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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일 <나자로야 나와라> (요한10:39-11:1-1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29 조회수1,59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  3.  29. 사순 제5주일 (공동번역성서)

 

 

 나자로야 나와라

(요한10:39-11:1-16)

39 그 때에 유다인들이 다시금 예수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피하셨다. 40 예수께서는 다시 요한이 전에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거기에 머무르셨다. 41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 와서 서로 '요한은 기적을 보여 주지 못했지만 그가 이 사람에 관해서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고 하면서 42 많은 사람이 거기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1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가 사는 베다니아 동네에 라자로라는 병자가 있었다. 2 앓고 있는 라자로는 마리아의 오빠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린 적이 있는 여자였다. 3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하고 전했다. 4 예수께서는 그 전갈을 받으시고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고 계셨다. 6 그러나 나자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르시다가 이틀이 지난 뒤에야 7 제자들에게 '유다로 돌아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이 '선생님, 얼마 전만 해도 유다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그 곳으로 다시 가시겠습니까?' 하고 걱정하자 9 예수께서는 '낮은 열 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낮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10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하시며 11 이어서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12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 라자로가 잠이 들었다면 곧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3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라자로가 죽었다는 뜻이었는데 제자들은 그저 잠을 자고 있다는 말로 알아 들었던 것이다. 14 그래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15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그곳으로 가자.' 16 그 때에 쌍동이라고 불리던 토마가 자기 동료인 딴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을 4 부분으로 나누어 본다면 그① 첫 번재 부분이(1:1-18)까지의 서론 부분이었고  ②두 번째 부분이(1:19-12:50)의 7가지 표적  부분이었습니다. ③세 번째 부분이 (13:1-20:31)까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마지막 기간 동안의 강화와 기도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내용이었고 ④ 네 번째 부분이 (21:1- 21:25) 후기 부분이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을 표적(표징.기적)의책 이라고 부르고 세 번째 부분을 영광의책 이라 부른다 그러한 구조로 요한복음을 보면 서론, 표적들, 표적의 실제화인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후기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나자로의 부활 이야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책인 13장에 붙여서 설명을 해 드리는 이유는 주님께서  죽은 나자로를 살리시는 사건을 통하여 13장부터 전개되는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아주 상세하게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총 일곱 개의 표적(표징.기적)이 등장 합니다.  그 ①첫번재 표적이 요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사건이고  ②두번째 표적이 왕의 신하 아들을 고쳐주는 사건 입니다 그리고 ③세 번째 표적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 고 ④네 번재 표적이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사건 이며 ⑤다섯 번재 표적이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 이고 ⑥여섯번째 표적이 소경을 고치는 사건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⑦일곱번째 표적이 죽은 나자로를 살리시는 사건입니다. 

이러한 표적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 분이 이 땅에서 이루실 일이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표지판들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표적들을 오로지 아래 세상의 물질적인 현상으로만 깨닫고 그 물질적인 현상이 어떠한 영원한 진리를 계시하는지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의  그 일곱 표적의 책이 어떻게 열립니까? 요한복음 2장의 가나혼인잔치가 어떻게 열리지요?

 (요한1:51) 51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1:19-12:50)까지의 표적의 책 제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자 위의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하늘의 생명력이 부어지게 되는 ‘복음’ 을 설명하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빵이라든지 포도주라든지 물 위를 걷는다든지 병을 고친다든지 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이 세 상의 것들과 현상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는 것은 구약시대에 국한된 것이지요. 

성령이 오시고 우리애게 믿음이 생긴 이후에는 굳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늘의 퐁요를 설명하거나 구원을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이라는 새 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적 표적들인 요한복음의 표적들의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인 나자로의 죽음과 부활은 결국 무엇을 가리키겠습니까?   표적으로 요한복음의 표적이 끝나고 이제 실체가 드러나는 것 이니까요. 구약의 종결과 완성의 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수인 7을 써서 일곱 번째 표적인 것입니다.  구약의 완성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그 표적들의 실체이신 진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일이 완성이 되는 것 입니다. 그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요한11:25-26) 25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26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타가 뒤늦게 오시는 예수님을 마중 나갔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25절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어구는 지금 예수님께서 죽은 나자로를 살리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어구입니다. 그건 구약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하느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이 설명이 되는 시대는 구약 시대입니다. 

