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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한8:12~3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31 조회수901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사순제5주간 화요일 복음과 함께)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한8:12~30)

12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13 그러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증언하고 있으니 그것은 참된 증언이 못 됩니다' 하며 대들었다. 1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 하셨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으니 내가 비록 나 자신을 증언한다 해도 내 증언은 참되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15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결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16 혹시 내가 무슨 판단을 하더라도 내 판단은 공정하다. 그것은 나 혼자서 판단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 판단하기 때문이다. 17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이 증언하면 그 증언은 참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18 내가 바로 나 자신을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증언해 주신다.' 19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당신 아버지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뿐더러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만일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0 이것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궤가 있는 곳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다. 때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간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찾다가 자기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을 터이니 내가 가는 곳에는 오지 못할 것이다.' 22 이 말씀을 듣고 유다인들은 '이 사람이 자기가 가는 곳에 우리는 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23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24 그래서 나는 너희가 자기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채 죽으리라고 한 것이다. 만일 너희가 내가 그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와 같이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 25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하고 그들이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처음부터 내가 누구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느냐? 26 나는 너희에 대해서 할 말도 많고 판단할 것도 많지만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기에 나도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그대로 이 세상에 말할 뿐이다.' 27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28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 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지킴과 절기 준수를 자신들의 빛 됨의 근거로 내 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절기를 지키고,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규례들과 자신들의 선민 됨을 자랑하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초막절날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물이고, 내가 빛이다고 말씀을 하심으로 그들을 어두움이라 선포하시고는 그들이 내놓고 있는 열심과 방법이 아닌 예수라는 해결책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거기에 대한 이해하기 쉬운 예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는 사건을 집어넣어 유다인들의 추악함과 불가능함을 폭로하시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만 말미암게 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게 8장 서두의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다인들은 계속 율법을 근거로 자신들의 의인됨을 주장하고 있고 주님은 계속해서 그들이 붙들고 있는 율법의 무용성을 지적하고 은혜로 초대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인간들에게 그들의 불가능함을 지적하시고 구원자 앞에 항복하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증거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지금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의인됨의 근거로 제시하는 율법을 들어 계속해서 살인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19절 이하를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을 놓고 율법을 어긴 자라는 죄명을 씌워 주님을 죽이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초막절을 열심으로 지키는 유다인들의 행태가 적나라하게 고발이 되어 있고 8장으로 넘어가서는 유대다인들이,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을 들고 한 여인을 죽이려 합니다.

안식일 준수라는 율법으로 주님을 죽이려는 유다인들의 모습과 열심으로 절기를 지키고 있는 그들의 모습, 그리고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으로 가련한 한 여인을 죽이려 달려드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들이 율법을 사람을 단죄하고 죽이는 흉기로 사용하고 있지요. 율법의 마침은 사랑입니다.(로마13:8,10 갈라5:14) 그런데 그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킨다고 하는 유다인들이 그 율법을 들고 다른 이들을 죽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그들이 율법이 지향하고 있는 목적을 알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를 삼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렇게 율법을 소유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를 빛이라 자처하던 유다인들에게, 다른 말로 자신들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에게 내가 빛이다고 말씀하심으로 상대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다인들이 어두움임을 公布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7장에서는 열심히 초막절 예식을 행하며 제단에 물을 갖다 붓고 있던 유다인들에게 내가 물이다라고 말씀하시고 8장에 서는 역시 초막절 예식을 행하기 위해 열심히 촛불을 켜고 춤을 추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내가 빛이다고 말씀하심으로 인간은 절 대 율법으로는 생명수를 마실 수 없을 뿐 아니라 빛으로 나아올 수도 없음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간음한 여인 이야기를 삽입해서 인간의 불가능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좀 더 구체적인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가 삽입부분이라는 것을 조금만 더 설명을 해 드리고 오늘 본문의 구체적 내용 분석으로 넘어가지요.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그런데 11절에는 예수님과 간음 한 여인 둘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12절의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다시는 어느 것을 받는 말일까요? 12절은 737절 이하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7:37)37 그 명절의 고비가 되는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는 일어서서 이렇게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예수님께서 초막절 끝 날에 내게로 와서 마셔라 고 말씀하신 후 당신의 생명수 되심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오고 812절에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의 빛이다 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812절의 그들37절의 군중인 것이고 다시또한 37절을 전제한 단어인 것입니다.

그 맥락을 놓치지 마시고 예수님은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세상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밝혀 주십니다.

 

(요한8:12) 12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라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자들만을 위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316절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에서의 세상또한 전체 세상이 아닌 하느님의 택한 자들만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다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느님이 택한 자들만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고 그들이 빛이신 예수가 주시는 생명의 빛을 부여받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인들은 그 빛이신 주님을 따르기는커녕 죽이려 해요. 따라서 그들은 어두움 이 맞아요. 어두움은 자신의 어두움을 지적하는 빛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능성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인들은 자신들을 어두움이라 말씀하시는 주님을 거짓 증거자로 몰아붙입니다.

