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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제1독서 (이사7,10-14;8,10ㄷ)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25 조회수1,280 추천수0 반대(0) 신고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제1독서 (이사7,10-14;8,10ㄷ)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렵 합니까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보십시오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7,10~14참조)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에 반기를 든다남부 유다의 아하즈 임금(B.C.735~716)이 아시리아에 반대하는 그들 동맹을 거절하자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이 남부 유다를 침공한다.

아하즈의 목숨뿐 아니라 다윗 왕조의 운명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이사야는 저 유명한 임마누엘의 표징을 아하즈에게 알리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한 아하즈는 하느님께 매달리는 대신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하고그 댓가로 아시리아의 이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이사야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그가 반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하지 말라고 한 것은 당시 근동의 초강대국인 아시리아에게 무모하게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었지 아시리아 의존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10)

이사야서 7장 1~9절은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하즈에게 남부 유다가 북부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침략에서 보존될 것을 예언하는 내용이었다.

 

이제 이어지는 이사야서 7장 10~16절은 남부 유다의 보존 예언을 확증하는표징으로서 임마누엘의 예언을 주는 내용이다즉 이것은 주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아하즈에게 다시 한 번 주님을 믿고 그에게 도움을 구하라는 일종의 신앙적 도전이라 할 수 있으며표징을 구하지 않는 그에게 주님께서 친히 표징을 주심으로써 그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이르셨다'는 말씀은 7장 13절의 '이사야가 말하였다'와 연결되는데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 것이다.

이사야는 주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되풀이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를자신의 지성과 언변에 담아 아하즈에게 전달하였던 것이다.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11)

여기서 제기되는 '표징즉 '오트'(oth)는 어떤 추상적 사실이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표적과 같은 것을 지칭한다.

 

아하즈에게 하나의 표징(징조)을 구하라는 것은 그가 주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주님의 능력을 얼마나 믿는지를 표현하라는 말이다따라서 그 제안을 표면적으로 보기에 하느님을 시험하라는 의미인 것 같지만실제로는 아하즈의 믿음을 시험하는 제안이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으로서 인간이 구하는 어떠한 표적도 다 보여줄 수 있다.

더욱이 주님께 징조를 구하라는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이 시공간을 벗어나 가상적인 것이 아닌현실 가운데 실제 역사하는 것이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즉 이것은 세상에서 그분이 구체적으로 행사하시는 일실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을 체험함으로써 보다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제안이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느님을 가리켜 '너의 하느님즉 '아하즈의 하느님'이라고 칭한다이것은 그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표현이다다시 말해서 그가 헛되고 무력한 거짓 신을 섬기는 이방 민족의 왕이 아닌하느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왕이며하느님을 섬기는 계약의 백성들 중에 통치자로 존재함을 확인시켜주는 표현인 것이다.

그는 지금껏 이방 신을 섬기고 온갖 패역을 자행하는 자였지만이 일을 계기로 하느님을 다시 자신의 하느님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계약 국가 유다를 하느님의 섬기는 나라로 다시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고 있는 것이다.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11)

아하즈가 표징을 구하되 그 표징을 깊은 데서 오게 해 달라고 혹은 높은 데서 오게 해달라고 구하라는 의미이다.

 

이 두 장소는 인간이 도달하기 불가능한 곳으로서 음부와 하늘을 지칭한다.

만약 그곳에서 표징이 보인다면이것은 하느님께서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요구까지도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확인될 것이다따라서 지금 이사야는 아하즈에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징표로 구하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12)

이것은 아하즈가 주님께서 제안하시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음을 보여주며그가 아시리아와 손을 잡고 그 제국으로부터 도움을 받겠다는 것을 이미 결심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아하즈는 가장 믿을만한 것으로서 주 하느님이 아닌장차 유다를 침공할 이방 아시리아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본문은 두 절 모두 강한 부정어 ''(lo)와 더불어 동사의 미완료형이 사용된 구문으로서결코 영원히 구하지 않겠다는 것으로써 아하즈가 얼마나 완고하고 사악한 자인지그리고 하느님께 대체 얼마나 무관심한 자인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시험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아낫쎄'(anaseh)의 원형 '나싸'(nasah)는 구약성경에서 34회 사용된 동사로서 어떤 물건의 품질이나 인격의 진정성을 알아내기 위해 시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아하즈도 신명기 6장 16절의 '그분을 시험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근거삼아 이렇게 거절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신명기의 말씀은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그를 시험하는 불신앙적 행위를 금한 말씀이다.

 

반면에 지금 이사야가 제안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그 믿음을 하느님께 어려운 징조를 구함으로써 표현하라는 것이므로 이 둘은 아무 상관 관계가 없다그 점에서 볼 때 아하즈가 거부하고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그의 백성이 마땅히 올려야 할 기도인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기도를 거부한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능력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한다는 표시이며하느님을 도무지 신뢰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13)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왕실을 가리켜 '아하즈의 왕실'이라고 칭하지 않고 '다윗 왕실'이라고 칭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윗 왕실은 다윗 임금이 다스리던 시대의 이스라엘의 왕실을 의미하는데그 왕실은 주 하느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통치를 수행하였다그런데 수백년이 흐르면서 그 믿음의 표상은 불신앙의 표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응당 믿음의 표상이 되어야 마땅한 유다의 왕실이 어찌하여 불신앙의 표상이 되었느냐고 물으면서 한탄의 어조로 이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유다 임금 아하즈는 유다 왕실을 대표하는 자로서 그의 뜻은 곧 왕실 전체의 뜻이기에 아하즈의 태도에 따라 왕실과 나라 전체가 복을 받기도 하고심판을 받기도 하는데 말이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렵 합니까?' (13)

여기서 '사람들'에 해당하는 '아나쉼'(anashim)은 흔히 유한하고 병약한 존재로서의 사람을 의미하는 명사 '에노쉬'(enosh)의 복수형이다.