그런데 26절에 재미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믿음’ 과 ‘영원’ 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영원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이오’ 라는 단어는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으로 설명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약의 사건 즉 나자로의 부활 사건은  살아서 믿는 자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 신약의 복음의 그림자 임이 그 두 마디 대조에서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나자로가 살아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풀려나게 되는 교회의 이야기를 구약적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로의 이야기가 향유를부어 주님의 죽음을 예비했던 마리아의 소개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요한11:2) 2 앓고 있는 라자로는 마리아의 오빠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린 적이 있는 여자였다.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붓고 주님의 죽음을 예비한 것은 다음 장인 12장에 가서야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이 11장에서 서둘러 12장의 마리아 이야기를 소급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건  나자로의 이야기가 바로 주님의 죽으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죽은 나자로가 살아나는 사건의 개괄적인 틀을 한번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39절부터 42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요한10:39-42) 39 그 때에 유다인들이 다시금 예수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피하셨다. 40 예수께서는 다시 요한이 전에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거기에 머무르셨다. 41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 와서 서로 '요한은 기적을 보여 주지 못했지만 그가 이 사람에 관해서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고 하면서 42 많은 사람이 거기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나자로의 사건 바로 앞에 예수님의 거절당하심과 요한의 증거 그리고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사전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굳이 없어도 될 부분 같아 보이는데 요한이 굳이 나자로의 죽음 앞에 밀어 넣습니다. 그리고는 11장으로 가서 나자로의 죽음과 부활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진행이지요? 

빛이 오셨는데 그 빛이 자기 백성들에게 거절당합니다. 그리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 이라는 요한의 증거가 이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생겨납니다. 요한복음 1장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표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의 표적입니다. 그 표적은 7일째 되던 날에 일어난 표적이었지요?  역시 나자로의 사건도 일곱 번째 표적입니다. 둘 다 일곱 번째의 것이고  그 앞에 나열되는 거절당하시는 예수님 요한의 증거 많은 이들의 돌아옴 등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두 표적은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다른 그림이라는 것을 요한이 이야기 하고 싶어서 그러한 동일한 구조를 심어 놓은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는 잔치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슬픔이지요?  거기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포도주가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비로소 그 슬픔의 잔치는 기쁨의 잔치가 된 것입니다. 

나자로가 죽었습니다. 슬픔입니다. 그런데 불가항력적 은혜가 그에게 쏟아 부어져 그가 살아났습니다. 기쁨입니다.  둘 다 슬픔에서 시작하여 기쁨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슬픔과 기쁨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이 개입하는 형국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의 혼인잔치의 표적이 율법을 기각해 버리는(정결예식을 행하던 항아리에 물이 없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잔치를 잔치로 완성하는 십자가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 본문의 죽은 나자로가 살아나는 사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십자가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쉬운 말로 교회의 출애굽 사건 교회의 구속사건이 그림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0절로 가 보겠습니다.

  (요한10:40) 40 예수께서는 다시 요한이 전에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거기에 머무르셨다. 

 

주님께서 요르단 동편으로 피하시지요?  그러니까 지금 주님이 죽은 라자로를 살리러 오시는 모습은 요르단 동편에서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요르단강을 건너  이 세상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철옹성 에리고와 같은 사망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시는 형국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여호수아의 인도아래 요르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너서 에리고를 무너뜨린 사건과 같은 그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로의 이야기가 요르단강 저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그리스(헬라)어 표기가 예수이지요 그 상황이 어떠했는지 한 번 볼까요?

(여호3:1-6) 1 아침 일찍이 여호수아는 천막을 거두어 온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시띰을 떠났다. 요르단강에 다다른 그들은 강을 건너지 않고 거기에 묵었다. 2 사흘 후에 장교들이 천막 사이를 돌아 다니며 3 백성에게 지시하였다. '레위인 사제들이 너희 하느님 야훼의 계약궤를 메고 나서는 것이 보이거든 너희도 각기 있던 자리를 떠나 그 궤를 따라 나서라. 4 그래야 너희가 일찌기 가 본 적이 없는 길을 알고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천 척 가량 궤를 앞세워라. 더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 5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지시하였다. '내일 아침까지 모두들 목욕재계 하여라. 야훼께서 내일 아침에 너희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이다.' 6 여호수아는 또 사제들에게 명령하였다. '계약궤를 메고 백성들 선두에 서서 강을 건너라.' 명령대로 사제들은 계약 궤를 메고 백성들의 선두에 섰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와 함께 요르단강을 막 건너가기 전 요르단 동편의 상황입니다. 2절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삼일 후에’ 라는 어구입니다. 그 어구는 ‘사흘째에’ 라고 번역을 할 수도 있고 ‘사흘 후에’ 라고 번역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을 건너서 죽은 나자로에게 가실 때에 며칠을 더 있다가 가시지요? 