 

(요한8:13) 13 그러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증언하고 있으니 그것은 참된 증언이 못 됩니다' 하며 대들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의 율법에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그 증거가 참이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신명19:15) 지금 바리사이인들은 앞에서 본 것처럼 역시 율법을 들어 율법의 주인이신 주님을 거짓으로 몰고 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을 하시는지 보세요.

 

(요한8:16-18) 16 혹시 내가 무슨 판단을 하더라도 내 판단은 공정하다. 그것은 나 혼자서 판단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 판단하기 때문이다. 17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이 증언하면 그 증언은 참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18 내가 바로 나 자신을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증언해 주신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이 당신과 함께 계심으로 당신의 증거는 혼자의 증거가 아닌 둘의 증거이기에 당신의 증거가 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맞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아버지와 항상 함께 존재하시는 분이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순종하여 그 분의 증거를 자신의 증거로 삼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의 증거는 항상 둘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묻습니다.

 

(요한8:19) 19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당신 아버지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뿐더러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만일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바리사이인들의 질문에 주님은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목숨 걸고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는 바리사이인들에게 너희는 나를 알아보지 못 하므로 하느님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그들의 무지를 폭로해 버리십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생애와 그 분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이며 그 은혜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고 그들은 심판대에서 죽음이라는 언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목숨 걸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죽음을 선고를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만하면 바리사이인들이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잡아 죽이고 싶었을 만도 한데 그들이 예수님을 잡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요한8:20) 20 이것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궤가 있는 곳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다. 때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이 바리사이인들이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잡지 않은 것은 아직 예수님의 죽으실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굳이 밝히는 것은 바리사이인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잡아 죽이고 싶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20절 상반부에 예수님이 헌금궤 앞에서 그들을 가르치셨다는 어구가 나오지요? 그것은 주님이 성전뜰중, 여인의 뜰에 있는 헌금궤(13개가 있었음) 앞에서, 즉 산헤드린 공회가 모이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계셨음을 일부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때가 차지 않아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어구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주님은 계속해서 시퍼런 율법의 칼날을 들이대며 選民임을 자처하는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는 독설을 퍼부으십니다. 유다인들은 율법과 제사와 할례를 갖고 있는 자기민족만큼은 죄와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 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은 당신을 찾다가 죄가운데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21절 과 24절 두 절에 걸쳐서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요한8:21-24)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간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찾다가 자기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을 터이니 내가 가는 곳에는 오지 못할 것이다.' 22 이 말씀을 듣고 유다인들은 '이 사람이 자기가 가는 곳에 우리는 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23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24 그래서 나는 너희가 자기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채 죽으리라고 한 것이다. 만일 너희가 내가 그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와 같이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은 율법을 가지고 그 율법으로 남을 단죄하고 살해하려 하는 것 자체가 죄이며 그들은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라는 엄청난 선포를 해 버리신 것입니다.

