유대계 크리스챤들에게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정확하게 알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편, '어느 쪽이 더 쉬우냐?'에서 '쉽다'는 의미로 번역된 '유코포테론'(eukopoteron; easier)은 '좋다'는 뜻의 부사 '유'(eu)'일하다', '노력하다'는 뜻을 지니는 '코포스'(kopos)의 합성어로서 '일하기 좋은'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보다 쉽다' 혹은 '보다 알맞다'는 비교급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가시적인 결과가 요구되는 선언이지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은 선언의 결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율법 학자들은 유다인들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에 입각해서 죄로 말미암아 병이 생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를 가지고 병을 먼저 치유하면, 그 병의 원인인 죄가 자동적으로 없어진 것이니,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 9장 2절에서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씀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그 선포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고,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선포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이다.

 2017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5,17-26: 지붕을 벗기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중풍병자는 주위의 사람들의 믿음과 노력에 의해, 혹은 동료들의 기도와 희생에 의해서 예수님께 인도되었고, 은총을 받는다. 모든 병자와 죄인들에게는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갈 중재자가 필요함을 말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 환자를 침상에 달아 당신 앞으로 내려 보낸 그들의 믿음을, 즉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0) 하신다. 예수님은 그 환자의 영을 먼저 고쳐 주신다. 그냥 걷게 되면 다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신 그분은 그의 영혼의 병을 먼저 치유하신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수군거린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21)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단죄하며 판단하고 있다. 이 판단이 결국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나의 이웃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나의 잣대로 재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러한 마음을 보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23-24)

예수께서는 여기서 죄를 용서하는 것과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 중 어느 것이 더 쉬운 것이냐고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다. 두 행위 모두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유하심으로써 밝혀주시고 계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이려고 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있었고, 군중들은 그 기적을 보고 두려움에 싸이지만,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26)고 한다. 여기서 오늘이란 루카가 구원의 미래성이 아닌 현재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갔던 친구들의 희생으로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도 받은 만큼 남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신앙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자) 대림 제2주간 월요일 - 12월10일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에게 병을 고쳐주시기는커녕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고, 이를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분개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질병은 죄로 인한 결과라 생각했습니다. 중한 병에 걸린 것은 그만큼 죄가 크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지요. 따라서 병이 나으려면 죄를 용서받아야만 했습니다. 죄는 누가 용서해 줍니까? 율법 교사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정체도 잘 모르는 예수님께서 병자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시니, 도저히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병자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반면 병이 치유된 것은 그 병자가 일어나 걸음으로써 증명이 되지요.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먼저 고쳐 주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의 죄까지도 씻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권위가 예수님 안에 계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임을 이 세상 곳곳에 널리 전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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