(요한11:6-7) 6 그러나 나자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르시다가 이틀이 지난 뒤에야  7 제자들에게 '유다로 돌아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도 이틀을 더 머무시고 사흘째에 요르단강을 건너 가지요?  그 사흘이라는 단어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등장했던 단어입니다.

 (요한2:1) 1 이런 일이 있은 지 사흘 째 되던 날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요르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드러간 사건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여 잔치가 잔치답게 완성된 표적과 죽은 나자로가 살아나는 사건은 정확하게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이틀을 더 머무셨다는 말씀을 통하여 ‘사흘’ 을 암시함과 동시에 ‘나흘’ 이라는 단어도 함께 사용하여 나자로의 완전한 죽음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4:21-24) 21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였다. '훗날 너희의 후손이 이 돌들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22 이스라엘이 이 요르단강을 발을 적시지 않고 건넌 일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일러 주어라. 23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우리 앞에서 홍해바다를 말리시어 우리가 모두 건너도록 해 주시지 않았느냐? 그처럼 우리 앞에서 요르단강 물도 말리시어 우리로 건너게 해 주신 것이다. 24 그리하여 세상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야훼의 손이 얼마나 힘있으신가를 알게 하고 언제까지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하셨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홍해를 건넌 사건과 요르단강을 건넌 사건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죽은 나자로가 살아나는 사건은 홍해를 건너서 이스라엘 장자들의 죽음을 모두 먹어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리고 잇는 것이며 요르단강을 건너 철옹성 에리고를 한 번에 무너뜨려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도저히 상대할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는 죽음, 세상 권세를 예수님께서 홀로 어린양의 십자가로 박살을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로의 사건 바로 다음에 우리 주님의 과월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요한11:53-55) 53 그 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54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이상 더 유다 지방에서 드러나게 나다니지 않으시고 그 곳을 떠나 광야 근처에 있는 지방으로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머물러 계셨다.  55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다가 오자 많은 사람들이 명절 전에 몸을 정결하게 하려고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다. 

나자로가 살아난 기적의 현장에 있던 자들이 그 기적을 보고 주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따라서 기적이 믿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는데 그 기적이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자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걸 보세요. 그리고 바로 과월절이 등장합니다. 

죽음에 붙들려 있던 나자로가 그 죽음에서 풀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일에는 주님의 과월절 즉 어린양의 십자가가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과월절은 무죄한 어린양의 피에 의해 죽어야 할 장자들이 거저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구원이 바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함께 요르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처음 지킨 것입니다.

(여호5:10) 10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에 진을 쳤다. 그리고 그 달 십 사일 저녁 때에 예리고 평야에서 과월절을 지켰다. 

죽음에 사로잡혀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이들이 하느님의 은혜로 살아나 약속의 땅인 하느님 나라로 입성하게 되는 것은 무죄한 어린양의 희생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이란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요르단을 건넌 이스라엘에게 과월절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과월절의 원형인 예수님의 과월절이 모형으로 그려진 것이 바로 죽은 나자로의 부활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자로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인 것이며 그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자로가 병이 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아들이 영광을 얻는 일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11:4) 4 예수께서는 그 전갈을 받으시고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고 번역이 된 부분은 ‘이 병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번역을 해야 맞습니다.  그러니까 나자로의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병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병으로 말미암은 나자로의 죽음도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이라 말씀하십니다. 