자기 자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주권자를 의지하여 도움을 기대했지만오히려 유다 왕실로부터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통만 당하는 무력한 백성들을 의미한다.

 

이사야서 7장 11절까지만 해도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너의 하느님', 즉 아하즈의 하느님으로 지칭하다가 여기서는 '나의 하느님', 즉 이사야 자신의 하느님으로 지칭하고 있다이렇게 호칭이 바뀌게 된 것은 이사야서 7장 12절에 기록되어 있는 아하즈의 불신앙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불신앙과 교만으로 가득하여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에게는 기탄없이 등을 돌리시는겸손하게 그를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다.

'성가시게 하고서'의 '할르오트'(haleoth)의 원형 '라아'(laah)는 구약 성경에서 19회 사용된 단어로서 피곤하게 하고 진절머리가 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탈출7,18; 4,2; 16,7; 예레15,6).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14)

아하즈가 구하기를 거부한 표징을 주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실 것이 선포된다하느님께서 표징을 주신다는 것은 아하즈가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그것을 그분은 능히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실 하느님은 유다 백성에게 표징을 보여주실 의무가 없다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표징을 주신다는 것은 무상의 선물인 은총인 것이다하지만 그 은총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될 수 없다.

 

'보십시오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14)

여기서 '젊은 여인'(처녀; virgine)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알르마'(haalmah)이다.

이 단어의 원형 '알르마'(almah)는 구약에서 7회 사용되었는데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즉 결혼 적령기에 있지만 성()경험이 없는 여자라는 의미로 사용된다(창세24,43; 탈출2,8; 잠언30,19).

 

더욱이 구약 성경 희랍어 번역본인 칠십인역(LXX)은 본문의 이 단어를 숫처녀를 의미하는 희랍어 '파르테노스'(pharthenos)로 번역하였다.

이 '파르테노스'(pharthenos)는 숫처녀를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 '뻬툴라' (bethula; 창세24,16)의 번역어이기도 하며마태오 복음 사가가 마리아를 가리켜 '처녀'(동정녀)라고 한 희랍어 '파르테노스'와 동일한 단어이기도 하다(마태1,23).

 

이러한 사실은 본문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가리키는 예언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난점을 피할 수 없다왜냐하면 그 징조가 당시 아하즈 임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700년 후에 일어날 징조가 당시 아하즈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또한 그러하다면 그 징조가 아하즈에게 어떻게 그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징조가 될 수 있겠는가?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난제로 남아 있다하지만 이 난제를 이렇게 해석하면 물의가 없다.

 

사실 700년 후에 이루어질 일이지만이사야 예언자가 그 사건을 예언하면서 그것이 자기 시대에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였고또 아하즈에게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전혀 부자연스런 일이 아니고그 예언이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하느님의 그 광대한 진리를 하느님께서 계시로 주신대로 왜곡이나 변조없이 그대로 증거한 것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주장을 취하게 되면여전히 이사야서 7장 16절이 난해한 구절로 남는다.

'그 아이가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게 되기 전에임금님께서 혐오하시는 저 두 임금의 땅은 황량하게 될 것입니다' (7,16)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700년 후에 태어날 임마누엘의 예표로서 이사야 시대에 한 아들을 주셨을 것이며이사야서 7장 16절은 아마도 그 아들에 대한 예언일 것이다.

 

그 아들은 이사야서 8장 3, 8장 4절과 관련하여 이사야가 그 아내를 통해 낳은 아들이 분명하며 그 이름은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이다이사야서 7장 16절의 아들이 임마누엘을 예표하는 것은 구약 시대의 이사악이나 요셉여호수아 등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다는 사실과 관련지을 때 조금도 부자연스런 것이 아니다.

 

창세기의 요셉이 동정녀를 통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지만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 수 있었듯이또한 이사악이 비록 제단에서 문자적으로 죽지는 않았지만그가 십자가상 희생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 수 있었듯이그 여자가 낳게 될 아들 역시 믿는 자에게 구원이 되고 불신자에게 심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14)

'임마누엘'은 '~와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 ''(im)에 1인칭 복수 접미어가 결합하여 '하느님'이란 뜻의 명사 ''(el)이 함께 쓰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가 된다그런데 이 이름은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달리 이 아이를 낳은 어미인 그 처녀가 지어줄 것이다.

즉 '이라 할 것이다'에 해당하는 '웨카라트'(weqarath)는 '칭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라'(qara)의 여성 3인칭 단수형이다.

 

사실 700년 이후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을 낳아 천사의 지시대로 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마태1,21). 그런 점에서 '임마누엘'은 그 아들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그 아들의 인격속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동정녀를 통하여 이 땅에 보내실 분은 하느님 당신 자신이 육화(肉化)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명칭이 바로 '임마누엘'(immanuel)이라는 것이다.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logos)이신 성자 하느님께서 (요한1,1~3) 이 땅에 강생(육화)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직접 그의 백성 바로 곁으로 오신 것이다(요한1,14). 곧 임마누엘은 제2위 하느님이신 성자 그리스도의 강생(육화)에 대한 예언이며그의 백성이 하느님을 볼 것에 대한 축복의 예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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