24절을 보시면 내가 그이라는 것이라는 어구가 있지요? 그 어구는 우리가 잘 아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지요. 주님은 지금 당신이 야훼 하느님이심을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조금 풀어 보면 이러합니다. 너희는 내가 하느님인 것을 믿지 않고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6장에서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공포에 떠는 제자들을 향해 에고 에이미’(요한6:20)라고 자신이 하느님이심을 밝히셨고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로, 많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하느님 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죄와 죽음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으로 군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임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며 그 죄의 댓가로 오는 것이 죽음이라는 엄청 난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이런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불가능함과 무력함 속에 있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얼마든지 자기들 스스로의 힘과 지혜를 이용하여 선에 이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복에도 도달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티끌인 인간이, ()인 인간이 자신의 가능성과 유()로서의 존재 증명을 하려 할 때 성경이 그 것을 죄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 선에 이르고 구원과 행복에 이르겠다는 발상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선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반드시 자기보다 약하고 못나 보이는 이들을 정죄하고 밟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서 라는 존재의 존재 증명이 시작이 되면 그는 반드시 다른 이들을 경쟁자로, 심지어는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는 존재를 뛰어난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해 나보다 못나 보이거나 실수를 범한 이들을 정죄하게 되는 것이고 라는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자들을 없애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위나 재산이나 지식이나 열심 등이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되고 있고 그들을 주눅 들게 하고 있다면 그건 죄인 것입니다. 그게 성경에 관한 지식이어도, 종교 행위에 대한 열심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선 유다인들이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하느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 분 앞에서 납작 엎드려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방법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들의 죄를 한 번에 지고 죽으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이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어두움을 지적하시는 하느님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기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너희들은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것이며 죄가운데서 살다가 죄가운데서 죽을 것이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해결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말은 죽음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만 정복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자꾸 율법을 들고 너희들을 증명하려 하며 왜 그 율법으로 남을 단죄하고 심지어 남을 살해하려 하느냐하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 측에서 그 어떤 귀한 것을 내 놓더라도 극복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역사 속에 났다가 사라져 갔습니다. 그들이 인류를 위해 유익한 일들을 많이 한 것은 누가 봐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노벨상 수상자들이 모두 힘을 합한다 하더라고 죽음을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이루어낸 평화에 관한 모든 업적들을 다 합친다 하더라도 죽음은 이길 수 없습니다. 슈바이처의 봉사와 간디의 저항과 석가모니나 노자, 장자,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다 합쳐도 죽음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는 고백에서만 극복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평화를 위해 무기를 비축해야 하는 모순 덩어리들입니다. 훌륭한 자녀 양육을 위해 교활함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지혜를 의지하여 내어놓는 모든 종류의 선이 다 죄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아니 예수를 의지하지 않는 인간에게서 나온 그 어떤 선해 보이는 행위도 결국에는 자신의 손해와 상함 앞에 서 그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자아숭배교의 교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인들은 자기들의 빛 됨을 증명하기 위해 율법이라는 칼을 들고 다른 이들을 살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옷 술에 달고 다니며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사흘에 한번 단식하는 것을 자랑삼아 떠벌리던 자기 나름대로의 하느님 자녀다운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구제를 안했습니까? 그들의 십일조는 고스란히 고아와 과부의 구제에 쓰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종교 행위들이 자기 존재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자기 의가 될 때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의 살해 로 이어지게 되더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전제로 구원과 행복에 도달하려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감동해 마지않는 선행과 사랑과 섬김의 모습 속에서 자기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유익을 위해 상대방의 목을 조르고야 마는 죄인들의 무서운 속성이 그 속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의지하여 자기를 증명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으로 행복과 구원에 이르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 그들이 내어놓는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과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율법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지식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과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1장 시작에서부터 8장까지 줄곧 그 이야기를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아, 너희들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구원에 이르라이것이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이며, 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주제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2319절의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는 구절을 해설하시는데 어쩌면 그렇게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맞아 떨어지는지 모릅니다. 구약에 세번(출애23:19, 34:26, 신명14:21) 이나 반복되어 나오는 그 말씀은 죄인들의 맹목적인 맘몬 숭배에 대한 진단임과 동시에 예견이며 그러한 죄인들에게 쏟아 부어지게 될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문헌에 보면 새끼 염소를 어미의 젖에 삶는 것은 풍요를 위한 우상 숭배의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들은 이 땅에서의 풍요를 얻기 위해, 다른 말로 이 땅의 것들을 이용하여 행복에 이르기 위해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예의도 포기하는 존재임을 그 관습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끼를 잡아먹기 위해 그 염소의 어미의 젖으로 그 새끼를 삶는 것은 정상적인 이성과 감정을 가진 이들에게는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풍요를 향한 인간들의 맹목적인 신앙은 최소한의 예의조차 쓰레기처럼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그런 풍요를 향한 인간들의 맹목적 추구를 향해 일갈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런 짓 하지 마라

오늘 날은 어떤가요?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늙고 병든 어미 소를 갈아 육골분 사료로 만들어 새끼 송아지들에게 먹입니다. 새끼 염소를 어미젖에 삶는 것과 어미를 죽여 새끼에게 먹이는 것이 뭐가 다른가요? 자아 숭배 교에 빠진 인간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풍요를 위해서 어미의 젖에 새끼 염소를 삶는 존재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가능성을 의지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이르려 하는 인간은 이 땅의 풍요를 쟁취하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 돌아온 것이 광우병이라는 전염병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단골 심판의 메뉴 중 하나가 뭡니까? 전염병입니다. 지금 하느님은 풍요를 향한 맹목적 질주를 하고 있는 죄인들에게 심판의 경고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 ‘교회야, 왜 너희들까지 풍요를 향한 광념(狂念)에 사로잡혀 세상과 함께 미쳐가고 있니?’

성도는 우리를 온전히 부인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아야지, 풍요의 쟁취라는 우리의 목표를 가지고 하느님을 이용하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러한 狂念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신다면 교회라 하는 자들이 또 다시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될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19’ 가 온통 세상을 시끄럽게 합니다. 역시 동물이 그 매개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경고입니다.

(신명28:58~62) 58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의 존엄한 이름 야훼를 두려워할 줄 모르고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법의 한 조목 한 조목을 성심껏 지키지 않는다면, 59 야훼께서는 너희와 너희 후손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떠나지 아니하는 무서운 재앙, 고약한 악질로 치실 것이다. 60 너희가 그토록 무서워하던 에집트의 전염병을 다시 끌어 들이시리니 그것이 너희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61 야훼께서는 이 법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온갖 병, 온갖 재앙을 너희 위에 쏟으실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62 너희는 하늘의 별만큼 많아지겠지만, 결국 몇 사람 남지 않을 것이다. 너희 하느님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냄으로 해서 참 된 행복에 이르게 되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이 세상에서의 힘과 그 힘으로 말미암는 세상적 행복에 눈을 두고 사는 한 우리는 우리의 자랑과 우리의 존재 증명을 위해 하느님을 살해 하는 자가 될 것이고 그렇게 죄 가운데서 죽어 영원한 죽음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나를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을 위해 내가 죽어주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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