나자로가 병이 들어 죽은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것은  예수께서 나자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깜짝 쇼를 보여주심으로 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이시겠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이란 하느님의 것과 하늘의 것들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가시적으로 역사와 공간속에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에 의해 하느님의 성품이 계시되는 상태가 바로 ‘독사(δόξα)'  ‘하느님의 영광’ 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와 오래 참으심과 섬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곳이 어디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죽은 나자로가 살아난 사건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 극명하게 드러난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가능한 시체들이었던 우리가 전적으로 아들의 공로에 의해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것이 아들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로는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완전히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자로의 와병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있다가 가신 것입니다. 

(요한11:5-6) 5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고 계셨다.  6 그러나 나자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르시다가 이틀이 지난 뒤에야~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주님은 단순히 병이나 고쳐 주시러 오신 분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게 진짜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자로에게 가시지요? 

히브리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사흘 동안은 그 시체 주위에 머물다가 나흘째에는 완전히 육체와 격리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여지마저 철저하게 부수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내가 풀풀 나는 때에 나자로의 무덤으로 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완전히 죽으셔야 하거든요   철저하게 죽은 나자로의 인생이 되셔서 완전히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죽음을 폐기처분시켜 버리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죽음과 완전히 결별을 하게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완전한 은혜의 십자가가 지금 나자로의 이야기에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로가 죽게 놔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실 때 굳이 거기에 안 가셨던 것을 잊지 마세요. 예수님이 나자로를 고치시려 마음을 먹으셨다면 요르단 동편에서 ‘나자로야 나아라’ 하고 말로 고치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자로가 죽을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완전히 죽은 다음에 그에게 가신 것은 우리 교회에게 전하실 메시지가 있으셨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왜 ‘이틀을 더 계셨다’ 라는 어구와 ‘나흘’ 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쓰였는지는 말씀을 드렸지요?  본문 14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나자로가 병들었을 때에 그곳에 계시지 않은 것을 기뻐하십니다

(요한11:14-15) 14 그래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15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그곳으로 가자.' 

나자로가 죽어야 그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나자로의 죽음의 현장에 당신이 계시지 않았던 것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신 이유를 뭐라 하십니까?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 그러니까 당신 백성들의 믿음을 위해서 나자로를 죽이시는 것도 불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위해 우리를 죽도록 패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기쁨이요  사랑인 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이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그게 사랑입니까?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아비라면 자식의 다리를 부러뜨려야지요.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엉뚱한 길로 달려가는 자식의 앞을 가시로 담으로 막아서고 그래도 가겠다고 하면 다리를 부러뜨려 버리는 그것이 아버지의 진짜 사랑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 마치 우리를 죽음의 자리로 내모시는 것 같이 우리를 대우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병이나 고쳐주고 목숨이나 부지하게 만들어 주는것이 사랑이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요한11:35-37) 35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래서 유다인들은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던가 봅니다' 하고 말하였다.  37 또 그들 가운데에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 보시면 마치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참 많이 사랑했었나보다 저렇게 우는 걸 보니’ 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추켜 세우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37절을 보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고 비아냥 거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지금 정 반대로 ‘저 사람이 나자로를 사랑했던 것처럼 울고 있다 그렇다면 소경의 눈을 드게 했던 그 실력으로 나자로의 병을 고칠수는 없었단 말인가? 저 사람은 나자로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과 죄인들의 사랑의 내용은 천양지차인 것입니다. 이제 나자로를 종으로 붙들고 있었던 죽음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보세요.

 (요한11:33) 33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 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문상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悲痛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痛憤히 여기다 엠브리마오마이’ 는 강한 분노와 불쾌감으로 호되게 꾸짖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민망히 여기다 타라소오’ 도 역시 분을 못 이겨 크게 치를 떠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화를 내셨을까요?  누구에게 화를 내신 것이지요? 마리아? 유다인? 아닙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붙들고 있는 죽음의 세력에게 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 예수님의 눈물은 화가나서 흘리는 눈물도 아니고 어차피 살려낼 나자로가 불쌍해서 우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유다인들의 눈물에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에 사로잡혀 죽음(死亡)의 증상들을 겪어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의 눈물에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시편56:8) 8 나의 한탄을 기록해 두소서. 이 눈물을 당신 부대에 담아 두소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도망을 했을 때 너무 견디기 힘이 들어 많이 울었습니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척을 해야 했을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블레셋은 다윗이 때려죽인 골리앗의 나라 아닙니까? 오죽하면 그 적국으로 피신을 했을까요? 

다윗은 하느님께 아룁니다. ‘ 하느님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다 아시지요? 하느님의 책에 기록이 되어 있지요? 그러니 나의 눈물을 주의 부대에 담아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합니다.  거기에서의 주님의 책은 하느님의 계획과 주권의 책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라3:16) 16 나를 공경하던 자들이 이런 말을 주고 받게 되었다. 이 야훼는 그것을 똑똑히 들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나를 공경하고 내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나는 책에 적어 두고 잊지 않으리라. 

하느님의 백성들의 삶과 그들이 걷는 여정은 모두 하느님의 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 당신의 백성들의 눈물을 하느님께서 당신의 병에 담으시고 그 눈물 부대를 십자가에서 다 깨뜨려 버리시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자로의 무덤 앞에서 죽음에 압도되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타 그리고 다른 유다인들의 눈물에 동참하신 것은 당신의 백성들의 눈물의 부대를 터트리시는 십자가를 미리 힌트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자로의 무덤 돌문을 치우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불신이 또 한 번 폭로 되지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데 왜 문을 열라고 하느냐 고 오히려 주님을 말립니다. 죽음에 사로잡힌 자들의 불신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나자로의 무덤으로 들어가십니다. 왜 굳이 무덤을 여시고 그 무덤 속에서 썩어가는 시체를 폭로하십니까?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무덤 속에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니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지금도 우리는 때때로 무덤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지경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하느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그렇게 썩어가는 시체로서의 나자로의 상태가 폭로되자 주님은 나자로의 죽음을 빨아들여 그 죽음을 품에 안고 십자가에서  죽어 버리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그 죽음에서 풀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요한11:44) 44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수건이라고 번역이 된 ‘수다리온’ 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얼굴을 덮었던 수건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요한20:7) 7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 

요한이 ‘수다리온’ 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과 나자로의 부활을 하나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자로가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의로 결박되어 있던 나자로를 풀어놓아 가게 하라고 명령하시지요? 그 단어가 ‘압히에미 휘파고’ 입니다. 어떻게 나자로가 죽음을 상징하는 수의의 결박에서 풀려나게 되는지 요한복음 18장으로 가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18:8.12) 8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12 그 때에 군인들과 그 사령관과 유다인의 경비병들이 예수를 붙잡아 결박하여 ~

예수님께서 자기를 결박하러 온 군대에게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놔둬라’ 고 하시지요?  그 똑같은 단어가 바로 ‘압히에미 휘파고’ 입니다. 똑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결박으로 대신 풀려나게 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요한이 ‘압히에고 휘파고’ 를 쓴 것은 죽은 나자로의 부활이 예수님의 결박에 의해 주어지게 되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힌트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 결박당하시고 정작 그 죽음에게 물려 죽어야 하는 자들이 풀려나서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건 11장 43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요한11:43) 43 말씀을 마치시고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치시자 

여기에서 ‘큰 소리로 부르다’ 라고 번역이 된 ’크라우가조’ 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 여섯 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모두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여라’ 하고 외치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요한12:13.18:40.19:6.12.15) 

그것은 죽음에 물려있던 나자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죽음의 열매들을 미워하십니다. 엠브리마오마이/ 타라소’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분노와 불쾌감을 보시고도 계속해서 죽음의 열매들을 탐닉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죽음이 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분이 우리 안에서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데 여전히 죽음의 종처럼 사시겠어요? 그래봐야 우리만 손해입니다. 

우리는 그 죽음의 열매들을 탐닉하면서 그것들이 주는 쾌락이 영원할 것 같이 생각하지만  곧 고통과 눈물로 우리를 공격한다는것을 경험해 보셔서 아시지요?  그리고 아울러 주님은 그 죽음에게 매여 종노릇하던 자들의 눈물을  모두 당신 부대에 담으십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그 부대을 터트려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다툼도 없는 하느님 나라를 문득문득 맛보며 살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많이 힘드시지요? 눈물이 나십니까? 

우리 주님이 함께 우리의 모든 상황을 다 아시고 함께 울어주시며 이미 눈물통을 박살을 내 버리셨다는 것 잊지 마시고 상황과 환경에 지지 마세요. 그것들은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고 있고 희망하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그런 것들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됩니다.  힘 내십니오. 주님이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절대 실패할 수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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